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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바라보자 (눅 23: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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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우리가 누가가 기록한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교독했습니다.:49에 보면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멀리 서서 주님의 수난을 바라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해야겠지마는 특히 사순절기간, 더더구나 고난주간에는 십자가를 마땅히 바라보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보석 가공국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곳곳에 보석을 가공하는 곳이 있습니다. 작년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기회가 있어서 갈릴리 근처에 있는 보석을 가공도 하고 판매도 하는 공장을 들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손님이 들르면 먼저 보석을 가공하는 공정을 보여 주고, 그 다음에는 슬라이드로 보석의 성질, 쓰이는 곳 등 보석에 대한 여러가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보석은 면에 따라서 각각 다른 빛을 띄는 보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면을 보면 푸른 빛이 나타나고, 다른 면을 보면 분홍 빛이 나타나고 이렇듯 바라보는 면에 따라서 다른 색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도 여러가지 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 면에 따라서 다른 빛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저녁은 세 가지 다른 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면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을 향한 면으로 바라볼 때,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어머니가 사랑하는 귀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아들로, 그 아들은 어머니의 전부였습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꽤 큰 희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아들이 뜻밖에 꿈에도 상상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죄의 결과로 제일 먼저 상처를 입게 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물론 어머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그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부인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언제나 남편을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편은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때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그의 아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남자를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될 때에 제일 상처를 크게 입는 이는 그를 제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이 상처와 고통은 사랑에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상처는 깊고, 사라이 뜨거울수록 그 고통은 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를 하고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중심에 큰 상처를 입혀드렸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가슴 속에 고통의 십자가가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의 가슴 속에 세워진 고통의 십자가의 역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성품과 그의 교훈과 생활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의 생활의 절정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깊이 상한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 십자가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가지 죄를 더 지으면 하나님의 십자가 속에 못을 하나 더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죄를 멀리 해야 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또 다른 그리스도의 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렇게 바라볼 때 십자가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대속의 희생입니다. 신약성서 전체가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타나실 때, 세례 요한은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며, 오히려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으로 볼 때, 이 십자가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의 제사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이 조상적부터 내려 오는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원죄외에도 각각 자기가 짓는 죄 즉, 스스로 짓는 죄라하여 자범죄가 많습니다. 그 결과는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으니 곧,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죄에는 값이 필요합니다. 삯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값은 사망입니다. 즉, 생명으로 그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결국은 멸망을 받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멸망 받는 이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그저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냥 용서해 주면 될 것 아닌가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용서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은 후에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어린 양을 대신 죽여서 그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거러운 제도를 영원히 반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능히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있겠습니까 대속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이런 분을 인간 중에서는 찿아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죄를 가지고도 태어나지만 누구나 죄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영적 존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가령 천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해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인간이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수육(受肉)의 의미가 잇는 것입니다. 즉, 육신을 입으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지만, 그러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 없이 오셔야 하겟기에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 앞에 단번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누구든지 그 후로는 그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함 얻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있는대로 "누구든지를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곧, 죄를 용서함 받음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를 세우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범죄한 인간의 사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친히 말씀하신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가 생명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이 이음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이음, 그것이 영생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길을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또 다른 면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이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일찌기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주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밀알 하나가 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승리를 하시고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내가 들리우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 높이 못박혀서 들리웠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이 들린 이는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어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사중구생(死中求生)의 원리 즉,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이 생활 원리에 사시고 우리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대로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즉 자기 자신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찿으리라" 잃으면 찿을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들도 그 원리에 의지해서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의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희생이 없이 빛을 비출 수가 있습니까 촛불이 빛을 비추려면 초 자신이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면 결코 밝힐 수 없습니다. 전기로 켠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 자체가 소모되지 아니하고 전깃불이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해서만 빛을 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거든 맛을 잃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하셨습니다. 소금이 자기 자신이 녹아 없어지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맛을 낼 수 있습니까 희생을 통해서만 맛을 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소금이라고 하는 자신의 형체는 녹아 없어지지만 맛은 살아 있게 됩니다. 그 아름답게 만발하던 꽃도 떨어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이 원리에 의지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모든 믿는 사람을 향해서 "너희들도 이 원리에 의지해서 살고 나를 따라오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라" "희생을 통하여 승리하라" "섬김과 겸손을 통하여 존귀히 여김을 받으라" 이러한 역설적인 원리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났다 한 번은 죽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자유를 위해서 죽을 결심을 가지고 그대로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는 물론 앞으로 올 세계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활입니다. 바로 이것이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순교자적 삶으로 사는 이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아직도 말합니다. 스데반도 죽었으나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죽었으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즉,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생활의 원리를 따라 살라고 강권하십니다.

요즈음 우리 민족이 여러가지로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아주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안은 안에 대로 썩고, 밖에서는 난데 없이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런지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희망도 그렇다고 절망도 아닌 회색의 시대로, 진짜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편안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불안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하시지는 않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문제를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십자가의 원리에 의지해서 살기만 하면 무난히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특별히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십자가는 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슴 속 깊은 상처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내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 영원불멸의 생활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모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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