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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침묵 (요 1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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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시"라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침묵이 있다고 말하였 습니다. 그 세가지 침묵이란 첫째는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의 침묵이요, 둘째는 먼동이 트기 직전 한 시간의 침묵이며, 셋째는 죽은 자의 침묵이라는 것입니다.

 현대는 참으로 말이 많은 세대입니다.물론 P.R 시대요 광고시대이기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아뭏든 다변이 능변으로 인정받고 있는 세대입 니다. 그러므로 말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요 죄인이요 또는 어리 석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 친구가 그려준 [바보 예수]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의 예수는 아주 초췌하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으며, 피곤에 지친 눈을 뜨고 있는 모습 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친구는 외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똑똑하지 못한 바보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라고 외 친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3년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물 고기 두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등의 많은 이적을 행한 사람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소망과 복음을 전파해준 사람으로서 빌라도 법정에 나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님께 한마디 질문을 던지고는 사람들 앞에 나가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또다시 들어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는 등 안절부절하였습니다. 그는 도대체 이 사람이 재판장에 왜 끌려 나왔으며, 이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조차 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피고가 재판장을 두려워하 는 일은 있어도 피고를 두려워하는 재판장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로마 총독으로서 삼권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그가 그의 앞에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예수를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어 보아도 예수는 말이 없었습니다. 일언 반구의 말도 없었습니다. 빌라 도는 그에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 데 왜 너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살려주려고 애 를 씁니다. 어쩌면 빌라도의 이 말은 너는 아무리 죄가 없는데 왜 말 이 없이 죽으려 하느냐, 왜 침묵하느냐고 물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인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의 마음 속에는 시세로 의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시세로의 철학은 강자철학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자가 정의며 승리가 진리입니다. 약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은 강한 자의 편이며 강한 자만이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다 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빌라도에게는 에수가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더구나 그때까지 예수는 많은 병 자를 고쳤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리셨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 이 좇아 다니며 그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데 왜 그러한 예 수가 이 죽음의 자리에서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는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침묵은 산자로서 침묵을 지킵니까 이것이 빌라도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치게 되었습 니다.그러자 그 옆에 있던 제사장들이 아첨하며 또 고소합니다. "만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면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면서 요청합니다. 이 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계속 말이 없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신다.그러나 역사는 있다."라 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 성을 들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 는 까닭은 원인이 내게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마디 라도 좋으니 말해 줄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무응답 속에서 응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때때로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을 표 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말의 부족성을 알게 됩니다.

 어느 장례식에 갔을 때 일입니다. 온 가족이 모두 나와서 큰 소리로 울고 불며 야단법석을 떨면서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상여차와 더불어 통곡의 소리도 멀어져 갈 때 멀어져 가는 상여차를 우두커니 서서 바 라보는 노인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죽은 분의 남편 되시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관례상 무덤까지 못가고 쓸쓸하게 혼자 남아 상여 차의 뒤만 쳐다보며 서 있는 그 분은 눈물도 말도 없었습니다. 침묵보 다 더 강한 웅변은 없습니다. 실제로 말을 잘하기는 쉬워도 침묵으로 참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너무도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전혀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죄가 없다고 외치기도 하고 석방하려고 많은 애를 쓰면서도 그는 예수를 때리고 자 색옷을 입혔으며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죄가 없음 을 알면서도 때리고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모순이며 부조리입니다. 이 모순과 부조리 앞에 한 마디 정도 할 만도 한데 예수님은 여전히 말이 없었습니다. 계속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가쁨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민의 원인을 한번 분 석해 보았더니 이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이치에 맞 지 않고 모순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불합리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갈 등이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일이 나의 논리적인 사고에 의하면 이치에 맞지 않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을 자 는다고 해서 침묵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끝으로 말을 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았지 마음 속으로는 이치를 따지고 불평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고민의 원 인이 됩니다.

 논리적인 것은 사람의 머리이지 절대로 세상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빈 다. 세상은 오히려 모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모순이 있는 이 세상을 불합리하고 모순적이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 다.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이 모순되고 불합리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만큼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시는 있을 수 없는 불합리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리적인 시대의 합리성 아에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불 합리성과 모순 앞에서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에 밝고 언변에 능한 며느리는 계속 시어머니에게 말대답을 하였습니다. 참다 못한 시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말대답을 하겠니"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며느리는 말대답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치를 따진 것입니다.이치만을 따진다면 언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합리적인 이론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침묵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 장 36절에 보면 에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침묵하였습니다. 이 세상 나라나 현실 자 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되어져 가는 현상보다도 깊은 곳에서 이루워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에 더 관심 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같은 예수님의 침묵은 일종의 심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들을 귀가 없는 자 앞에서 말씀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수준 높은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필요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언제인가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죄가 크다."라 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전혀 듣지 못한 사람,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격려 그리고 그의 위로와 권고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은 사람입니다.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역시 심판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그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온갖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심판하심을 느끼 지 못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심판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 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구원의 여지가 없고 회개의 가능성이 없는 사 람,심판받은 사람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죄중에 살더라도 구원의 열망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은 순간 순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살아서 역사하시 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것은 그 를 고소한 무리들과 빌라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침묵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신앙이었습니다. 예 수님께 육체적 고통과 수치를 주는 빌라도를 본 것이 아니라 빌라도 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높은 권세를 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에 빌라도가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 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다 시 말하면 예수님은 빌라도 위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 예수니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 지 아니 하겠느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사랑하는 아버지가 사 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가 보여 주신 신앙의 자세입니다.

 구약 성서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의 나이가 27세 가량 되던 해에 아브라함은 그를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듣게 됩니다. 만일 이삭이 도망을 치고자 했더라면 27세된 청년이 100살이 훨씬 넘은 노인 아브라함 정도는 얼마든지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본 것이 나리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없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생각해도 이 빌라도의 재판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며 치욕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일을 역사하고 계심을 보았던 것이며 그런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위탁했던 것입 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침묵은 사람에 대하여는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로써 자기를내어 주는 순간입니다. 이치를 따져 가며 할 수 있는 희생이란 없습니다. 날짜와 장소를 다 생각하고 계산하여 순교를 하고 자 원한다면 순교도 하지 못합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 면 그것이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더라도 그대로 순종하여야먈 하나님 앞 에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하면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 셨음을 보여줍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는 또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말일이 땅에 떨어지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위탁하는 그 침묵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참으로 아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 세대만을 바라보고,사람들만 쳐다보며, 형식적인 것만 평가하려는 데 급급합니다.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있음을 알고 묵묵히 응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할 것도변 명할 것도 없습니다.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침묵합 시다. 이런 마음의 침묵이 바로 신앙의 절정인 줄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되어 있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침묵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향하 여 또 한번 침묵하십니다.여기에 세상을 향한 심판이 있고, 우리를 향 한 사랑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전형적인 표본을 따라 삽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삽니다.

 말 많은 세대,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나 마음으로도 하지 말며 다만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을 보고 불쌍히 여기면서 썩어지는 한 알의 말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침묵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침묵과 십자가의 무서운 침묵 뒤에 바로 부활의 생명이 깃들여 있으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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