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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죄한여인을용서하시는J (요 0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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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또 한번 경이롭고 신비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 는 본문을 접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이정도로 잔인할 수 있을까 하 는 인간의 잔인한 모습도 오늘 본문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대 한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아시는 이야기이고,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문학 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누가 이여인을누가 이 사람을 돌로 치 겠느냐"하는 제목의 글들을 가끔가끔 쓰고 있기 때문에,이 사건에 대한 내 용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범죄한 한 여인을 눈앞에 두고 범죄한 여인 앞에서 주님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 있나 하는 것을 우리들이 좀더 가까이 가서 보면서,이것을 통해 보 여 주시고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다시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평하신 예수님

본문 가운데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평하십 니다. 편복됨이 없으십니다. 이거시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바리새인 과 서기관들이 범죄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이 여인이 범죄했습 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이야기 할 때,예수님은"아니다.뭐 그만한 일을 가지고 그러느냐" 하고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너 희들 말대로 이 여인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죄를 그 여인의 입장에서만 제한하지 아니하시고"이 여인 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죄가 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나 너희들이나 다 인 간은 죄인이다"하는 아주 공평한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죄인이길 원합니다. 다른사람이 죄인인 것을 즐거워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마치 죄인이 아닌 것으로 착각해서 다행스럽게 생각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이 세상 을 살면서 참으로 철저하게 공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가 죄인 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이 말은 자존심이 상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늘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예 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그 러면 죄인들은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녀들이 대표적인 그 당시의 죄인들입 니다. 그 대표적인 창녀와 세리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희들도 똑같은 죄 인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가 보면 자칭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 롭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쉽게 죄인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나중에 왜 회개하게 됩니까 욥이 스스로 의로운 체하므로 그는 까닭 없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결국은 회개와 제사 를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입장에서 공평하 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동시에 '인간은 누구도 누구를 정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 다. "죄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쳐라" 죄없는 자만이 정죄할 자격이 있습 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여러번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 판하지 말라. 형제의 눈의 티를 말하지 말고 네 눈속의 들보를 제하라."우 리는 내눈에 들보가 들어있는데도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나무라는 입장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어떠 한 입장에 있는 사람일지라도,오늘 여기에 나와있는 말씀대로 그의 신분이 노출되어서 창녀일지라도 강도일지라도,우리가 그를 향해서 정죄할 수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범죄의 현장에서 붙들렸습니다. 마땅히 정죄받아야 할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죄 없는 자가 정죄하라"는 말 씀을 하십니다.

 자비와 긍휼의 예수님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 속에서 보다 깊이있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데 최우선 순위가 무엇이냐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 야단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너 왜 잘못했느냐"하고 꾸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가져야 할 최고의 우선적 태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 이 사랑이며 온유함이며 자비와 긍휼이고 동정과 위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진 다음에 야단을 치든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이것을 잘하지 못해요. 아이가 잘못하면 야단치는 것부 터 먼저 하지 왜 이렇게 됐는가 하는,상황을 생각하거나 정상을 참작하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여기의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범죄한 여자에 대한 배려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잡아서 벌을 주어야 할 입장이라면 자기들끼리 벌을 주면 그만이 지 그들은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우 리가 상상하기에 어떻게 끌려 왔겠습니까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을 것이 고,옷은 제대로 입혀졌겠습니까 안오려고 발버둥치다 보니까 옷도 찡겼을 것이고 또 어쩌면 상처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수치감과 모멸 속에서 끌려왔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질질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정하게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 때로 믿는 사람들이 더 비정하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보았을 때,남의 잘못 을 보았을 때 믿는 사람들이 더 비정하다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은 흔 한 말로 막걸리 한사발 놓고 화해하는데,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부르면서 화 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증오와 멸시와 무시하는 태도를 얼마나 많이 가집니까 상황을 고려해주지 않은 일들이 얼 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인데도 이런 실 수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내가 어떻게 하면 그사람 을 감싸줄까"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혹시 무슨 나쁜 소문을 들었 다고 합시다. "어머나 그래" 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이것을 어떻 게 하면 감싸줄까 어떻게 하면 위로해주고 달래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계시는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학생 가운데 문제 학생이 한명 있었대요. 문제학생이라고 해서 그 학생이 말썽을 많이 부렸다 는 것이 아니라 학생운동 같은 것 때문에 문제 많아서 그 교수와 한번 만나 서 이야기 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약속을 했는데 약속시간에서 한시간이나 늦게 왔습니다. 교수를 무시하고 속썩인다고 생각 이 드니 마음에 굉장히 화가 나서 있는데,노크 소리가 나고 이어서 문을 확 열고 들어오는 학생의 모습이 얼굴에서 부터 땀이 비오듯 쏟아지더래요.

 그 모습을 본 순간 이 교수님은"네가 시간이 늦으니까 걱정을 많이 했구 나.그렇지 난 괜찮아. 시간이 많아서 충분히 기다릴 수가 있었고,네가 늦 게 오는 바람에 내가 책도 좀 보고 괜찮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니까 이 학생의 얼굴이 환하게 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렵게 이야 기해야 될 일들이 잘 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자네가 교수를 무시하 는 건가 학생이 한시간씩이나 늦게 오고,대학생이 그것밖에 못해"이런 식 으로 말했다면 그 학생은 뭐라고 그랬을까요

교회에서도 지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지각을 하겠습니 까 그러나 지각을 하는 사람은 고쳐야 합니다. '야 다행이다. 우리 목사님 은 사정을 봐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습관적으로 5분 늦는 사 람은 5분 빨리 와야 합니다. 그러나 늦어서 마음이 두근거리고 '예배를 빨 리 드려야 될텐데'하고 헐레벌떡 들어오는데 안내하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 이 야단을 친다면 은혜받으러 왔던 마음이 없어져버리지 않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최우선적 태도는 사랑과 자비와 동정,위로일 것입니다. 예수 님은 바로 이런 것을 먼저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돌에 맞지 않게 해 주셨고,"너를 돌로 치려하는 사람들이 있느냐없습니다.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두번째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정죄할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자격 있으신 분이 자격을 포기하 고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아주 강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십니다.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아라." 가서 다시 죄 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너에게 집행유예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야. 너는 오늘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하는데 한번 더 기 회를 주는 것이니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을 연이어 생각한다면 무슨 말씀이 되겠습니까 "첫번 째 기회에서 너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두번째 기회에서는 반드시 새롭게 살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용서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제2의 기회를 부 여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두번째 기회를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삶의 새로운 도전을 주시는 것입 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느냐,새로운 생애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과 감히 받아들여라"는 것입니다.

 전에 거리에서 배회하는 윤락여성을 선도하는 수용소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서도 개선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사 람들을 분류해 놓은 곳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의 대부분이 이십대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들에게 여학생 교복처 럼 곤색에 하얀 칼라의 제복을 해 입혔어요. 그들을 보니까 교실에 앉아 있 는 여학생들 같아요. 그 사람들이 "멀리 멀리 갔더니..."하고 찬송을 부르 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기술을 배우고 나갔다가 다 시 1년만에 붙들려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 나갔 다가 유혹을 받지 않으려고 졸업은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원장님,저는 이곳 에 살면서 새사람이 좀더 되겠습니다"라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을 볼 적마다 원장님이 그들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용기 를 주고 기도해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 간음하다 붙잡혀 온 이 여인에게 주님이 주시는 "다시는 범죄치 말 라"는 말씀은 "그대로 계속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새로운 삶의 도전을 가지 고 정말 새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가서 다시 범죄치 말아라. 내가 너를 믿어주는 것이다. 난 너를 믿는다. 네가 새로운 생애로 살 것을 나는 확신한다"하는 신뢰입니다.

 여러분,혹시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속썩이고 때로는 가출을 하는 자녀들 이 있습니까 그런 아이를 볼 적마다,그런 아이가 무슨 일을 할 적마다 그 애를 붙잡고 꼭 할말이 있습니다. "난 너를 믿는다.나는 하나님을 믿듯이 너를 믿는다. 난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내아들로,내딸로 반드시 내게 돌아 올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넌 틀려 먹었다.

너는 전부터 글러 먹었어." 그러면 그 애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좋습니 다. 뭐 내가 아버지의 자식입니까" 하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범죄한 여인을 어떻게 믿어줍니까 여러분,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악용치 말아야 합니다.

 일대일 만남을 원하시는 예수님

이제 말씀속에서 보다 더 중요한 요점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문제가 어떻게 해서 해결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가운데서 보다 더 깊이 강한 빛을 비추면서 떠오르는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들 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가버리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인만 남 았더라." 예수와 여인! 일대일(1:1)의 만남! 이것이 문제해결의 관건이 되 는 것입니다. 내 생애의 참된 변화는 예수님과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 가능 한 것입니다. 일대일로 대면함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러분,여러분 한분 한분들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 수님 앞에서"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별의미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사법고시 합격하고 판사하시는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글을 읽고 참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다 예수를 믿기 때문 에 그냥 끌려가다시피 하여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3년을 나가고 집사까지 됐는데,이분의 마음속에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사람이 '나는 죄인이니' 해도 그분은 '왜 내가 죄인이야 이렇게 잘살고 교회도 잘 다니고 그리고 집사까지 되었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갈등이 계속 해서 심화가 되었고 그래서 하루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서 아무도 없는 텅빈 캄캄한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했 습니다. "하나님! 내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을 영접할 때까지는 이 자 리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하나님을 불렀고 잘 안될 때 에는 남의 흉내라도 내듯 "할렐루야 할렐루야"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느냐에 대한 문제를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 았지만,그 기록 가운데 분명한 것은 자기가 일대일로 예수님을 만나서"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내가 회개합니다"하는 분명한 결단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일대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만난 체험이 분명해야 합니 다. 만났을 뿐만아니라 거기서 용서받은 체험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챤 작가가 그런 고백을 한것을 전에 보았습니다. 그는 소아마 비에 걸린 사람으로 상당히 예리한 작가이고 피해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주할만한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작 품을 쓰기 위해서 천일동안 새벽기도를 나왔습니다. 3년동안입니다. 그는 솔로몬이 하나님앞에 일천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천일 동안 새벽기도를 나왔 습니다. "하나님,끝나는 날에는 하나님게서 나에게 큰 은혜를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지막 되는 날 새벽에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엎드렸습 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죄인이 다." 천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들은 음성이 "너는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죄인된 자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그의 작품의 세계가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일대일로 만났습니까 용 서의 체험이 있습니까 눈물의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과 일대일의 만남. 이 것이 내 생애의 전환의 기초가 됩니다. 헌신의 이유가 됩니다. 봉사의 이유 가 되고,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매우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우리가 언제나 부르는 찬양이지만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하는 이 찬양은 언제나 우리의 고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서 분명해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재확인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주님을 만났을 때 거기 거룩함이 있고,주님의 온유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함이 있습니다.

 범죄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속에서 우리 다같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찬양을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면서 믿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시기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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