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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 50:4-9, 막 8:27-38,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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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 50:4-9, 막 8:27-38, 약 3:1-12)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해야 할 신앙고백>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이제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바로 아는 것,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요. 우리는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가장 오리지널하고 가장 인간적인 예수님의 면모를 만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말씀은 “도대체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 하는 도전을 주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서시다가 도중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지실 때, 어디에서 이 질문을 던지셨는가가 중요하지요. 이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도, 회당 안에서도 아닌,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가시는 도중에 나왔습니다. 이 빌립보 가이사랴는 성지 순례를 가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옛날 희랍과 로마의 여러 잡신들을 섬기는 신당이 유독 많은 곳이어서 아직도 그 유적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거룩한 신전 안이 아닌, 온갖 우상을 섬기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던지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경쟁자 우상들이 우글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이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서 여러 동료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잘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도록 온갖 유혹과 우상이 득실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는 바른 고백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진정성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동료 신앙인들에 둘러 싸여서 하는 신앙고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한가운데,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숭배하도록 유혹하고 강요하는 험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는 신앙고백이 진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Who is Jesus?” 이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른말을 하다가 헤롯 임금의 손에 죽은 사람인데, 예수님이 바로 그 세례 요한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소문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보다 한 천 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 구약 시대에 가장 많은 이사와 기적을 일으켰던 엘리야가 예수님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열심히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풍문들을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지요.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가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예수관이 있다는 말이지요. 휴매니스트, 인간 해방자, 종교 천재,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는 마술사, 등등, 수많은 예수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 사람들의 견해는 대부분 틀린 견해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일부분만 생각해서 자기 편견대로 예수님을 본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답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잘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상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제자들이 대답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가 바로 그랬습니다. 정답이 아니라 오답이었지요. 그래서 실망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묻습니다. 29절을 보세요.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나와 동고동락해온 내 제자들,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바로 이 때 언제나 성미 급하고 다혈질적인 베드로가 나섭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빙고! 정답이지요. 예수님은 온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속할 메시아,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초점을 베드로 개인에게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 베드로야 말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베드로를 주목해 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로 정확한 대답을 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메시아, 어떤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메시아상은?>

베드로가 정답을 말한 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 직분을 말씀하십니다. 31절을 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아상(像) 혹은 그리스도상(像)은 전통적인 메시아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영광과 권능이 아닌, 고난과 수치의 메시아상입니다. 

첫째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아야만 합니다. 셋째로,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다. 넷째로,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당신의 메시아상에 대해서 스스로 밝히신 내용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영광과 위엄의 전통적인 메시아상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인들이 꿈꿨던 메시아는 영광과 권능의 왕으로서의 메시아상이었습니다. 

압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내 자유와 평화로 인도하게 될 정치적 해방자, 지상 최고의 왕으로서의 메시아였던 것이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정답이었는데 그 메시아의 직분, 다시 말해 메시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영광과 권능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과 수치의 메시아라니, 베드로는 도저히 이런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거칠게 항의합니다. 32절을 봅시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베드로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상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아상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따진 것이지요. 예수님의 옷소매를 바싹 잡아당기고서는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권능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과 수치의 메시아라니요! 절대로 그런 메시아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최고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과 수치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야 할 메시아라니. 죽었다가 다시 사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그냥 영원히 죽지 않을 불멸의 메시아라면 또 몰라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아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거칠게 항의했던 것이지요.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버럭 화를 내십니다. 3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가 아닙니까?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니요? 이것은 베드로의 인격이 사탄이 아니라,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셨던 것이지요. 

그 다음에 여기서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Get behind me!” 이 말은 예수님을 첫 번째로 두고 자기 자신은 두 번째로 두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사탄의 말을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생각을 첫 번째로 둔 까닭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을 첫 번째로 두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가 사탄의 생각을 품은 이유는 33절의 말씀 그대로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와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견해를 거쳐 예수님 자신의 견해까지 오는 언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결론은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야만 하는 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결단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34절로 35절을 보세요.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이 걸어가야 할 메시아의 길이 고난과 수치와 죽음의 길이라면 우리 역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먹고 싶은 음식 먹지 않고 입고 싶은 옷 입지 않는 그런 포기보다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데 방해가 되는 가치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긴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그런 자기부인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도 어떤 인간적인 무거운 짐을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고문과 사형도구이지요. 십자가 형벌이 잔혹한 것은 단순히 그 위에 사람을 못 박아 죽인다는 의미보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시장 한가운데를 지나며 받는 수치와 모욕입니다. 십자가를 지며 끌고 가는 죄수를 향하여 사람들이 던지는 야유와 저주와 욕설이 더 괴로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십자가를 끌고 갈 때 사람들이 온갖 저주와 비방을 묵묵히 받아내야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이와 같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난과 수치를 참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을 준비를 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고 죽을 준비를 하라는 의미이지요.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아상, 그리스도상과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메시아상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스도는 영광과 권능의 그리스도이지 고난과 수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리스도가 온갖 고난과 수치를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마치 나무가 걷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안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오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소매를 바싹 잡아당긴 채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항의했던 것이지요.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님은 강력한 사탄의 유혹을 느끼셨습니다.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를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성서적인 예수상을 향한 태도수정>

오늘 우리의 그리스도상도 베드로와 너무 비슷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이 호박 넝굴채 굴러들어오고, 실패한 사람이 무조건 성공하고, 돈 벌고 출세하고, 병 고침 받고, 지나치게 기복적인 메시아상, “prosperity gospel,” 번영의 복음이 이 세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예컨대 엄청나게 화려하고 물량적이고 매스컴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 대형집회를 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고, 자녀가 명문대 들어가고, 사업이 성공하고, 병자가 건강해지고, 과장이 부장되고, 다 잘되고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고 교회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도대체 어떤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로 고백해서 정답을 알아맞힌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되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상은 예수님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인본주의적인 그리스도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 생각대로, 우리 마음대로 해석한 그런 그리스도는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일은 “attitude adjustment,”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수정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상, 그리스도상은 돈이나 명예나 지위, 성공과 같은 사람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고 희생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희망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죽을 각오를 하고 수많은 흑인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전설적인 영웅이 있습니다. 해리엣 터브만(Hariet Tubman)이라는 이 흑인여성은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였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19차례 이상 동료 흑인들을 자유로운 안전지대로 이송했던 흑인 모세요 흑인 쉰들러로 불릴 정도로 용기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도대체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그 불굴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해리엣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했지요. ‘예수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저를 인도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항상 그렇게 해주셨지요.”(It wasn’t me, it was the Lord. I always told him, ‘I trust you. I don’t know where to go or what to do, but I expect you to lead me.’ And he always did.) 해리엣 터브만이야말로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참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복음이 많이 오염되고 변질됐습니다. 예수님이 그 옛날 제자들에게 던지셨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일 지나치게 물량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메시아상을 가졌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메시아상, 제자상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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