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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홍렬 <3> 전역 후 암에 걸린 어머니 업고 안수기도 받으러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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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여름, 날씨가 점차 더워지면서 어머니는 반년 뒤에 찾아올 운명을 예감하셨다. 한번은 혼자 한의원에 다녀오셨다. 한의사가 맥을 짚고도 약을 안 지어줬다면서 큰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얘, 내가 나을 병이 아닌가 보다. 자궁암인가 봐.”

다음 날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를 찾으셨다. “아들딸 시집 장가가는 것 보고 오래 살고 싶지만 운명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러고는 그간 빚진 돈은 얼마며 누구에게 빚을 졌는지, 받을 돈도 있으니 빚을 물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등의 얘기를 꺼내셨다.

어머니의 말은 마치 유언처럼 들렸다. 나는 마음이 미어져서 눈물을 쏟으며 오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엄하게 꾸짖으셨다. “어려서 고아가 된 사람도 많단다. 홍렬아, 남자답게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 동안 나는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했다. 언제 갑자기 쓰러지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순간들은 고스란히 녹음됐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녹음테이프를 꺼내 듣곤 한다.

전역 후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세 들어 살던 우리에게 안수기도를 권했다. 매달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용산남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당시 안수기도로 유명한 현신애 권사님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다.

현 권사님은 지금의 용산역 근처 철길 옆에 큰 천막집을 만들어서 안수기도를 하고 사람들과 예배를 드렸다. 그 안은 배에 물이 차서 숨쉬기 어려운 환자, 머리에 큰 혹이 난 환자, 목에 관을 꽂은 환자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지금은 사라진 용산 철길 건널목 앞 달동네에서 용산역 부근까지 어머니를 업고 안수기도를 받으러 다녔다. 어머니를 업고 다닐 때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매일 이렇게 업고 다녀도 좋습니다.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좋은 옷, 좋은 음식 해드리며 호강시킬 수 있게 해주세요.’

교회에 다니기 직전 어머니를 모시고 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절을 하면 어머니가 낫는다고 해서 절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께 기독교에 대해 설명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는데 아는 게 없어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셔서 책을 읽을 때마다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매일 밤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큰 녹음기에 성경을 녹음해서 어머니께 틀어드리고 일을 하러 다녔다. 같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고 지우고 또 녹음하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어머니께 성경을 읽어드리며 나도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내가 전역한 지 4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부모가 돼서 아이들이 크는 걸 보면 하릴없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40년이 되어가도 여전하다. 어머니가 직접 부르신 ‘충청도 아줌마’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오늘도 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눈물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가 보자.’

정리=구자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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