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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안에 정직한영을 새롭게 (시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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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성숙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성숙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유아적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들으나 그것을 삶의 영양으로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4명중 1명이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참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나 삶에 있어서 변화가 없다면 들으나 마나 입니다.

오늘의 한국같이 말씀이 풍요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을 진정으로 실행하는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그리고 진정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예화나 말하고,설교시간에 웃기면 말씀이 좋다고 하는데,하나님의 말씀은 만담이나,이야기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심령골수를 쪼개고,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극장이 아니고 병원입니다.

물론 설교를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좋지마는 설교자는 말씀의 선포자여야 하고,듣는 회중은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병든 심령과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처방을 통해 치료하고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이라고 하면서도 내세울것이 별로 없다면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해결책입니다.

1993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매일 실패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겠고, 온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어떻게 살겠는가를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오늘의 시는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합하다> 이 말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준에 백점으로 합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정도라면 괜찮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온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최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도 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다윗도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 그가 한가하게 궁전 지붕을 거닐때,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자기 집 뒷마당 노천에서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신하를 불러 그녀가 누구인지를 물어보고 불러오라고 하였습 니다.

그녀는 다윗의 용병으로 전선에 나아가 있는 헷사람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밧세바는 왕궁으로 불려와 다윗과 정담을 나눈 뒤 여러번 동침하였 습니다. 일회적인 실수가 아닙니다.명백한 간음입니다.

그러다 임신을 하자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선에서 불러 휴가를 주고,밧세바의 아이가 우리야의 아이처럼 보이게 하려는 계교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자기집으로 돌아가지를 않고,율법에 명한대로 하기를 고집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실패하였고,그는 우리야를 최전방에 내 보내 전사 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음과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죄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죄를 폭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마음을 옮긴것이 오늘 시편 51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하다는 다윗이 범한 죄가 이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가 늘 주님을 사랑하려고 애쓰지만,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만 우리 앞에는 늘 어려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넘어집니까 원인은 불순종의 본성입니다.

말씀을 듣지마는 일상생활에는 제대로 말씀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죄악된 본성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된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본래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친이 죄악중에 자기를 잉태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본성이 자꾸 죄의 방향 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순종의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된 신자라 하더라도 불순종하기는 매한가지입니 다.

우리 모두의 본성에는 불순종이 깔려 있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번에 구역을 82구역으로 확장하면서 느낀 것인데, 구역편성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분이 더러 있었습니다.

물론 정든 사람과, 가능하면 좀더 든든한 사람과 같이 있으려는 인지상정은 이해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일이 어렵습니다.

이쪽이 좋으면 다른 한쪽이 싫은 것입니다.

그건 구원과 관련된 문제도 아닌데 여러번 오셔서 말씀을 하고, 그 사람을 보내달라고 공갈도 하고 애원도 하는 것을 보면,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는 순종이 어려운 존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속에 임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란 불순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순종하여 봉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사악한 본성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즉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부르짖음은 우리 모두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갈증인데,이러한 갈증이 없다면 우리는 신앙의 진보와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으로는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우리 모두가 율법적인 신앙의 차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오늘의 말씀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은 새언약의 부르심을 받고도 율법적인 차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킬 힘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모세 조차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같이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새언약의 피가 필요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가 무엇입니까 종교는 신을 믿는 일의 규칙과 제도,즉 계명을 말합니다.

계명은<해라,하지마라>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술을 마시지 마라.

저질 영화를 보지 마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사기치지 말라.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규칙은 교파가 다르면 규칙도 달라집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규칙이 다른 것은 여러분이 알고 계십니다.

이런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기독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의 차원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는 새계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새계명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관하여는 조금 후에 말씀 드리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악한 본성 때문에 죄에 빠진 자기 의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돼지에게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세에게 주신 율법으로는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세우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보다 외형적인 것을 더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외형적인 경건은 사실 성경에 없는 것도 있습니 다.담배 피우지 말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담배 피우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사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 아래 매여 있으면서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위하여 율법은 두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지키면 복을 받는 다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 아래의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좀더 냉철하게 돌아본다면 ,현재 대부분의 교회체제가 신자들의 이기적인 동기나 두려움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복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분이 많습니다.

교회 안 나오면 매 맞을까봐 나오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태를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항나님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사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도 얼마나 될까요 우리들 대부분은 천국을 소망 하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지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사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합니다.

사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받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 니다.그 결과가 복이든 저주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조건없이 드려야 합니다.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 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지옥가는 것이 두렵고,천국에 가고 싶어서 한다면 그것은 죽은 행실입니다.

새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현대 교회에 만연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TBC성서연구를 하는데, 그 공부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영지주의와 유대주의로 인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영지주의의 위험은 우리가 아는대로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염세주의 의 위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는 곧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현대교회에 이같은 문제가 잇는데 우리는 그 위험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더라도 탄로나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 다.지은 죄를 고민은 하겠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체제는 외형을 중요시하므로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외식하는 자여>라고 말씀 하셨지만,죄인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위선자를 만들고 상황을 악화 시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행을 하면 높이고,자신의 행위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함을 알리기 위해,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 의 은밀한 죄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문제를 지적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왕이여, 양떼와 소떼가 많고 돈도 많은 한 부자가 있는데, 그의 이웃에 아주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에게 는 새끼 양 한마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양을 아주 애지중지 하며 정성껏 길렀습니다.그러던 어느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자기양을 잡지않고,가난한 이웃의 하나밖에 없는 새끼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아니 난 이웃의 양을 죽인 적이 없는데> <아니오, 양은 죽이지 않았지만,당신은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습 니다.원하기만 하면 궁녀들 모두가 당신의 여인이 될 수가 있는 데도,당신은 이웃의 하나밖에 없는 여인을 도둑질 했습니다> 이와같이 엄청난 문제를 가진 다윗이 남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자기는 훨씬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보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회 안에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데는 더욱 열심인 것을 종종 봅니다.

이와같이 율법은 문제를 지적합니다만,해결책을 가져 오지는 못합 니다.

해결책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분은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한번 따라 하십시다.

--1문제는 법이 아니라 마음이다--0--1문제는 법이 아니라 마음이다--0 그렇습니다.

죄악의 해결방법은 법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한번 따라 하십시다.

<보라 내가 새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1나의법을 그들 속에 두겠다--0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해라,저것을 해라 하면 그 명령을 거스르려 합니다.

그러나 새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두시겠다고 합니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새언약에서는 율법이 외부적인 것,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살던 이웃에 수자라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집안의 강요로 마음에도 없는 청년과 결혼 했습니다.

그 처녀는 매우 아름다웠고,행실도 매우 좋았습니다.

수자라는 여자의 남편은 아주 건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청년 사업가로 매우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돈도 잘 벌었습니다.

그 결혼은 부모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그 청년의 부모는 며느리에게 자기 아들이 잘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 아내에게 아주 잘 해 주었습니다.

함께 외출도 하고,집안 일도 거들어 주고,돈도 잘 주었습니다.

이주 가정에 충실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처녀를 비난 했습니다.

복을 발로 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자라는 처녀는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가식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처녀가 교회에서 울며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물론 자기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그 하는 모든 행위가 의미가 없는 가식적인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남제주양로원에 있는 한 할머니는 남편과의 사이에 두딸이 있었는데 딸들을 모두 출가 시키고 난 뒤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도자기공장을 하던 남편이 자기 앞으로 한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양로원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남편이 40년을 같이 산 자기 아내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은 것은,그 할머니가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처녀시절 한 동네에서 사랑했던 총각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해당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를 양육하고 남편을 섬겼지마는, 그의 죽은 남편은 자기에게 진정한 사랑을 쏟지않은 아내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의를 자랑하거나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는 봉사며,교회출석이라면 그것은 율법입니 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죽은 행실을 드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행동을 원하십니다.

권사가 되기 위하여, 장로가 되기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죽은 행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 것이고, 그의 행위 또한 생명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고,교회에서 시행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심야기도에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열심을 내서 신앙 생활 하는 것이 그리 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열심으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일이 죽은 행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열심이 아니라,큰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우리 모두 에스겔서36:26을 봉독 하십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 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너희가 내 규례 를 지켜 행할지라> 줄을 쳐 두십시요.

이 말씀과 다윗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다.

다윗은 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고,에스겔서의 말씀은 그 기도 의 응답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새로운 마음이 필요했던 것입 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법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변화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변화되면 행실은 저절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 하셨다면,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율법의 계명을 약속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율법은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너희가 도적질 하지 않을 것을 내가 약속한다> 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죄를 지어도 좋다는 면허증이 아니라,죄짓지 않고 살도록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과 신을 우리 마음속에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방언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가 방언을 하면서도 시어머니에게 잘못한다거나, 이웃에게 야박하게 한다면,그는 방언에 대한 지식을 얻은것이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요란하지만,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그들의 속에 하나님의 신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것은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공연히 얼굴이 붉어지고,혈압이 오르고,괜한 열심으로 설치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식물이 열매를 맺을 때 소리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열매가 자라고,탐스럽게 익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점진적이고,조용한 역사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단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금년에 주보가 바뀌었는데,거기에 가정예배란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가정예배를 드린다면 경건의 연습은 되겠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별로 귀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랑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드린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기 위하여 읽어야 합니다.

성경퀴즈란의 답을 메우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살아계신 하나님의 율례를 마음에 담아두기 위하여 읽는다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물론 성숙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훈련이 됩니다.

신앙은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심야기도를 나오신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성숙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율법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면 즐거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 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생활이 즐겁습니다.

봉사가 즐겁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수자 처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남편은 외형적으로는 자기 아내 밖에 몰랐습니다.

다른 여자가 있는것도 아니고,아주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돈도 넉넉히 주고,원하는대로 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키스도 해 주고,바쁜 시간에 쫓기면서도 가능한 일찍 귀가하여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훌륭한 남편인가요 아니라는 것이 드러 났습니다.

수자 처녀가 (처녀가 아니겠지만) 이혼을 요구했을 때,별다른 고통 없이 이혼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곧 재혼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길을 가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동인이 생기면 하나님을 버리고,떠납 니다.

구역장을 했는데, 교회의 중진이었는데,그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도 남 보다 많이 했는데,이제는 아주 세상길로 간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전도사였는데,이제는 룸싸롱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저의 군대 선배 군종이 그렇습니다.

그가 군종을 할 때 영내교회가 비좁을 정도로 많이 모였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다니 온 그는 아주 열심도 있고, 재주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잠을 줄이고, 커피를 끓여 매일 초소방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대장 표창도 받고,사람들이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길로 갔습니다.

그 일로 인해 인사계가 계속하여,군종들을 비난했습니다.

<야!그 김하사가 창동에서 술집하더라. 너도 57병원 갔다오다 들려 봐, 그 새끼가 니 선배군종이다.느네도 마찬가지지 뭘!> 왜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 하십시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오늘 심야기도에 참여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것을 하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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