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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히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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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최고입니다! (히 1:1-3)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를 강해하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남미 집회를 다녀온 후 신약 성경 중 한 책을 강해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는데, 남미 여행 중 주일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히브리서를 강해야 해야 한다.” 강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갑작스럽고 거역할 수 없을 것처럼 강한 이 마음, 아무 준비도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이 주신 것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히 성경 읽기부터 시작하여 히브리서 강해를 준비하다 보니 히브리서가 성경 중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온전하고 조직적으로 다룬 성경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빠, 최고!”하지요. 브라질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따봉!” 하면 금방 관계가 좋아진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따봉“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입니다! 좀 싱겁지요! 그 말하려고 이렇게 길게 써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뻔한 것이라면 듣고자 하는 흥미가 없어진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아간다는 것, 결국 예수님이 최고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남미 여행 중 이과수 폭포를 가 보았는데, 브라질 쪽에서 보고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강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폭포 바로 앞까지 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쪽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쪽에서 본 광경이 너무 놀라와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주위에서 하도 권하길래 다음 날 아르헨티나 쪽에 갔습니다. 가보니 역시 강 위로 다리를 만들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브라질 쪽에서는 강 아래에서 위로 보며 갔기에 가는 내내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쪽은 그저 평범한 큰 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들어가 보니 굉음이 울리며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폭포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과수 폭포 위에서 폭포를 내려다 본다! 이것은 브라질 쪽에서 보던 것과 또 비교가 안되는 광경이었습니다. 이과수 폭포를 보아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한 시간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과 친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인생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보인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확신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군에서 훈련받을 때 독도법 훈련이 있었는데, 생전 가보지 않았던 산 정상에서 지도 하나 주고 가라는 것입니다. 지도가 없으면 앞이 캄캄합니다. 사방이 산인데, 어느 산으로 가야 하나, 길은 어디에 있나? 답답합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갑자기 눈이 뜨입니다. 강이 있고 산이 있고 장애물이 있어도 길이 보입니다. 가야 할 방향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이처럼 인생이 보입니다. 전혀 달리 보입니다.
황홀합니다. 기쁩니다. 담대함이 생깁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서 모든 유익한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겠습니까? 

솔직히 이과수 폭포는 보지 못해도, 아르헨티나 쪽에서 보지 못했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인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영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를 왜 기록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저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성경이고 수신인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히브리서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가 정경이 된 것은 히브리서의 메시지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인은 히브리서를 읽어 보아야 알 수 있는데, 본래 유대교인이었던 히브리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인데 예수 믿고서 기가막힌 어려움을 당한 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유를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위협에 처해졌습니다.
먼저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라고 지목되어 핍박받았습니다. 재산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성전에 관한 모든 특권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당국에 의하여도 더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할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마귀는 춤을 추고 있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믿은 것이 큰 실수요 환각이요 죄라고 생각하게 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평생 존경하고 따르던 산헤드린 공회원과 제사장들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따르니까 하나님께서 너회를 ‘번성케’ 하던가?‘ ’이것이 축복인가? 이것이 구원인가?‘ ’왜 예수는 재림해 오지 않는 거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편지를 쓴 것은, 이들이 체포된다면 로마가 제시하는 석방의 조건 -즉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것- 을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급히 기독교가 유대교와 무엇이 다른지, 왜 이런 핍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심지어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권위 있고 명료하고 조직적으로 밝혀주어야 하였습니다.
그가 배교의 위기를 맞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 보다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다, 천사들보다 우월하다. 모세보다 우월하다, 여호수아보다 우월하다, 아론보다 우월하다, 유대교의 어떤 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낫다’ ‘크다’는 비교급 어휘가 굉장히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또 ‘앞을 바라보라’는 말이 돋보입니다.  

1절에 선지자가 나옵니다. 

히 1: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란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모든 은사 중 가장 큰 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선지자를 폐하신 분입니다.
2절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 욕심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제가 할 일은 교인들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저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제게 가장 유익한 것은 예수님만 드러나고 저는 잊혀지는 것입니다.
설교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지나고 나면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귀가 열리면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그 분이십니다. 
3절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러 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알고서도 힘들다고 어렵다고 예수님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재산을 다 잃고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하는 위협을 받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당합니다. 손해 보고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받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까 떠날까 저울질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상처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한테 만큼은 야박하세요. 저는 하나님이 무서워요. 저는 아직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라는 게 실감이 안 돼요.”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용서가 안됩니다. 제 지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힘듭니다.”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발광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최고입니까? 그 무엇 보다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까?

어제 상계 백병원 최영민박사가 오셔서 우울증 강의를 하셨는데,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다고 합니다. 한국 아줌마들의 드라마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 보기가 싫어졌다, 그러면 우울증이랍니다. 한국 아저씨들에게는 아마 스포츠 중계일 것입니다. 스포츠 중계가 싫어졌다 하면 우울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 아니라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드라마, 스포츠 다 시시해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좋고,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까? 죽어도 좋습니까?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예수믿고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믿어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여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니 자녀를 위하여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아십니까? 사랑하십니까?

히브리서 설교를 들으면서 히브리서 큐티를 꼭 하십시오. 영성일기를 쓰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을 잘 모르는 분은 이번에 예수님을 더욱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지 못하는 분은 이번에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여러분, 아들을 아느냐? 딸을 아느냐? 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목사를 아십니까? 자신없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모른다고 하면?
그러므로 예수님을 지식으로도 관계로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초년 목회 때 참 존경하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새문안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동익목사님이셨습니다. 1998년 4월 56세의 나이로 소천하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온 몸에 암이 퍼져서 사경을 헤매다가 잠깐 다시 강단에 서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콩팥의 암, 내장에 다 퍼짐, 고관절을 썩게 함, 6개월 판정, 병원에서 모두 잠든 시간에 눈물이 비오듯이“하나님, 제게 기회를 주세요! 이제 쉰여섯입니다. 오라 하시면 가겠지만, 허락하시면 한국교회 모태교회 담임목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뜻깊은 목회 발자취를 남기고 가고 싶습니다.”

새벽 녁에, 너무나 강한 음성이 마음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이번은 살려 준다. 그러나 이전같이 목회하면 안돼, 말로만 하면 안돼, 직접 체험한 능력으로 나를 증거하라. 그래야 너도 살고 성도도 살 수 있어!’
한양대 병원에서 치료 불가, 퇴원 권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재 검진, 의료진 사이 일주일 고민 의사들이 찾아와“목사님, 결정해 주십시오.”하나님의 응답을 다시 확인한 후에“수술합시다.”오전 콩팥제거, 내장 암제거, 오후, 다리 절단, 인공관절 시술하였습니다. 

수술 후, 마취가 깨어날 때 손을 꼭 붙잡고 있음을 느낌.“내가 너를 붙들었노라!”그제야 손을 놓고 떠나심.
한 달만의 김동익목사님의 예배, 눈물의 예배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목회 초년생으로 너무나 궁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훌륭하신 목사님께 왜 ‘이전같이 목회하면 안돼, 말로만 하면 안돼, 직접 체험한 능력으로 나를 증거하라. 그래야 너도 살고 성도도 살 수 있어!’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문제입니다. 이제 예수님 정말 붙잡고 사십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1907년, 세계에서 알아주는 부홍이 한국에 임하였습니다. 
그 후 불과 몇 년 안돼 무서운 영적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던 성도들이 협박당하고 고문당하는 힘든 과정에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시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교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동의했고 엄청난 신앙의 위기가 왔 습니다. 

하지만 1907년 성령으로 예수님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났기에 다 죽어서 끝난 것 같았지만,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한국 교회를 세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생겼습니다. 무명의 성도들도 “하나님 믿어 뉘 좋은 게 뭐가 있어! 하나도 없잖아!" “며느리가 이상한 서양 잡신을 믿어서 이렇게 되었다.”면서 모든 책임올  뒤집어쓰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굶어도 목회하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어 보려고 모든 것 다 버려두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초라한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켰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마음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황제 주위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공직이냐? 기독교 신앙이냐?”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당연히 공직을 택할 줄 알았는데,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을 택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통령도 장관도 사장도 해야 하지만, 어느 때는 다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소돔과 고모라 때가 우리에게도 오는 것입니다.
어디서 버릴 힘이 나옵니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예수님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영광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모든 것 보다 뛰어난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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