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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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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기쁨과 소망과 앞날의 비젼을 제시해 주는 종교입니다.그러나 부활은 그 이전에 죽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피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험한 질곡을 견디면서 나갈 때 오는 성취감과 승리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입니다.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던 사람이 부활의 감격을 더 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 교만을 낳는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비참을 알면 절망을 낳는다"고 한 파스칼의 말을 상기케 합니다.

1. 고통을 아시는 분(1-3)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땅에 나실 때부터 시공의 제한이 없던 그분이 좁은 이세상 속에 오신 모습에서 그 분의 고통의 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공생애 기간에도 그를 반대하던 당시 지도자급의 사람들로 인해 크게 오해받기도 하고 결국은 십자가의 길에서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쓴 맛을 보신 분이십니다. 이 고통을 아시기에 우리가 고통 당할때 우리의 참 위로가 되십니다.사

2. 대신 죽으신 분(4-6)
요한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대신해 주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의 증언으로 끝내신 분이 아니라 그 말씀을 친히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만이 그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3. 침묵하신 분(7-9)
우리 주님은 여러 장소,여러 시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면서 구구한 변명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변명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침묵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진리가 곧 드러날 것을 아시는 미래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으시면서 억제하실 때의 고통은 더욱 클 것입니다. 침묵의 훈련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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