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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과 생명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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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遺言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용 실험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즈길 바라오.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요. 내 부모님은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는 없소."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대두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이 결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슬프고 허무한 것입니다. 죽음은 파괴적이어서 모든 것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원수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원수!"
우리가 인생의 싸움에서 최후로 싸워야 할 실존적인 대상이 바로 죽임인 것입니다.

1.죽음의 확실성과 그 비극

죽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맞아야 하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비극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1)죽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죽음과 세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나 신문 보도를 통해서 세금포탈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장부를 써서 기가 막히게 세금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음을 피해 도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의 숫자가 증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사고는 각 사람의 죽는 시기를 앞당길 뿐, 결코 죽음 그 자체를 만들어 내거나 새롭게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음의 비율을 <1:1>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100%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확실성은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진리입니다.

2)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분리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죽으면 그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땅 속에 묻어야만 합니다 이젠 사랑하는 사람의 환상을 품고 살 수는 있어도 그 시체 곁에 누울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도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있느지도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사랑했던 오누이들이 나뉘어야 합니다. 죽음은 절대 절명의 이산가족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2.죽음의 극복


본문은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오빠의 병을 낫게해 주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메시야이신 그 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팔레스틴 지방에 커다란 파문이 일으켰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라버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주님께 급히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주님은 늑장을 부리며 속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11:6)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맨발로 뛰어오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回避하며 무려 이틀이나 遲滯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은 꾹 참고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1:7)이스라엘에는 6가지 선행이 있는데 그 중에 한나가 <환자방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장례를 지내고 시체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때 비로서 주께서 이 절망의 현장에 등장하십니다. 현대는 숨을 거둔 후, 24시간이 지나야 사망으로 처리를 합니다. 3일장 혹은 5일장을 치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대인들도 사람이 죽어 이틀이 지나 시체가 썩으면 완전한 사망으로 처리합니다.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예가 끝난 후, 문상객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이 극한 절망의 순간에 예수께서 실로 엄청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멍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復活!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죽음의 극복은 不老草나 不死藥을 먹이는 식으로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3.두 가지 소망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I am)라는 선언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흔히 기독교를 <靈魂不滅>을 기르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독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다른 이방 종교나 철학 사상들도 영혼 불멸을 주장하며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전에는 누구도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종교나 사상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C. S. Lewis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최대의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최대의 업적은 죽음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과, 실제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죽음 저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망

예수께서는 이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사람을 실제로 살려 내셨습니다.
褐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써 어린 소녀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蝎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청년도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셨으며鞨그 다음에 주님은 장년 세대에 속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죽음은 안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부활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루 해가 질 때 우리가 침상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빛나고 새로운 내일이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될 때에만 우리는 '죽음은 안식이다'라는 명제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진정 사실이라면, 먼 훗날 우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세상에 태어난 것이 생며의 기적이었듯이, 전지 전능하신 그분의 능력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사건 역시 엄청난 생명의 기적입니다. 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개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느끼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안식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永訣式이라 하지 않고 葬禮式이라 합니다.

(예화) 석가가 어느 곳을 지나가는데 한 불자가 참사를 당하여 애곡하다가 석가를 보고 애원하였다. "당신은 대선생이시니 즉은 내 아들을 좀 살려 주시오." 애걸하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석가는 그 불자에게 말했다.
"네가 만일 3대 동안 葬禮를 한번도 치르지 않은 집에 가서 백미 한되를 구해 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죽은 아들을 살려주리라."부인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3대 無喪家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부인은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삼 대에 걸쳐 장례를 치르지 않았던 집은 어는 곳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석가는 부인에게 말했다. "너 보아라, 死는 집집에 임하고 사람마다 당하는 일이니 너 홀로 애통할 것이 무엇이야"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오랜 생각 끝에 무상한 인생사를 버리고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나인성을 지나실때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장례행렬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외아들을 살려주셨다. 이것이 예수와 석가가 다른 점이다. 석가의 설법은 理에 해당한다. 해서 죽은 자는 살리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석가는 가르치는 법을 가졌으나 생명의 주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主이시기 때문이다. 가끔 어리석은 성도들 중에는 죽어서 화장을 하면 부활할 수없다고 매장을 굳이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다 흙에서 부패되고, 그 옛날 원형 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한 성도들의 부활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우리들의 부지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마음대로 제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위대한 復活의 메시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은 죽음 저 건너편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죽음 이편에도 존재하는 소망

본문에서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 외에 마르다의 정신적인 혹은 영적 죽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도 죽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녀의 삶은 이제 슬픔입니다. 절망에 삼키운 바 되었습니다.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를 상실했습니다.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사람과 같은 마르다의 모습입니다. 사실 마르다는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믿고 있었던 진리가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마르다는 2가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1)"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분명히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망스런 푸념이며, 절망적인 독백입니다. 주님이 제 시간에 오지 않아 오라비를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아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계속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22절에서 마르다가 한 말이 진정한 신뢰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니이다."(24절)즉) "역사가 끝나는 그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성경에 약속한 그대로 부활된다는 그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말해 놓고서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마르다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든지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의 '구체적인'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苦悶> 요한복음 4장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예배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꼐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저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꼐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찿으시느니라"(4"23)"지금 이 순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있다."예수님의 이 메세지에는 참으로 神靈과 眞理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앞으로 언젠가 오실 메시야는 믿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주님은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나 마르다와 같이 "저는 마지막 날의 부활,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하고 고백하지만 그 신앙은 현재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현재의 절망은 치료하지 못하는 마르다의 신앙입니다. 이들은 천국에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삶에는 희망가 승리와 능력가 치유가 없습니다. 현재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은 미래의 신앙이자 현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절망이잖아요.
지금은 어둡고 슬프고 죽음이잖아요."
이것은 현실 직시가 아니라 믿음의 부족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부활 신앙에 대해 예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5절)주님은 먼 훗날 다시 오실 그때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절)"
여기에서 '살겠고'하는 말은 원래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죽어도 그는 여전히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교제 속에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지금 나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오늘의 슬픔과 좌절과 불신앙을 극복하고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의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이 부활의 신앙은 현재적인 승리의 체험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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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오늘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둠과 절망에 몰아 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디. 주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逆境이 우리의 삶을 사납게 뒤흔들고 우리를 意氣銷沈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살아계신 주님을 信賴해야 합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알고 주장하기는 쉽습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천국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지금 나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부조리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허무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십니까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죽음을 보았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몸이 죽은 사람의 죽음과, 마르다와 같이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적과 같습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문제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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