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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영원성 (고전 1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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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8절로써 "사랑의 영원성" 을 노래합니다.

둘째 부분은,9절부터 12절까지 인데 "사랑의 완전성 혹은 온전함" 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그리고 사랑만이 완전한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바울사도는 "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 "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 떨어진다" 는 단어 는 "펩토" 인데 "잎파리가 시들어 버린다" 혹은 "무대에서 배우가 사라진다" 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사랑은 시들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욱체는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 된 아가페 사랑은 마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고 변화가 심한 것이 사랑임을 모 르세요 " 예! 물론 압니다. 그련데 그 떨어지는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스톨게의 사랑입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사 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온 사랑,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허무한 곳이 있다면 인기 연예인들이 서는 무대일 것입니 다. 무대는 그들이 추구하는 열망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하는 가장 고독하고 가장 불안한 삶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미추는 조명은 "반짝" 하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기도 사라집니다. 박수도 사라집니다. 청중도 사라집니다. 커텐도 닫힙니다. 인기 연예인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 이 다가옵니다. 연예인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사라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온갖 소욕들은 모두 연예인이 서는 무대와 같은 것입니다. 다 사라집니다.

사도 요한은 " 이 세상도 그 졍욕도 지나간다" (요일2:17) 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 다시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 지지 않습니다.

 고대의 소피스트 (궤변론자) 철인들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고 소리쳤습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 이하에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옷과 같이 낡아지리라" 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작은 산들도 녹을 것이라" (암9:13) 고 말합니다.

옛 시인은 "산천은 의구하다" 고 말했습니다만 이 시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산천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보 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선언합니다.

대영제국의 기사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일본의 산하를 누비던 사무라이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중국의 고고했던 황제들도 사라졌습니다. 미대륙 기척시대의 날 쌘 총잡이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은 영원하다" 고 말합니 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죤스 라는 셜교가는 이 구절에서의 "떨어지지 않는다" 는 말을 이렇게 설명했습 니다.

"열대 지방에서 뜨거운 모래와 사막을 견디며 행군하는 군인들이 이 길의 무더위 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한 명씩 한 명씩 쓰러져 갑니다. 마침내 모든 군대가 다 쓰러지고 말았는데 맨 마지막에 유일한 병사 하나가 이 모든 고통을 이기고 우뚝 서서 걷습니다. 이 병사의 이름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코 쓰러지 지 않습니다. "

오늘 성경 본문은 이 사랑의 영원성을 영적 은사들의 순간성과 비교하고 있습니 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열렬하게 은사를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예 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구하고 영적 지식을 얻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바 울은 이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 하나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이 말은 은사를 구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은사보다 더 구할 것은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예언 을 하려고 하라" 고 권장합니다. 성경은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예언은 본질상 일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일단 성취되어 버리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의 예언을 설교의 의미로 받아 들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도 잠간입니다. 주께서 오시는 날 이 세상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설교가 필요없습니다. 천국에는 예언자가 없습니다. 설교자도 없습니다. 천국 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있습니다. 예언은 일시적인 은사입니다. 예언도 페 합니다. 그러나 사라이은 영원합니다.

 방언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방언이 언제 페할 것이냐는 물음은 신학적인 논쟁의 주체입니다. 많은 그리스도 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방언은 성경의 기록이 완성됨과 함께 끝난 것이라고 믿 습니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방언의 은사는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 논쟁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주께서 정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수 밖 에 없는 것은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방언이 끝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재림 때 방언은 끝날 것입니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표적을 위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면 지식 또한 어떠합니까 지식이란 실로 끝없는 욕구의 발로입니다. 그 러기에 현재의 지식은 또 다른 더 많은 지식을 계속 요구하는가 하면 이 지식과 더불어 근심을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이라는 것도 보다 새로운 지식,완전한 지식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결국은 사랑만이 완전한 것이며 사랑만이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 랑 외의 그 모든 것은 부분적이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물리학자요 수학자인 뉴우턴 같은 역사적인 인물도 노년에 이르 러서는 심한 건망중으로 인하여 자기의 이름까지 잊어버렸는가 하면 제자들도 분 간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대해야 하는 제자들이 너무도 어 처구니가 없어서 마지막에는 뉴우턴에게 "선생님 그렇게 다 잊어버리셨으면 이제 남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 하고 물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뉴우턴 이 대답하기를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가 내 구주라는 그것만 알지"라고 하 였다는 것입니다. 하긴 이 정도이면 천국 문턱에까지 다 간 셈인데 그 두 가지 면 충분한 것이지 더는 복잡하게 알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가 어렸을 때에 는 할머니,할아버지께서 바늘귀를 자꾸만 멀리하면서 끼시는 것을 보고는 아무려 면 하고 비웃었습니다마는 어느사이에 저 역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 을 두고 저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기를 이제는 나이들었으니 먼 하늘 나라만 바 라보고 가까운 것은 대충보라는 것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고보면 돋보기를 쓰는 것에도 다 그만한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예언이다.방언이다.지식이다 하면서 갖가지의 은사를 이야기합니다마 는 이들 모두는 하나 같이 일시적이요 제한적인 은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 랑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제 베드로후서 1장 5절에서 7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덕에 지식을,지식에 절제를,절제 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경건에 형제 우애를,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며 팔층 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을 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즉 덕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지식이 없는 덕은 사람을 해치며,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인내가 없는 절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건이 없는 인내는 자기 중심적인 완고함을 낳게 하 며,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은 외식에 빠지게 되고,진정한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 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 서는 "사랑을 공급하라!"며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위에 세워짐으로만이 본래적인 의미가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에 기록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의 내용이 그러한 것입 니다. 너희는 수고도 있고,인내도 있으며,판단력과 정의감,그리고 진실도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랑없는 수고, 사랑없는 비판,사랑없는 정의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 촛 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내가 너를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고상한 명분이나 행위라 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학교시절을 두고 생각을 해 보더라도 그 아무개 선생님의 얼굴이 참 잘 생겼었다거나 실력이 좋았었지 하는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아닙 니다. 저의 경우에는 (제대로 기억되는 것이 별로 없는데 단 하나 선명한 기억 은 눈 내린 겨울날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느라 종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계속 놀 아버린 때문에 지각을 하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아예 벌받을 각오로 뒤늦 게 교실에 들어선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의외로 저의 빨갛게 언 손을 어루만져 주 시면서 "몹시 손시러웠지" 라는 말씀을 해 주시던 일입니다. 그때 그 말씀,그 모습 외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 많은 똑똑한 선생님들은 기억에서 모두 사 라지고 사랑만이 남습니다. 사랑없는 충고란 아무런 의미도,효과도 없는 것입니 다. 오직 사랑만이 온전한 것이기에 이 온전한 것이 이를 때에는 부분적이고 미 완성적이며,일시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사랑은"하는 그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하는 것으로 바꾸 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 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 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그 중 어느 한 제 자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 같은 제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에도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어 제자들의 때 묻은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겨 주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사도 요한은 뒤늦게 말하기를 "세상에 있는 자기 사 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가운데 살아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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