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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굶주린 사람들의 세 가지 질문 (삼하 11:26-12:13a, 요 6:24-35, 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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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사람들의 세 가지 질문 (삼하 11:26-12:13a, 요 6:24-35, 엡 4:1-16)

<Seekers? Or Stalkers?>
      
중학교에 다니던 어떤 학생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선생님이 쓴 편지 속의 한 문장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개야, 네가 그토록 훌륭한 제자가 되어준 것이 너무 고맙구나. 부족한 내가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이란다. 너 같은 제자를 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제자들이 선생님께 먼저 편지를 쓰는 일은 왕왕 있지만, 선생님이 제자에게 먼저 감사의 편지를 쓰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 학생이 선생님의 따뜻한 진심이 담긴 편지를 두고두고 마음에 새겼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역시 날마다 우리에게 편지를 쓰십시다. 새날이 밝아 동쪽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해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어서 너무 고맙구나.” 저녁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통해서도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무개야, 오늘도 열심히 살아주어서 너무 고맙구나.” 
      
아니,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개야, 이 무더운 여름날에 딴 곳으로 놀러가지 않고 여기 내리교회에 나와 준 것이 너무 고맙구나.” 생각해보니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막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은밀한 음성을 듣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어진 복음서 말씀은 지난주에 살펴본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일부가 배 몇 척을 나누어 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장소에 다시 갔는데, 거기에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현장을 다시 방문해서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또 이들을 피해서 숨으셨고, 숨 가쁜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물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그 기적을 체험했던 오천 명 중에서도 아주 극성맞은 열성팬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유명한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을 만들어 그 인기 스타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나서는 열혈팬들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아마도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디에든지 찾아내 따라나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고 했던 무리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경험한 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평생 굶주릴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기어코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Seekers,” “구도자들”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만 따르면 양식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Stalkers”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무엇인가 채울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 허기짐과 목마름은 단지 육적인 양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사랑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 그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공허함, 인생의 모든 허기와 갈증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무리들과 오늘 우리의 모습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히 예수님을 찾아 나선 구도자들이 던진 세 가지 질문을 주목해봐야 할 것입니다.


<현문우답(賢問愚答)에서 우문현답(愚問賢答)으로>
      
第一問 :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먼저 이 극성팬들이 여러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난 뒤 던진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세요.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여기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으로서 그 당시 존경받는 스승에게 썼던 용어이므로 이 무리들이 나름대로 예수님을 존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우리도 모르게 언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그토록 힘써 찾아다녔던 예수님을 마침내 찾았으므로 반가운 마음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겠지요. 
      
극성팬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주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이 무리들이 예수님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 간파하셨습니다.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 “표적”(sign) 혹은 “표징”이라는 말은 아주 주요합니다. 표적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기호요 상징입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 수많은 광고판을 볼 수 있습니다. 기업가들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수많은 광고판을 세웁니다. 이 광고판은 한 기업의 상품을 지시하는 표적이지요. 이 표적 혹은 표징의 진정한 목적은 광고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소비자들이 오로지 광고판에만 열중하고 광고판 사진이나 문구에 푹 빠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광고판이 지시하는 제품이나 회사, 그것이 광고판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하나의 표적인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적이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열성팬들은 표적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라는 표적, 즉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 그 자체를 봐야하는데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을 보는 꼴이 되고 만 것이지요.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육적 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육적 양식을 먹고 배부른 것,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우리를 배불리 먹여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육적인 배고픔은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길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이 질문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표적만 보지 말고, 이 표적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진리,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에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무리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계속해서 뼈있는 대답을 주십니다. 27절을 보세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은 한 번 배불리 먹고 끝나는 양식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일어난 양식이 꼭 그런 것이지요. 
      
육의 양식, 썩어질 양식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양식을 구합니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끝입니다. 금방 허무해지고 또 다시 배가 고픕니다. 목이 마릅니다. 궁극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의 양식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第二問 :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무리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28절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 극성팬들도 육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도 함께 얻고 싶었습니다.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하지만 여기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무리들은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 썩지 않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 선물을 저절로 받을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가 하기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第三問 :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시는 예수님께 무리들이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30절을 보세요.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앞에서 두 번째 질문에서 무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자연스레 무리들은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또 다시 예수님의 표적 운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양식은 한 번 먹고 나면 도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러니 그런 기적을 다시 한 번 더 일으켜달라는 주문입니다. 그러면서 무리들은 과거에 광야에서 일어났던 만나 이야기를 꺼냅니다. 
      
31절을 봅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출 16:4, 15; 느 9: 15; 시 78: 24 참조).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 재해석을 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떡을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과거에만 떡을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아낌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 떡은 만나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32-3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는 예수님께 주문합니다. 34절을 봅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욕심도 많은 사람들이지요.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끊임없이 보채듯이 그런 떡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 굶주리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떡이 자기들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육신의 양식, 썩어질 양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런 떡이 있다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게 항상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지요. 


<예수께로 오면 생명의 떡! 믿으면 생수!>
      
이런 무리들의 부탁에 대해서 예수님이 주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언제나 배불리 먹어야 할 떡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언제나 예수님께로 오면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께 오면 언제나 굶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언제나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굶주려 있습니다. 목말라 있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근원적인 허기와 갈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극성팬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반드시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끈질기게 쫓아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는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풀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 썩어질 양식보다 훨씬 더 귀한 영생의 양식,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합니다. 
      
가을에 뒷마당에 나가보면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낙엽은 떨어지지만 가지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습니다. 가지에 붙어있는 모든 낙엽들이 떨어져나간다 해도 가지는 오로지 하늘만 쳐다봅니다. 이내 겨울이 찾아와 북풍한설이 몰아쳐 나뭇가지를 세차게 때려도 가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땅을 쳐다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 무서운 눈보라 비바람을 이겨내고 오로지 오로지 하늘만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봄이 오면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납니다. 이내 이파리가 되어서 푸르고 싱싱하게 새로운 생명을 내놓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나뭇가지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온갖 눈보라,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을 향하여 날개를 활짝 편 가지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배를 채우고 육신의 목을 축이는 것,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기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어디까지나 표적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영원토록 우리를 배고프지 않게 하시려고 생명의 떡, 생수가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이 표적에만 눈이 멀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아서라도 언제나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 표적이 가리키는 생명의 떡, 생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그 예수님을 믿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이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 나아오고, 그분을 믿어서 이러한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를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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