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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7)

첨부 1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7)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1)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2)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3)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4)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5)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6)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7)
<사무엘상 3장 1~7절>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예수님은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 / 슬플 때 … 가난할 때 / 부요할 때 …
늘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 (계 3:20)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도 열어야 하고, 귀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저를 좋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이 보기 싫어지고, 목소리가 듣기 싫어지고, 
그러다보면 설교 듣기 싫어지고, 결국 예배에 안나오게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가 있는 교회에 오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저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엘리와 사무엘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 정치 ․ 군사적 지도자는 ‘사사’였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실로의 대제사장이자 (삼상 1:9) 
사사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엘리’와(삼상 4:18)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움으로
마지막 사사가 된 ‘사무엘’이 그 주인공입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제사장 엘리와 함께 살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던 중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던 사무엘은
엘리를 찾아갔으나 
엘리는 사무엘을 부른 적이 없다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잠자리에 다시 누운 사무엘은 
또 한 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이번에도 엘리를 찾아갔으나 엘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으나 (삼상 3:4)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 …”(삼상 3:7) 였던 까닭에
자신을 부른 분이 하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 듣지 못하는 엘리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엘리를 찾아갔던 것은
이해할 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궁금증을 갖게 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를 두고 왜 어린 사무엘을 찾으셨을까?’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 p. 1143 참조.>

그러나 <사무엘상>을 보면
엘리는 제사장임에도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녀를 구하며 기도할 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끊으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삼상 1:12~14)
함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제물을 탐내어 가로채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삼상 2:12~17)
심지어는 두 아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것도 알았습니다.(삼상 2:22)

그러나 엘리는 아들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아들들의 죄가 크다고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2:23~25)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의 일꾼인 사람 …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죄를 미워했지만
회개하고 죄를 바로잡으려 하거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행동은 할 줄 몰랐던 사람이 엘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엘리의 시대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려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도 있고 … 하나님께 제사도 드렸지만 …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 뜻에 합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곳곳에 스케이트장이 많았습니다. 
겨울에 논바닥이 얼면 그냥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곳이 없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를 했을 당시에는
어린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전도하기 위해 
겨울이면 동네 스케이트장에 많이 갔었습니다.

어느 날 지금의 원미구청 쪽에 있던 스케이트장에 학생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만나서 전도한 사람이 이덕수목사 동생 이명수집사님입니다.
그때부터 이명수집사가 우리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에는 학생들 집을 심방했습니다. 
그때 이덕수목사님 어머니 지종순권사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셨는데 
아들이 다니는 교회 선생님이 왔다고 하니 심방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연합속회를 드리는 날 
지권사님이 교회에 처음 나오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젊었을 때 스케이트를 타며 
어린이들을 전도하려고 스케이트를 배우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신학교 동기가 그 소식을 듣고
자기가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쳐주며 같이 전도할 테니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데리고만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대로 교회 주변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정해진 날에 스케이트장으로 갔습니다.
목사님의 친구는 얇은 신발만 신은 채 얼음판에 서서
“스케이트 날은 수직으로 세워라.”
“넘어지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라.”하며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은 금방 스케이트를 배웠습니다.

아이들을 다 돌려보낸 후에 목사님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던 친구와 둘이서 스케이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치던 친구가 
스케이트를 신더니 얼음 위에서 계속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영문을 물었더니 
자기도 오늘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탄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케이트를 배워보려고 유명한 강사한테
1주일 동안 비싼 돈을 주고 이론을 배웠는데
지금까지 그 강사를 흉내 내면서 이론만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 친구가 가진 이론은 완벽했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홍정길, 『301가지 감동스토리』 (서울: 프리셉트. 2003). p.75 참조.>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말씀 들으며 성경공부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사는 데에는 무기력한
이론적인 신앙은 아닌지,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의 담임자였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도왔던 인권 운동가
윌리엄 코핀(William Sloane Coffin, 1924-2006) 목사님은
「나는 믿나이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틀렸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이란
자신을 살피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에 투신하지 않는 인생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도 역시 틀렸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다.
<윌리엄 코핀, 『나는 믿나이다』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p. 27. 참조)>

우리의 삶과 신앙이 가치 있는 것은
‘신앙이 머리에 남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 감사하고 … 사랑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행동하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머리만 커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
아는 것을 토대로 목소리만 커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

- 순종하는 사무엘

제사장인 엘리조차 영적으로 어두웠을만큼
“하나님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였지만 …
(그리고 사람들이 환상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_ 쉬운성경)
하나님께서는 일꾼으로 사용하실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그 음성을 들었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삼상 3:4, 5, 8)

최근 미국에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라는 분이 
번역한 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 성경은 현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 준비하면서 이 성경책을 많이 참조합니다.
우리가 쓰는 성경책이 새롭게 번역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너무 어려운 말로 번역되어 있고, 
일상적인 단어가 아닌 것도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려면 자다가 일어난 어린 사무엘이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겠습니까.
“저 여기있는데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엘리가 부르는 소리로만 알았던 사무엘은
잠을 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에게로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그냥 가지 않았고
‘달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다 말고 빨리 달려갔던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 한 밤중일 때조차도
자신이 섬겨야 할 제사장에게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사무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무엘의 성실함은 자신을 찾은 음성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상 3:10)

사무엘은 사람에게도 … 하나님에게도 …
순종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며 쓰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환상 중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신다면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뭘 해야 하죠?”라고 대답할 수 있으십니까? 
순종의 사람인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건축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앞두고 사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멋진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퇴직하고 나면 자기와 상관없게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집을 지으며 공사를 대충대충 했습니다.
재료도 좋은 것을 쓰지 않았고 감독과 시공도 철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겨우 준공검사를 넘길 정도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되자 사장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나의 선물입니다.”
그는 자기 상을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받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에 
“모든 일에 …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고 했습니다.

제사장 엘리 앞에서 …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했던 사무엘은
언제든지 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실함과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듣겠다는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순종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 때로 순종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순종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머리입니다.
‘그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 왜 그래야 하는지 … 알 수 없어도
믿고 따르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사무엘의 말 속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 이유를 몰라도 …
듣고 행하겠다는 사무엘의 결단이 
하나님께서 그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 (왕상 3:6) 

성경에는 위대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더라도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겨루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회사를 이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4: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남들과 경쟁하지 않더라도 
경쟁할 때 보다 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경쟁력’보다 
‘순종력(順從力)’에 의해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벌써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말이 되면 심방전도사님들이 한 주간동안 심방을 하고 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집에 갔었는지, 
읽고 불렀던 성경, 찬송 … 등등 기록을 하여 제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심방보고서를 보다가 
한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기도 해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집사님, 심방 갔다 오신 전도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이런 저런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하고 염려되어
전화했습니다.”라고 했더니 …
집사님이 
“목사님, 전도사님 심방 안오셨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 그럼 제가 잘못 전화했나보네요. 미안해요.”
라고 하며 얼른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고서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착한 제가 그때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은 그날 이후로 우리교회를 떠났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하여, 보고서를 채우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새롭게 변화하려는 준비를 하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 교구를 늘렸습니다.
- 속회를 개편했습니다.
- 선교회를 새롭게 조직해 가고 있습니다.
- 교육부서에도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 교회 내 각 부서와 팀, 선교회마다 
새로운 리더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헌신하는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 교회 일에 나서지 않으시던 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실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연말이 되어서 속회 … 선교회 … 교육부 … 찬양대 …
여러 부서에 필요한 헌신자를 세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권면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 보겠습니다. 제게 일 맡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핑계를 댑니다.
정말 그 일을 놓고 진심으로 기도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하지 말아라’고 하십니까?
이미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기도하고 / 고민하고 / 회의하여
믿고 신뢰할 만 한 분이라고 판단되어 부탁하고 권하면
‘아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정보 사회’, ‘지식 사회’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직접 일일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내 것으로 갖습니까?

학교에서는 해당 분야에 교사 자격을 갖춘 선생님을 통해
필요한 지식을 … 필요한 수준에 맞추어 제공받습니다.
대학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에게 지식을 전달받습니다.
매일 같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소식들은 어떻습니까?
그 모든 뉴스거리를 개인이 다 취합하기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정치면 정치 / 경제면 경제 …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노력하여 …
간추린 소식을 뉴스만 시청하면 다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를 통해 들으면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에 전문가입니까?
여러분의 생활을 잘 이해하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하나님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시기도 하겠지만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중에,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제 작은 아들이 미국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기에 
“아들아, 너는 영어가 자유롭고, 한국말도 스페인어도 잘하고 … 
내가 보기에 네가 성품도 좋은 것 같은데 신학을 공부해서 
선교사를 해보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안부르시는데 …”라고 하면서 
형 하나면 됐지 자기까지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듣다보니 우리 교인들이 하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준비하여 목사가 부르면 
하나님 뜻이 담겨져 있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갈림길에 서서야 듣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 쉬지 않고 기도하고 (살전 5:17)
-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시 1:3)
-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잠자는 중에라도 …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하며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무엘의 자세였습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정에서 … 일터에서 …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그렇게 외치며 일어나는 사람, 달려가는 사람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한 변화와 도전에 여러분을 부르실 때, 
가정의 평안을 위하여 평안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교회에, 부서에 내가 낮아지고, 녹아져 소금이 되고
타서 빛이 되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순종하는 
사무엘과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모두 귀하게 쓰임 받는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계서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모여 예배드리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 생활 속에 실천하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머리만 커진 성도, 목소리만 큰 성도가 아니라
생활 속에 빛 되고 소금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며 얻은 소득을 하나님께 구별합니다.
하나님, 성도들의 정성된 예물을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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