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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롬 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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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롬 3:23-24)
  

요 1: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큰 소리로 소개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세례요한 앞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방 그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어린 양은 그 털이 눈처럼 깨끗하여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는 속죄제물을 드릴 때 소나 염소보다도 양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을 때 ‘아! 예수님은 누군가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을 속죄제물이시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1. 기독교가 강조하는 것은 ‘나는 죄인이다.’ 라는 자각입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가슴이 터지도록 통절히 느끼지 않으면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자체가 별로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왜 구원자를 찾겠습니까?
‘나는 병이 안 걸렸다. 나는 건강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의사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병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에 입문하려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이다.’라는 깨달음이 쉽지 않습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다 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만일 길거리에 나가서 한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죄인이야!” 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왜 죄인이야? 내가 사기를 쳤느냐, 강도질을 했느냐, 남을 욕하고 다녔느냐? 나는 법 없이 살 사람이야.” 라고 대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 로마서 1:28절 이하를 읽어갑니다. 
“당신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합니다. 
당신은 수군수군하는 자요, 남을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당신은 교만하고, 자기 자랑에 도가 지나치고, 악을 도모하고, 부모를 거역했습니다. 
당신은 약속도 잘 지키지 않고, 정이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이렇게 조목조목 따진다고 하더라도 기분만 나쁠 뿐이지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혜 중에서 병 고치는 은혜도 귀하고, 방언하는 은혜도 귀하고, 자식이 잘 되는 은혜도 귀하지만, 가장 귀한 은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성령께서 밝은 빛을 심령에 비추시면,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시면, 자기 자신처럼 교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처럼 이기적인 사람도 이 세상에 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처럼 겉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엉뚱한 위선자 이 세상에 둘도 없습니다. 

여러분, 다 체험하셨지요? 
그래서 콧물 눈물이 쏟아지고,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 “세상에 이런 놈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놈부터 쳐 죽여야지 왜 아직까지 살려주셨나요.” 하면서 자기 가슴을 뜯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자기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자기 자신이 미워요.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어요.

어느 여성잡지에서 ‘천하의 공안검사 이건개를 무릎 꿇게 한 신앙체험’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어 읽어보았습니다. 
천하의 공안검사 이건개는 소위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능력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슬롯머신 관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좌절과 체념으로 이어가던 구치소 생활 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성경 구절 하나하나가 나를 위해 기록된 구절인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자인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을 무릎 꿇게 하겠습니까? 
이런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도 임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나눕니다. 
원죄란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죄를 말합니다. 
원죄란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악을 향해 기울어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선보다는 악을 향해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좋은 것은 하라고 해도 잘 못하고 나쁜 것은 하지 말라고 해도 잘 합니다. 
친구끼리 서로 도우면서 잘 지내라고 가르치고 가르쳐도 잘 못해요.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친구와 싸우면서 지내라고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 친구끼리 싸우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 해요.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맞붙어 싸웁니다. 
이게 사람이에요. 
이것은 원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는 내가 스스로 범죄한 죄로서 성경에서는 외면적인 죄와 내면적인 죄로 구분합니다. 외면적인 죄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도적질은 겉으로 드러나지요? 
강간은 겉으로 들어나지요? 
살인은 겉으로 들어나지요? 

그러나 주님은 내면적인 죄도 무서운 죄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범죄를 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여기 보십시오.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분노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죄를 졌습니까?’ 라고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에 아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깨끗하고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 몹쓸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죄인중의 괴수로 여겨집니다.
어두컴컴하면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몰라요. 
그냥 깨끗한 얼굴로 보입니다. 
그러나 밝은 햇빛에 나아가면 여지없이 들어납니다. 
햇빛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밝으면 밝을수록, 자다가 흘린 침 자국, 헝클어진 머리카락, 입가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 할 것 없이 여지없이 들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성경 말씀에 부딪히면 때로는 말씀은 양날 가진 칼이 되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때로는 말씀이 불어 되어 섶을 사르듯이 영혼의 더러운 것을 태웁니다. 
때로는 말씀이 방망이 되어 반석처럼 굳어진 교만, 독선, 불신을 깨뜨립니다. 
감추었던 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 페이지마다에는 눈물자국이 나고, 설교를 들으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가리느라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2. 두 번째로 분명한 기독교의 진리는 죄의 삯은 사망(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한 인간에게 있어서 죄로 인한 죽음은 세 가지로(삼중 적으로) 나타납니다. 

①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이 나타납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호흡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어 내 영혼과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②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이 나타납니다.
영적 죽음이란 의로우신 하나님과 불의한 내가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숨은 쉬고 있어 살았다고는 하나 사는 것을 보면 지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 죽음을 죽으면 방탕해집니다. 
불안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사는 재미를 잃어버립니다. 
근심 걱정에 짓눌려 삽니다.
사는 목적이 없어요. 
원망을 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기는 사는데 지옥생활을 합니다. 
이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③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이 나타납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지옥에 있는 내가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옥 얘기를 하면, ‘누가 가보기를 했나? 괜히 협박하고 있어!’라고 심드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곳은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가서는 안 됩니다. 
지옥은 (계시록 20:15) ‘불 못’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곳, 괴로운 곳, 그 무엇으로도 더 이상 고통스러움을 표현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유황불 못이었습니다. 
지옥은 그렇게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 가야합니까? 
지옥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 (덷후 1:9)’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병으로 오는 고통이 너무 심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죽으면 그 고통도 끝나니까요. 
그런데 지옥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끝이 없어요. 
그런 곳에 가야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할꼬?’라고 낙망하여 외쳐야 합니다. 
이사야처럼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부르짖고 외쳐야 합니다.
성령께서 죄의 삯은 죽음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여러분들께 역사하시길 바랍니다.

자기 죽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살릴 자를 찾습니다. 
용한 의사가 있다면 강원도 산골짜기라도 찾아 나섭니다. 
효험 있는 약초가 있다면 온 들판, 온 산을 뒤집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는 기도원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든 싸 짊어지고 갑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딘들 못가겠어요?
누군들 못 만나겠어요?
무엇인들 못 먹겠어요?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는 갈망이 있어야 심령의 부흥이 옵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교회의 부흥이 옵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사회의 부흥이 옵니다.

3.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본문 롬 3:24-25를 읽겠습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보십시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감격하고 또 감격하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1991년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남녀 대학생들이 인솔교수를 모시고, 폭포가 있는 깊은 계곡에 놀러갔습니다. 
재밌게 놀다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못 디뎌 채성옥이란 여학생이 폭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가 치솟고 떨어졌다가 치솟으니까 이 여학생이 물 위에 올라왔다 빨려 들어가고 올라왔다가 빨려 들어갑니다. 
그때 남자 대학생 4명이-이모 군, 김모 군, 최모 군, 윤모 군이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남학생은 물살을 헤쳐 이 여자 한 사람 밀어내놓고 다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네 명의 장성한 남자친구를 죽이고 살아난 이 채성옥이란 여학생은 정신이 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라고 생각했을까요? 
‘나는 재수가 좋아 살아났고, 그 아이들은 죽은 거 보니 되게 재수가 나빴는가 봐?’ 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그 네 친구를 죽였나? 내가 뭐기에 그 친구들은 내 대신 죽었는가? 내 한 목숨과 친구들의 네 목숨과 어떻게 바꿀 수가 있는가? 내가 뭐기에 그 친구들은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했지 않았겠어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기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뭐기에 주님은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렀나? 내가 뭐기에 주님을 죽이고 대신 살아야 하나? 내가 뭐기에 주님은 날 위해 죽으셨나? 내가 뭐기에? 내가 뭐기에 값없이 구원을 받아야 하나? 왜 주님은 날 사랑하나?’

이제 복음성가 ‘왜 날 사랑하나’를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1.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3.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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