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른 사람들이 (요 18:28-40)

첨부 1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야바의 군사에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가야바에게 끌려 갔습니다. 순서는) 가야바--헤롯--안나스--가야바--빌라도 순서 입니다.이렇게 새벽에 야러 곳을 끌려다니며 재판을 받았는데 몇가지 모순 점이 있습니다.

1)결정한 혈벌에 죄를 맡추는 불법재판입니다.

사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합니다. 체포하기 전에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럴듯한 누명을 씌워서 합법적인 것으로 위장하려 는 재판입니다.

 2)새벽에 재판을 했습니다.

유대법으로는 밤에는 감정이 흔들리기 쉬우므로 재판은 반드시 밤에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낮에 했다가 추종자들이 폭동이나 일으킬까 염려 되어서 일사천리로 진행합니다. 밤중에 하고는 싶었으나 율법에 걸리므로 사람들이 적은 새벽을 택한 것입니다.

 3)무고한 자를 죽이면서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합니다.(요1:28)유월절 기간은 로마 법정에 들어가면 부정해져서 잔치에 참여할수 없으므로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에 계시고 빌라도가 드나들면서 재판합 니다. 유월절에 무죄한 사람을 죽이면서 로마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조심하 여 거룩한 척 하는 모숨을 저지릅니다. 이야말로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약대는 통채로 삼기는 행위입니다.

 4)십자가형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훼방하는 자라면 그들의 법대로 군중들이 모 여서 돌로 쳐 죽여야합니다.(레 24:16) 십자가 처형은 로마법입니다. 율법에 도 없는 십자가형으로 하나님을 훼방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했으니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 본 론 +-+

1.愚問賢答의 재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奇異하고 不安스러운 온갖 所聞들이 예루살렘 거 리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빌라도에게 전해진 報告에 의하면 그를 가장 열정 적으로 따르던 일부의 무리들이 흥분에 들떠 호위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였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 다"(마21:9)고 떠들어 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의 사나운 기질을 알고 있는 빌라도는 이런 소문들을 약간 불만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러나 로마 제국이 목수 출신에 불과한 한 인물, 보잘 것없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을 별로 두려워할 것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직접 대좌하게 된 빌라도는 무엇인가 약간 당황함을 느낍니다. 이 사람이 비록 사기꾼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만나본 어떤 사람과도 다른 데가 있음을 느낍니다. 빌라도는 깊은 인상을 받아서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심정으 로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빌라도, 너는 소문을 듣고 하는 소리냐. 너의 경험에서 우러난 소리 냐"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희망을 갖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헤롯의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一言半句의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헤롯은 오랫동안 진리에 대해 귀 를 막았기 때문에 이미 진리를 들을 능력이 없고, 오랫동안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았기 때문에 이미 소경 되어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로 마 총독인 빌라도에 대하여는 바른 선택을 할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런 질문으로 빌라도에게 <하나님 나라의 門>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빌라 도로 하여금 소문에서 경험으로 옮겨지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 도는 감명을 받긴 했으나 변화를 입을 만큼 큰 감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입장에 서서 질문합니다.

첫번째 질문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라고 질문합니다. 그는 종교인이므로 메시냐 아니냐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빌 라도는 정치가이므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묻습니다. 사실 王國이라 고 하면 적어도 세가지는 갖추어야 합니다. (1)다스릴 백성이 있어야 하고 (2)영토가 있어야 하고 (3)왕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도시국가라 할지라도 이것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빌라도는 이런 입장에서 묻습니다. 로마황제가 임명한 헤롯왕이 있으므로 왕이라고 하면 반역 죄에 해당하므로 로마 정부 가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 다"(요18:36)라고 하셨습니다. 왕은 완인데 영토가 다르고 백성이 다른 것 으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주권은 로마정부 가 헤롯을 임명한 것 같은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왕이 아니요 신령한 왕이 요 영원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두번째 질문 이번에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18:37)"라고 묻습니 다.

예수님의 대답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입니다.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선서식입니다.> 빌라도가 이 뜻을 알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생각에 집착해 있으면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차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수 없는 것입니다.

 2.소문은 유익한 점이 있으나 한계가 있습니다.



A) 소문의 유익성

이 이야기에는 특이한 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 아주 밀착해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는 종교는 소문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경 험에 의한 것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소문에 의한 것이라면 그 믿음은 고상하고 훌륭한 면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소문도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 나 신앙에서는 소문만으로는 부족합니다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들은 대 부분 이 소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역사에 관한 지식의 경우에도 아는 것은 소문, 곧 들은 것에 따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문학에 관해 아는 자는 지식도 모두 들은 것입니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92,900,000마일 떨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태양의 표면 온도는 화씨로 약 1200도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과연 사실인지 실험해 본적은 없고 실험해 보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혹 시 천문학자들이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약간의 오류가 있다 고 해도 나의 삶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천문학자들이 태양의 온 도를 추산하는데 1-2도 정도의 착오를 범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인생 을 크게 뒤바뀌지는 않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한 천문학자들의 말을 듣습 니다.

빨갛게 달아 오른 난로에 손을 대면 대단히 아플 뿐만 아니라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 그런가 그 렇지 않은가 시험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술은 사람의 기분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경우에 본인은 위험에 대 처하기가 더 쉬운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의 모든 반응이 느려지기 때문에 위험에 대처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 술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술은 이런 사람들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며 몸과 영혼 을 타락시킵니다. 이런 모든 사실을 모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여 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운전하기 전에 술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의 견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사실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책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성도들이 들려 준 증언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우리는 이들에 게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던 성도들의 증언으로 인하여 얼마나 부요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내가 살 아오는 동안에 알게 된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에 대해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 언제나 힘이 솟고 기쁨이 넘 치며 격려를 받고 삽니다. 신앙은 듣는 것이 매우 귀중합니다. 들은 것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큰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들 은 것은 경험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B) 이유는 무엇일까요 1)인간의 영혼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경험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 여 아는 어떤 지식으로도 하나님을 직접 아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 다. 아무리 물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물을 마심으로써 물을 경험하지 않는 한 입술은 타고 몸은 죽음의 고통을 면하지 못합니다. 꽃에 대하여 아는 것은 좋은 일이며 식물학은 연구해 볼만한 학문입니다. 그러 나 어떤 식물학의 지식으로도 꽃의 향기나 빛깔의 아름다움을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으로도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노래하는 때 그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갈망 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 을 알 수 있을까"(23:3) 하고 흐느껴 울 때 욥은 오랜 세월동안 흐느껴 왔던 외침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간구하는 때 빌립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간 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로에 지치고 안식이 없는 오늘날의 문제 는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만일 오늘 거리에 나타난다면 그는 "너희가 어 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 하여 수고하느냐"(55:2)고 물을 것입니다. 세계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안타깝게 그리고 목말라 하지만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2)열정을 가진 사람은 들은 것을 경험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가치 있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면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열심에 불타 게 됩니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말한 죄로 고문을 받을 때에는 자기가 했던 말을 취소했습니다. 그러나 고문으로 받은 고통 이 덜어지자마자 갈릴레오는 자기의 본래의 확신을 재확인하였습니다. 갈 릴레오는 스스로 확신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 었습니다. 진리를 나누고자 하는 이런 열성이 과학자의 특성이라면 믿음의 진실을 발견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열성을 보입시다.

 (성경) 문둥병자의 인생은 시련 그 자체였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 었기에 그는 능력은 믿고 있었으면서도 사랑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 여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 이다"(마8:2)는 불완전한 간청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불완전한 믿음에 응하셔서 그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8:4)고 당부하셨습니 다. 그런데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그것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수가 없 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소리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문둥병자였소 그러나 이제 내 몸은 어린아이의 몸과 같아졌소. 나는 깨끗이 나았소" 이렇듯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를 온 성내에 퍼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 개적으로 이 성내에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대예언자들이 주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대 예언자들 중에는 본인은 지극히 싫어하면서도 말씀을 전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도 못 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듣는 자들은 회개하려 고는 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기만 하니 나는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결심을 하는 횟수만큼이나 예레미야의 결심은 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뱃속에 갇힌 불과 같았기 때 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가슴 속에 불타는 확신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몇 주일전 자기 스승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 던 바로 그 法躁 앞에 두 제자가 섰습니다. 법정은 이들에게 가벼운 벌 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요한은 대답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 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 이들은 강한 확신 확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소문의 신앙은 침묵을 지키기가 쉽지만 경험한 신앙은 침묵시키기가 달려 오는 기차를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 들은 것을 경험으 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주제든지 주제를 완전히 통달한 사람에게 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메시지는 威 力的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이는 그 가르 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7:29). 서기관들의 문제점은 주로 듣는 것에 의존하는 종교였습니다. 그 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니고데모에게 했던 체험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 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요 3:11).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를 변혁하게 했던 힘이 바로 이와 같은 권위였습 니다. 누구도 어두운 과거를 지녔던 사마리아 여인을 傳道者로 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던 물동이를 내버리고 급히 마을로 달려갔을 때에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 그 동네 중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요4:39) 도마는 그의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지 못했던들 별로 가치 있는 그리스 도인의 증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물론이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바울의 능력은 그가 지닌 위대한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위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었습 니다. "내가 믿는 분을 나는 아노라"(딤후1:12)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실 이 바울로 하여금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바울의 이와 같은 확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경직된 세계 에 대하여는 들은 것에 불과한 복음을 선포하는 정도로는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C)이 같은 확실성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일일까요(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주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7:17)이 약속은 특별한 소질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확실성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음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가리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확 신하기 위해서 완전해지기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자신 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소유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 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 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또한 증인이라"(행5:32)때 로 하나님을 깨닫는 경험이 순간적으로 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 님을 찾는 영혼들을 본 사람들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인 깨달음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서서 히 점차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치는 빛 은 마치 새벽이 서서히 밝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언제나 하나님에 내 맡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느 때 든지 확실성에 도달하게 되고야 맙니다. 이런 사람은 호세아가 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 를 알고자 하면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호6:3)

맺 는 말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다 내말을 알아 듣는다"라고 하십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되 묻습니다. 이는 관점이 달라서 입니다. 빌라 도는 정치가요 군인이기 때문에 로말 철학에 젖어 있습니다. 로마 철학은 강자의 철학이요 강한 자가 진리이며 승리자요 의인인 것입니다. 사실 혁 명이란 승리하면 애국자요 실패하면 역적입니다. 그런데 붙들려온 33살의 갈릴리 출신의 초라한 이 청년에게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기고 나서 진리를 말하면 몰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빌라도 가 눈치없고 말을 못알아 듣는 사람은 아닙니다. 철학이 틀리고 개념이 달 라서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진리란 소다수가 주장해도 진리는 진리이비다. 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에 다라가서 적으면 틀린 것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함정이 있습니다. 또한 다 도망가고 혼자 서있는 예수님에게 조롱하는 말이기도 합 니다. 이때 베드로나 이왕 죽었던 몸인 나사로가 나서서 한마디 했으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무디는 예수님께서 가장 외로웠고 난처한 때가 바로 이때 일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만이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 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에 서서 진리이신 말씀을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번 더 다짐해야할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