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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을 받으리라!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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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받으리라!”

롬10:8-13, 사순절 첫째 주일, 2019년 3월10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설교 제목인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을 들으면 식상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불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외치는 구원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에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구원받으려면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걸 복음 전파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협박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받으라는 구호에만 매달리지 구원의 내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깊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비본질적인 것에 치우치는 방식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알고 계신가요? 아니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율법의 마침


이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대답을 찾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로마서에 그의 생각이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그의 출신 배경은 유대교입니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고, 유대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철저한 유대교인이라는 사실은 그가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추종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롬 10:5절에서 레 18:5절을 인용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는 유대교의 핵심 주장을 짚었습니다. 율법 실천으로 인한 의는 단순히 종교 차원이 아니라 오늘 문명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실정법을 비롯하여 교육과 노동과 정치와 사회제도가 기본적으로 율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실천하면 개인이나 사회가 의로워진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여깁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뒤로 율법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사실을 그는 롬 10:4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마침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현실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거나 연봉 높은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학문적인 성과를 내지 않아도 괜찮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 시절에 딱지치기에 열을 올리다가 철이 들면서 딱지치기에 흥미를 잃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부정했다거나 윤리 도덕적인 행위를 폐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제가 죽었다가 깨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모범을 보인 사도입니다. 바울은 성실한 삶의 의미,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삶의 성과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가 새로 찾은 구원의 길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 신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자리합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요즘 인문학 용어로 구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저는 바울을 통해서 구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구원 문제가 단순히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삶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두 번은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고, 나머지 두 번은 구약 욜 2:32절과 사 28:16 인용한 것입니다. 사 28:16절을 인용한 롬 10:11절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한 이유는 유대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10:1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금 글을 쓰는 로마 교회에는 디아스포아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하지만 ‘자기 의’를 이루려다가 ‘하나님의 의’(롬 10:3)를 놓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 본문에 따르면 모세의 율법을 성취해야만 의로워지거나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고 믿고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즉 구약 신앙에서도 율법 실천만이 아니라 믿음 전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바울이 짚은 겁니다. 그의 생각이 집약적으로 정리된 구절은 롬 10:9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주’로 시인하는 것


이 구절은 구원의 조건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는 헬라어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라틴어로는 도미누스라고 합니다. 초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주라 불렀고, 초기 기독교 당시 로마 사람들은 황제에게 이 호칭을 붙였습니다. 실제 정치의 차원에서는 로마 황제야말로 이런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황제는 신민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주’ 시인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만약 삶을 눈에 보이는 업적에서만 확인하려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서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삶의 업적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나타난 여러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긴 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거나 호수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장애인을 고치는 일말입니다. 그런 것은 ‘주’라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가 못됩니다. 그런 일들은 다른 능력 행하는 자들에게서도 자주 일어난 것들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이런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이 안 되는 주장이기


‘입으로’ 시인하라는 표현이 인상 깊습니다. 단순히 마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말을 통해서 표현해내라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를 입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진리를 경험하는 데에 중요합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에서는 모든 신앙의 내용을 말로 표현하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것도 혼자 독백처럼 하는 게 아니라 영혼의 교감 가운데서 밖으로 표출합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이 입으로 표출한 내용이 영혼 가득히 채워진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주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주기도를 입으로 시인하면서 이 기도를 드립니다. 건성으로 드리는 게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드린다면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생명의 능력과 깊이와 신비를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뿐입니다. 한 달에 수입이 어느 정도면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걸 안다면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갈등의 대부분은 일용할 양식 ‘플러스알파’에 마음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돈이 넉넉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일을 못할 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할 일도 못합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교육 조건을 마련해주려면 일용할 양식 플러스알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명품 가방과 옷에도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삽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도 있긴 합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치료를 제때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는 국가가 해결해야 합니다. 완전한 의료보험이 그 대답이겠지요. 장애인 문제도 국가가 책임지는 게 대답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전체적으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100% 완전한 의료보험이나 장애인 문제를 해결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방향을 그렇게 잡고 나가야합니다. 개인의 영성이 깊어진다면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일용할 양식이 가리키는 그 생명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그 사실이 언젠가는 우리의 삶을 복음의 능력으로 채울 것입니다. 이미 그런 능력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


바울이 말한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주장도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예수 부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거도 없습니다. 그걸 믿으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부활이 믿어지시나요? 아닌데도 억지로 믿으시는지, 아니면 믿는 시늉만 하는 건지요.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부활 자체를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전 15장을 제외하고는 부활을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약성경 기자들도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교회 실천이 예수의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 실천을 통한 구원과 예수 믿음을 통한 구원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구원 문제를 해명하는 중입니다. 구원의 길이 모세의 율법이냐, 예수의 부활이냐 하는 겁니다. 바울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율법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롬 4:15절 말씀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은 여러 가지 착한 행실과 그런 노력을 가리킵니다.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율법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게 마땅합니다. 문제는 율법을 완수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완전한 모범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 사태가 바로 율법이 진노를 이루게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사가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서 교장으로 승진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으로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사가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대학교에 많이 보냈다고 합시다. 신문에 기사화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것으로 그 교사의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정권이 남북문제를 잘 해결해서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좋아지고 언젠가 먼 훗날 이루어질 통일의 초석을 놓았다고 합시오. 제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것으로 통일부장관이나 대통령의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나름으로 흡족할 수는 있겠으나 삶의 완성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을 실행했던 유대인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최선이기는 합니다. 그런 이들의 노력으로 역사가 발전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모범적으로, 좀더 성과를 내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만 살아도 됩니다.


바울은 구원을, 즉 생명의 완성을 전혀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을 때 삶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이 표현에는 가장 궁극적인 인간 실존이 담겨 있습니다. ‘죽은 자’가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는 ‘죽은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다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율법의 실천, 학문적인 업적, 정치적인 치적이 다 죽은 자가 됩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로마 시대를 봐도 좋고, 중국의 징기스칸 시대를 봐도 좋습니다. 영웅호걸도 많았고,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도 많았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21세기 오늘날의 잘나가는 사람들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도 죽은 자입니다. 이 숙명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듯이 헛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사건을 주목했습니다. 우리가 희망해도 좋을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모두 죽은 자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 궁극적인 실존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믿는 사람의 삶에서 구원이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더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행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돈도 많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있고, 지금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에너지가 넘치고, 미래도 창창하니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율법적인 만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사실만은 외면할 겁니다. 저는 바울의 진단이 옳다고 봅니다. 율법 실천으로는 모범생이라는 말은 들을 수는 있겠으나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모범생 콤플렉스에, 즉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에게 드려내는 일에 시달릴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믿음과 그 희망으로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 미래의 생명이 담보되었다는 행복한 마음에서만 우리는 실제로 율법을 율법답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남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만족해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율법의 능력자가 되는 겁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로 젊은 시절을 살다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로는 복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을 저는 진심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남은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의 외침을, 아니 그의 절규를 다시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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