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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날, 은혜의 때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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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날, 은혜의 때 (고후 6:1-2)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핵심적인 단어가 있다면 “은혜”와 “구원”일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중심 골격입니다. 구원과 은혜가 흔들리면 인생이 흔들려 신앙이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은혜와 구원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견고한 교회는 구원과 은혜가 가장 강력하게 역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 의해 세워진 고린도교회도 처음에는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것들이 강조되고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구원과 은혜의 역사가 희미해져 가고, 무엇보다 구원이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고 뼈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믿음이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 받은 자인가, 진정한 신앙인인가, 핵심적인 진리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는가?”라고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라고 고린도교회 안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세기에만 해도 기독교의 교리가 완전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단과 거짓된 가르침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은 이사야서의 인용인데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구원’, 바로 신앙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 두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구원과 은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죄 사함, 영생, 천국 등을 포함하지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총체적이고 광범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우리에게 안겨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편에서 노력하거나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

원을 어떻게 얻는가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우리 편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할 일은 딱 하나, 그냥 기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오랜 수고와 희생을 다하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반응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바울은 “보라, 보라”하고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보라, 지금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은 마치 팡파레를 울리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입니다. 구약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성전제도, 제사제도 등은 상징적이고, 실체보다는 그림자입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예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구원이 일부의 사람이나 민족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것이 되었습니다. 모호한 것이 아니라 확연하게 드러났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무제한적으로 부어졌습니다. 너무도 풍성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에는 가랑비처럼 살짝 뿌려지는 것이었다면 신약시대는 태풍을 동반한 장맛비처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마음 문을 열면 은혜가 스며들어 폭포수 같이 밀려드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강력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거절하거나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분이 오셔서 은혜가 도래했고 구원의 날이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제한이 없습니다. 구원과 은혜를 받는 일이 전혀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진리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때이고,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고 말씀했던 실체가 나타난 것입니다. 메시아가 실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독생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약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약을 바라보니 구약이 훤히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만 들을 때는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처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옛 삶은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 구원의 진리가 명료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도 한 사람이 구원을 얻고자 마음을 열기만 하면 말씀을 들을 기회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닫혀 있어 듣기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주옥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조금의 관심만 가지면 됩니다. 내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나 은혜에 관한 한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과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냉담함, 무관심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닫힌 마음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닫힌 마음, 영적 세계에 대한 무덤덤함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은 다른 편에서는 기회가 곧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은혜의 시혜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때’라는 말 안에는 위급함, 긴박성, 시급함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늘 이런 긴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 사상에 근거합니다.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이라면 기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끝도 없이 주어지는 기회란 없습니다. ‘때’란 한시성이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끝입니다. “때”라는 말 안에는 사랑과 경고가 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좋은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이런 시간들이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역사적, 개인적, 환경적으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지금 행복한 순간이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중요한 것은 지나가고 있는 한 때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한순간입니다. “때”와 “날”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끝”하시면 끝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베풀 때 받아야 합니다. 내가 시간을 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나의 결심이 중요하고 나의 의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구원에 대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기회는 주시고 또 주시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은혜의 때가 끝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리던 날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일은 구원의 순간에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나 흑암이 깊어지고 재앙이 덮칠 바로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는 영원히 그 시간이 지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가 지나면 “황급히, 몰아치듯”,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이”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물의 심판에 대한 예고는 120년 동안이나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신 것은 방주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너무도 인내하셔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동작이 느린 분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결코 느린 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맹렬하게 급하게 모든 것을 종료하십니다. 문이 열려있을 때는 영원히 열려있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닫히는 순간이 옵니다. 한번 닫히면 누구도 그 문을 열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나 은혜는 주실 때 받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의 시간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로 미루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언젠가, 다음에’ 그 내일은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은혜는 다음에”는 없습니다. 어떤 젊은 학생이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용건을 마치고 나가는 학생에게 교수가 전도를 했습니다. “학생, 예수 믿기 바라네.” 그러자 학생은 “교수님, 저는 아직 젊은데 나중에 죽기 전에나 믿고 구원을 얻을까 하는데요?” 하자, 교수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학생이 언제 죽을지 아는가?”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 다가오는 때에 대한 반응입니다. 지혜와 통찰력이 무엇입니까? 때를 아는 것입니다. 성공이 무엇입니까? 때를 맞추는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때”를 알고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삶이란 선택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선택은 “때”에 대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때를 알고 반응해야 합니다. 주님은 늘 때를 의식하셨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때가 차매” 모두 때와 관련해서 움직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무지는 때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철이 안 들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있었던 것과 마르다가 주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일한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은 일입니까? 마리아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때를 놓친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림입니다. 후회하는 지점에 가보면 틀림없이 대부분 “때”와 연관이 있습니다. 때가 지나도 괜찮은 것도 있습니다. 열차가 지나가면 다음 열차가 옵니다. 백화점에 세일이 끝나도 또 세일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태도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기회, 오늘 이 시기, 이 시대, 나에게, 오늘 이 시점과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믿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때는 항상 있지 않습니다. 가장 미련한 일은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붙잡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은혜에 대해 열려진 태도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고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거리와 시간이 신앙생활의 기준이 아닙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어도 다닙니다. 아니면 집을 옮깁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남다른 관심과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어진 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했습니다. 때를 놓치면 헛되이 받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엄청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사건과 은혜의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십시오.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은혜는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푸셔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과거나 제자로 살 때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아도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마디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어떤 인물이든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니면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었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역사들이 그들의 삶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란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을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독특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면 힘이 듭니다. 봉사를 어떻게 내 힘으로 하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순교를 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순교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붙들어 주실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목회도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습니다. 설교도 설교준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고, 전할 때도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위력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모든 것은 내 실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종결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야말로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반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중국, 인도에서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부적을 태우고 신주단지를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하기만 하면 은혜는 제한 없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처럼 흥분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구원 안에 숨겨진 의미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 안에 우리의 진짜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광대하고 풍성해서 우리가 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의 갈증, 궁핍, 절망적 상태를 더 걷어내기에 충분한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모습이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의 상태와 형편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조금만 열고 주어진 이 기회에 반응하기만 하면,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너무도 강력해서 저항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구원의 황홀함 속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볼 때 은혜의 날, 구원의 날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활짝 열려진 하나님의 은혜보다 다른 거짓된 진리, 다른 복음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 바울은 “구원에는 조건이 없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미 이루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 가운데 한 분도 은혜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이 없고, 모두가 구원의 경험을 얻기 바랍니다. 이미 드러난 진리, 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진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있는 이 시대에 구원과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더듬거리거나 헷갈리거나 다른 것을 바라볼 이유도 없다. 너무도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진리가 있는데 무엇을 주저하고 있느냐” 이제 새로운 대로가 열렸습니다. 어쩌면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이 어려운 때입니다. 다른 것을 놓친다 해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은혜의 시대, 마음껏 구원의 복을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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