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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막 13: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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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막 13:32-37)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다. (히9:28上)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이는 예수님의 초림 때를 말한다.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 (히9:28下)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재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초림의 예수님은 오셨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림의 예수님은 오셔야만 한다. 
감람산 강화(마24장, 막13장, 눅21장)에서,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해, 생생하게 말씀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들을 먼저 말씀했다. 그러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에 대해 말씀했다. 

1. 재림의 때(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히 정확한 시간은 비밀이다. 
(막13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기 전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해 말씀했다. 따라서 우리는 재림의 징조들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때는 알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을 날과, 죽을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과 오실 때를, 사람들에게 계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과 그 때는, 구약의 선지자들도 모르고, 신약의 사도들도 모르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모른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했다. 천사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아들도 모른다.’했다.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면서,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하셨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그 날과 그 때를 안다는 말씀이다.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기에, 전지전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사실을 일관되게 증언한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다. 그때 예수님은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하셨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스스로 제한했다. 마찬가지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자신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셨다.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에 따라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셨다.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 때에 대하여 물었다. 

예수님은 (행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했다. 예수님은 “내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단지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계시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때와 시기를 자기 권한에 두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미리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았나? 예수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여기에 2개의 명령이 나온다. ‘주의하라’와 ‘깨어 있으라.’이다. 

모두 다 현재 명령형이다. 그러니까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도록, 그 때가 언제인지, 알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속히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어느 세대에 살든지, 그 세대가 역사의 마지막 세대이며, 세상의 끝을 살아가는, 세대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늘 주의하며, 늘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① ‘주의하라.’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4번하셨다. (5) ‘주의하라.’ (9) ‘조심하라’ (23) ‘삼가라’ (33) ‘주의하라’고 하셨다. 번역만 다를 뿐, 실상은 똑같은 단어(βλέπω)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특별히 우리는,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런데도 마치, 그 날과 그 때를 아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지만, 자기들은 그 날과 그 때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뻔뻔하고도 불경스러운 말인가? 이러한 거짓된 말에, 미혹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 곧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하는 속임에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는 엉터리들이 많이 있다. 

② ‘깨어 있으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4번이나 ‘깨어 있으라.’고 했다. (33, 34, 35, 37절)에, 한 번씩 나온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종들의 비유를 말씀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노아의 때를 예로 들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깨어 있지 못하다가 홍수로 다 심판받고 말았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물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들고 시집가는 것이 죄는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이다. 이 말씀의 요지는, 노아의 때의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에 여념이 없어서, 임박한 심판에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 

그러면서 (벧후2:5) 말씀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계속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단 한 번도 홍수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아주 우습게 여겼다. 그러다가 결국,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제외하고서,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다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로 바쁠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은, 홀연히 다시 오신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드신 후 (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홀연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늘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자기 권한에 두셨다. 따라서 그 날과 그 때를, 인위적으로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태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바다. 우리는 늘 주의하고, 늘 깨어있어야 한다. 

미혹 받지 않도록, 늘 주의하자. 아울러 영적으로 늘 깨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자. 언제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우리 모두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기 바란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시는 상을 듬뿍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종들의 비유(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종들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임박한 재림에 대한 태도를 가르쳤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면, 한 마디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종들의 비유는 이와 같이 시작한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당시에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여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주인은 자기 종들에게 권한도 주고, 아울러 책임도 맡겼다. 그러므로 종들은, 각자가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대로 열심히 일하여, 그에 상응하는 달란트를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문지기의 사무는, 문을 열어주는 일이다. 
따라서 주인이 명한 바와 같이, 문지기는 서로 교대를 하더라도,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주인이 언제라도 오면, 즉시 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이는 종들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왜 예수님이, 종들의 비유를 말씀했나?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문지기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집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 주인은 저물 때나, 밤중이나, 닭이 울 때나, 새벽이나, 아무 때라도 올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밤을 4경으로 구분했다. 일경은 저물 때로, 저녁 6시에서 9시 사이, 이경은 밤중으로, 저녁 9시부터 자정까지, 삼경은 닭 울 때로, 자정에서 오전 3시까지, 사경은 새벽으로 오전 4시부터 6시까지다. 

아무튼 문지기는,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타국으로 간 집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문지기는 깨어 있다가, 얼른 주인을 위하여, 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주인이 그에게 맡긴 사무이며, 또한 주인이 그에게 명한 바이다.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문지기는 집 주인이, 언제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지기의 입장에서 보면, 집 주인은 홀연히 오는 셈이다. 문지기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집 주인이 갑작스럽게, 집으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설마 집 주인이, 이 밤에야 오겠어? 오면 낮에 오겠지! 그러면서 문지기가 자면, 어떻게 되겠는가? 홀연히 돌아온 집 주인은, 문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집 주인은, 그 문지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반면에 집 주인이, 홀연히 왔더라도, 문지기가 깨어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지기는 빨리 주인을 위해, 문을 열 것이다. 그러면 집 주인은, 깨어 있는 문지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그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들의 비유에서,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이다. 집 주인이 타국으로 간 것처럼, 예수님은 승천하셨다. 그러나 집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다. 그러면 홀연히 돌아올, 집 주인을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도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홀연히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로 ‘깨어 있다.’라는 동사는 ‘그레고레오’다. 이 단어에서 그레고리(Gregory)라는 이름이 나왔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평생 깨어 있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우리도 늘 깨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이 홀연히 다시 오실 때, 모두 다 준비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아, 예수님께 칭찬받고, 상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우리의 사명(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말 성경은 ‘깨어 있으라.’가 앞에 나오지만, 실제 원문에는 맨 뒤에 나온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와 같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깨어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벧후3:9) 말씀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고 난 후에야, 다시 오겠다고 했다(막13:10).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뚜렷한 명분이 여기에 있다. 우리 자신이 깨어 있어야, 우리 주변에 있는 잠자는 자들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밝히신 것이다. 
초림의 예수님이 오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왔다. 그들은 엎드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앞으로 재림의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오신다. 우리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예물로 드리겠는가? 그때 우리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릴 수는 없다. 
그때 우리는,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우리의 옥합을 깨뜨릴 수도 없다. 또 그때 우리는 바나바처럼 우리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바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때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는 더 이상, 이 땅의 물질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예물로 드릴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예수님에게 드릴, 가장 귀한 예물은 무엇이겠는가? 이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생각하면, 쉽게 답할 수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당부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에게 드릴 가장 귀한 예물은, 바로 전도의 열매다. 우리가 단 한 사람을 열매로 맺었다하더라도,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세상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 예수님은 홀연히, 다시 오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깨어 있고, 아울러 힘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깨우자. 
내가 깨어 있어야, 잠자는 자들을 깨울 수 있다. 같이 자면 주님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 모두에게 열어주어, 우리 모두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란다. 나의 전도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결론이다.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가? 세계 제2차 대전 때, 맥아더장군은 남태평양 필리핀군도 사람들에게 ‘나는 다시 돌아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일본 치하의 식민지에서, 허덕이던 사람들을, 해방하는 선물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존경받는 사람들도,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예언은, 하나도 거짓이 없다. 수많은 비평과 공격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셨다. 
저는 그 약속을 믿는다. 예수님은 영광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오시는 그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준비되어 있는가?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셔도, 부끄럽지 않도록,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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