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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 차이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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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의 사랑 차이 (요일 4:7-12)

 
내 용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동일인로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요한에게 나타난 특징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라고 했습니다. 이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가장 나이가 어린 요한은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약간의 편애적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요한에 대한 소문이 하나 생긴 것이 요한복음 21장 20절 이하에 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이런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제자들 가운데 제일 오래 생존한 사람이 요한이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 당했는데 요한만이 100세가 넘도록 목회를 하다가 자연사해서 지금 에베소에 요한의 무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특별 관계도 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살로메인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요한은 이종사촌 형제가 됩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큰 공로가 있습니다.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모두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서 물질적으로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받은 자가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모든 성경은 주제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의 대표적 성경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도 사랑이 주제로 되어 있고 오늘 말씀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만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30번 사용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쉽게 해석하면 요한의 신학이란 뭐냐? 하나님과 인간 똑같이 제일 관심사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모든 관계성을 이루어가는 신학의 기초를 요한이 놓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쉽게 계산이 됩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랑을 빼버리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교, 예술, 정치, 학문, 경제 모두가 원초적 기원은 사랑 때문에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의 노래는 제1절이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종교나 예술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랑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라는 제목만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 인류를 상대로 한 애정,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 평화와 행복을 위한 발명 모두가 사랑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하다못해 독재자들이 항상 하는 말도 “나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여 나의 삶을 헌신합니다.”라고 모두다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해야 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 오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주를 거쳐서 하나님 사랑의 특성을 조명하겠습니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대체 행복이 무엇인가? 사랑 가운데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인간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지금 세상은 모두가 이 사랑의 부작용 때문에 고통스러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한번 취급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적 사랑인데 비해서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구절을 고린도전서 13장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타적 기초에 의한 것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는 이타적이고 사람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길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아가페적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인간 사회에서 가장 진한 사랑의 모습을 모성애라고 말합니다. 모성애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거룩한 평가를 받는 모성애마저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한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때로는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과 갈등을 느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의를 말씀하시면서 불의를 용납하고 계시나이까?” 이 문제입니다. 논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가라지가 많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원수들이 이렇게 하였구나.” “그러면 원수가 행한 저 나쁜 일을 지금 당장 뽑아버리면 되지 않겠나이까? 뽑아버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가만 두어라. 추수 때까지 두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추수 때는 언제입니까? 인류의 종말적 심판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본다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는 불의의 세력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면 왜 그냥 두시는가? 그 이유를 주인이 말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상할까 하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을 성경에서는 오래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모두 싫어하는 것입니다. 없애버리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 때문에 매우 불편한 국제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주변 국가들을 다 점령했었습니다. 러시아도 이겼었습니다. 중국도 식민지였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과 다 영토분쟁이 있습니다. 러시아하고도 마찬가지이고 중국하고도 마찬가지이고 한국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아! 일본은 과거에 이 나라를 통째로 다 멸망시킨 죄가 있는데 저 독도라고 하는 돌멩이 하나를 왜 저렇게 탐을 낼까? 저 못된 놈들! 과거 죄를 생각하면 저럴 수가 없는데….’ 이런 생각에 우리는 항상 독도 문제 때문에 울분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즘에 또 이렇게 되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마음의 생각이 거의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일본 땅은 조금씩 바다로 가라앉는다고 했는데 아예 빨리 좀 내려가게 해주세요.’ 이게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로 지나가게 되었을 때 상황이 나옵니다. 유대 나라는 아주 조그만 나라인데도 지역감정이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북쪽은 갈릴리이고 중간은 사마리아이고 아래는 유대 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 유대 땅 예루살렘을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얼마나 지역감정이 심했는지 절대 교제 안하고 결혼 안하고 사업도 같이 안하고 말도 안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가셨을 때 수가성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자를 만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사마리아에서 목이 마르니까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여인에게 말을 했을 때 여자 반응이 아주 금방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우리는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관계 아닙니까? 더군다나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하다니요?” 무슨 추행으로 본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일러라.” 말도 안합니다. 심한 사람은 땅도 밟지 않습니다. 아주 세계에서 인종 편견, 지역감정이 가장 심한 곳이 그 지역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북쪽 사람들입니다. 남쪽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 중간 지점인 사마리아로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한 동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우리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이 땅 밟지 마라. 우리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꼴도 보기 싫고 듣기도 싫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너희들 이 동네에서 나가라.”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요청한 말은 “예수님! 이것은 불의 아닙니까? 이런 불의로 땅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놈들을 그냥 버려두시나이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 죽여 버리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쫓아내면 쫓겨나야지!”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고 신앙으로 살고자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같이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계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 야고보와 요한의 사랑이란 인류의 메시야 되신 예수의 고백을 들으면서 교육을 받으면서도 금방 그 자리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저 보기 싫은 놈들 불태워 죽여 버려야지 왜 그냥 두시나이까?” 이러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면서 예수님의 교육을 실제적으로 받으면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학원선교회가 있습니다. 날마다 가서 가르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제일 예쁩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예쁩니다. 트러블메이커는 ‘어휴! 저 얘는 왜 우리 반에 있어서 날마다 문제지?’ 이게 한계입니다. “목사님은 안 그러신가요?” 저에게 묻는다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은 누가 제일 예쁘세요?” “모범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제일 예쁩니다.” 인간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심한 예로, 엄마가 자녀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도 차별을 합니다. 아들이 더 좋을 수도 있고 딸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럽니까? 이게 한계점입니다.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노력 없이도 공연히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뻐지려고 모두 다 애쓰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상이 험상궂으면 죄 없는데 공연히 불량스럽게 취급당합니다. 저는 옛날 20대 적에 논문을 쓰기 위해서 강화도를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 제가 쓸 논문 재료가 한국 교회사에 남아있어서 그것을 연구하러 친구와 둘이 갔습니다. 그 시절에는 강화도에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가까워서 몰래 조각배를 타고 강화도에 간첩들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검문이 심했는데 낯선 젊은 청년 둘이 돌아다니니까 가는 데마다 검문이 걸리는 겁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뭐 하러 오셨습니까?” “왜 오신 겁니까?” “누구십니까?” “증명해 보십시오.” “어느 학교 다녔습니까?” “몇 해 졸업생입니까?” 막 질문하는데 얼떨떨하게 간첩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검문 때마다 경찰관이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봅니다. 나와 함께 간 친구에게만 계속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친구가 화가 났습니다. “야! 사실 너 때문에 왔는데 너한테는 검문 안하고 왜 나한테 계속 검문 하냐?” 친구를 약 올렸습니다. “인상 때문이야.” 그랬더니 그 친구의 대답이 명답입니다. “맞다. 인상 때문이 맞다. 경찰관이 우리를 볼 때 나는 그래도 인상이 간첩이라도 해먹을 것 같은 능력 있는 자로 봤고 너는 바보 같아서 물을 것도 없는 거야.” 저는 신문에 매우 불행한 사건이 터지면 제일 먼저 우리 교인인가, 아닌가 그것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심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이 갈보리 교인이라면 그 불행은 나하고도 연결된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따지면 그것입니다. 우리 교인이 아니라면 그 불행은 나와 거리가 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계입니다. 목사이고 신부이고 어머니이고 누구도 할 것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사랑은 이기적인데 패턴을 두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악인의 농장에도 비를 내려주신다.” 이 말이 왜 있습니까? 인간의 한계점을 꼬집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원수들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큰 사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는 한계점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뭐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의적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가페라고 하는 것입니다. “because( 때문에)”와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차이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고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짝사랑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관심도 없는데 내가 계속 좋아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데도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짝사랑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 좋지 한쪽만 좋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짝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 들어봤더니 너무 좋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아무하고도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를 사랑하면 ‘나 혼자 사랑하면 되는 거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대통령을 내가 사랑해야 되겠다.’ 그러면 자기 마음의 폭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취미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인간을 제한해서 사랑하신다면 하나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하나님을 우리를 버리셔야 합니다. 다 죄를 짓고 떠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변함없이 짝사랑해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구약의 호세아는 자기 아내 고멜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사랑하고 그가 진 빚을 갚아주고서 다시 데리고 오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고 신약에 와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최고의 괴로움을 선물해 주었지 않습니까? 재산도 다 없애고 나가서 거지가 되고 동네 사람들의 창피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오매 그 옛날의 과거를 모두 다 잊어버리고 순식간에 옛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랑은 비즈니스 성격이 있습니다. 

비즈니스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남녀의 애정 관계도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편견에서 신경전을 벌립니다. 이게 한계입니다. 인간은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경기 민요 가운데 “노들강변”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량진 근처 한강 나루터 배를 타고 오고 가면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거기 보십시오.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사랑에 정을 두고 왜 그렇게 떠나가느냐 하면서 그 무정하게 떠나가는 사람이 원망스러워 “노들강변에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두둥실 가노라!” 이렇게 노래 불렀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도 나중에는 원망만 남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란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우리 사회는 모범적인 사랑을 한 사람들을 표창해주는 제도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아주 지극한 일을 했을 때 ‘열녀상’을 주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아주 훌륭하게 했을 때 ‘효자상’이라고 주었습니다. 또,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위해서 그렇게 지극한 정성을 들일 때 ‘효부상’이라고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이것을 왜 그렇게 표창을 주느냐 하면 이것이 가장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는데도 변함없는 이타적 사랑의 그림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을 위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실 때 에덴동산에 진흙이 많이 있었을 때 ‘왜 그 다른 진흙을 객관성 있게 여자를 만들어놓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빗대에서 뽑았을까?’ 이게 조금 의문이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담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이 애정 관계에 복잡한 일이 그토록 많이 일어나는데 남자들은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소유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본래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빠져나간 것을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의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는 남자에게, 여자에게 자꾸 다가가는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한 말은 연애하는 사람에게 아주 최고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그런 말을 사용했겠습니까? 내 속에 들어있는 내 신체 일부분이라고 상대방을 향해 말했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더 진한 사랑의 고백은 세상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고백이 어떤 책임 사건이 생기니까 서로 뭐라고 합니까? 이때에 아담이 남자라면 하나님의 책망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 아버지! 하와는 죄가 없습니다. 

내가 죄를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에덴동산에서 나는 쫓아내시고 하와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하나님 곁에서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 아버지! 죽이려면 저 여자를 죽이고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사랑한 것이 한계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조상이 그랬으니 우리가 어떻겠습니까? 다 똑같은 것입니다. 복음성가에 있는 것처럼 어떤 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창피하고 ‘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으로 정말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이 한계점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인간에게 없는 것인가?’ 그런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이 찬양을 자꾸 부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그렇게 안 되나? 왜 안 되나? 나는 이 한계의 이 고비 하나를 정말 넘을 수 있는 없는 인간의 모습인가?’ 이렇게 갈등을 줄 때가 많습니다. 크리스천의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가를 기대하고 사랑하지 마십시오. 실망합니다. 여러분! 효도를 기대하고 자식을 사랑합니까? 실망합니다. 절대 실망합니다. 고아원에 가서 고아들을 도와줍니다. “커서 은혜 갚아! 알았지?” 실망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그냥 하십시오. 남녀의 사랑도 사랑 자체로서 만족을 해야지 그 이상의 대가를 기대하면 실망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갚을 것이 없는 대상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들은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똑같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랑의 차이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400미터 결승전 하는 날입니다. 영국의 데릭 레드몬드의 기록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거기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데릭이 절대적으로 금메달감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쳐다보고 400미터 경기를 보았는데 뛰다가 150미터 지점에서 힘줄이 하나 끊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가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수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모두 구경만 했지 아무도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중석에서 별안간 어떤 한 사람이 튀어나왔습니다. 데릭 레드몬드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레드몬드야! 다쳤구나! 빨리 벤치로 가서 치료하자!” 말했습니다. 하지만 데릭은 “아니요! 아버지! 나 저 결승지점까지 가고 싶어요.”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아버지와 같이 가자.”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결승지점까지 절뚝거리면서 결승지점을 통과했습니다. 관람석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여러분! 누구도 나를 관심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쓰러졌을 때에도 아무도 나를 관심하지 않는데 즉시로 달려오셔서 “다쳤구나! 어떻게 할까?” “하나님! 내 인생의 결승지점까지 가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이제 나와 같이 가자.”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이라서 다윗은 뭐라고 했습니까? 가장 어려운 아둘람 동굴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때에도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심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하는 사랑의 한계점! 하나님과 나 자신의 마음을 비교하여 보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격하여 나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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