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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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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사 6:1-13)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오늘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말씀은 6장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선지자 사역은 여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들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체험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에서 뽕나무를 배양하던 목자였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대표적으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직접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씀이 완성된 성서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런 체험은 흔하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자기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직접적인 체험은 없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고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되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마땅한 권위와 또 두려움을 가지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체험의 때를 밝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시대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왕으로 52년을 통치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중도에 문둥병에 걸려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었지만 매우 강력했던 왕이었습니다. 역대기서에 보면 웃시야가 블레셋 지역과 암몬 지역을 정복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수리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농사의 개혁에 힘썼다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는 또한 중동 정세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북쪽에 강력한 제국 앗수르가 등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앗수르에 침입에 대비하여 북왕국와 아람이 동맹을 맺습니다. 이 두 나라는 유다에게 자신들의 동맹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자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에 원조를 청했고 결국 이를 계기로 북왕국이 망하게 되고 유다 또한 앗수르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위기의 시대에 강력했던 웃시야 왕이 죽은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을 찾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이 시대를 어떻게 해쳐가야 할지 근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주인은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보다도 더 하나님이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권위에 기겁하며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옛날 백성들은 임금님  얼굴도 못보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려야 했었는데 어찌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숨기시고 그의 눈을 가려 정면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지나가실 때 그 뒷모습만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스랍들 곧 천사들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스랍들이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맨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요, 발을 가리는 이유는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전통적으로 교회 예배에서는 삼성창, 곧 상투스라고 하여 오랫동안 불려왔지만 개신교 예배에서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는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계4:8) 하며 찬양합니다. 이렇게 스랍들이 찬양하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며 집에 연기가 가득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이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자 자신의 입술을 가리며 내가 죽게 되었다고 탄식을 합니다. 이사야는 제사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많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하나님을 뵙고 보니 자기가 했던 말들이 부끄러워집니다. 설교자들도 하나님 앞에 서면 먼저 입을 가리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이 부족하게 하나님을 전했는지, 이 입술로 얼마나 많은 거짓을 행했는지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사야와 유사한 체험을 베드로도 했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해변가에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보고 있었는데 이 예수님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후의 베드로의 반응을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벧전5:8)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곳에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이 방만해지고 나태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탐욕스런 삶을 살며 자기 이기적으로 쾌락을 좇고 방탕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악과 폭력으로 가득하며 죄를 짓고도 뻔뻔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거룩하시고 그래서 두려우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느꼈던 위기는 성전에서 이 하나님의 거룩함이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왕래하고 예물은 많이 드리는데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요 자기들 기뻐하는 대로 드리는 그런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1-14) 하나님이 싫다, 싫다, 싫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마음을 만족케 하기 위한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로는 온갖 악을 행하고 자신의 탐욕에 빠져 삽니다. 이사야는 연이어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6-17) 이들이 이처럼 악을 행하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위기는 예배의 거룩함,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한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나 예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바가 큽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히려 탐욕과 거짓과 인간적 술수로 가득합니다. 잘못을 범하고는 돌이키기보다는 묵살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만 연연합니다. 사회의 폭력과 불의를 탓하기 전에 우리 교회가 먼저 거룩함을 상실한 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성부 하나님의 절기입니다. 창조절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고 체험하는 그런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부정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사야에게 스랍들이 제단에 있던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이사야의 입술을 뜨거운 불로 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고 선언합니다. 참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이사야의 죄가 사해 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실제 불에 댄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을까요? 그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면서 자기 말하는 것을 조심하지 않았을까요? 

사도 바울도 이런 흔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흔적’을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생긴 채찍이나 매의 상처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처자국을 보면서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못된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고 예수님이 베푸신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런 정화의식이 끝나자 이사야는 이제 하늘의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예배 시작부에 드리는 참회의 기도나 성만찬 시작부에 드리는 주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기 전에 우리 죄를 씻는 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8절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일을 행할 사역자가 필요한데 누구를 보낼꼬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중에 있던 천사들이 아니라 이사야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이사야의 마음에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부담감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라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만 같고, 내가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면 기도해 보십시오. 계속 부담감이 남거든 그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뛰어드는 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완성은 결단입니다. 마음을 먹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시간이 다 가고 기회도 지나가고 맙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외쳐야 될 말씀이 이상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외쳐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와 눈이 감겨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들의 완악함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그들이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웃시야 이후의 왕들 중에 하나인 아하스 왕이 대표적입니다. 아하스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7:9)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이 이 싸움에서 지켜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유명한 임마누엘의 약속을 줍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거친 음식을 먹기 전에, 곧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사7:16)며 곧 전쟁이 끝날 것임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앗수르 왕에게 찾아가 도움을 구합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입니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왕의 마음이나 귀가 막힌 것입니다. 

왕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2-6) 하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완고함을 하나님이 미리 내다보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진짜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완전히 실망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완고해진 이유는 그들이 완고한 탓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귀와 눈과 마음을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거나 풍자적인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이 고침을 못 받도록 하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야 하니 이사야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이렇게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의 말씀의 하나님의 답입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90%가 사라질 것이요, 그 나머지 10%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심판의 예언대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앗수르에게 다 빼앗기고 과수원의 원두막처럼 예루살렘 주위 일부만 살아남게 됩니다.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하면 가차 없이 심판을 내리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해주시고 축복하신다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물질적 탐욕과 권력과 쾌락과 영광에 눈이 먼 한국교회를 보면서는 오히려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장애물들이 제거되고 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는 13절 말씀은 다 폐허가 된 연후에 하나님께서 그중에 살아남은 몇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까? 아닙니다. 남은 그루터기는 먼 훗날의 일이고 이사야와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잠잠히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세상에는 실패요 하나님께는 성공입니다. 세상에서 실패인 이유는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성공인 이유는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교회의 성공과 실패를, 자기 일의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세상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성공이었습니다. 부활하셨으니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나라에 유명한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자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모욕을 당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신앙인들은 실상 이렇게 고난받고 실패하는 것인 성공이며 행복임을 믿고 나갔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성과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의 성공이 영적으로는 실패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단한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만족은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심판을 외쳐야 하는 힘든 현실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데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그 길에서 흔들림 없이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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