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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의 첫번째 시험 (욥 0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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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일에 저는 욥을 소개하면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다.
욥은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다. 단순히 인내의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리만큼 대단한 사람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있어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가 되어서 어디서 누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하면 매스컴이 가만 두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찾아내서 온 세상에 알리고 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문과 잡지가 아니더라도 교계신문과 잡지등 여러가지 매개체들이 수십통씩 쏟아져 들어오는데 사실 그것들을 다 소화해 내기도 바쁘다. 대충 제목들만 훑어보다가 관심이 끌리는 내용을 읽게 되는데 그렇게 해도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누가 고난을 당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다 하는 일들이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누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무엇하려고 남의 고난까지 생각하는가 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요즘 신세대들은 제 부모들의 고난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고생을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가 식이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할 수 있으면 잊으려 하고 현재의 고난도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고난을 생각하면서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줄 믿는다. 혹은 금식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금하며 사순절을 지내는 모든 분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의 좋은 것으로 크게 갚아 주시기를 축원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생명을 보게 한다. 이 세상에 아무도 고난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다. 하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산모는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짖는가 산모는 산모대로 부르짖고 이제 갖 태어난 생명은 생명대로 부르짖는다. 한 나라와 사회가 태동하는 일에도 고통은 따른다. 지난 주말에는 우리나라 정치사상 새로운 변혁을 가져오는 정치개혁법 3개를 통과시킨다고 하였다. 이 법안을 다루면서 여야가 많은 진통을 겪은 모양이다. 사실 고통도 댓가도 없이 태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고난은 인간 생명의 시작이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말하였다. 모닥불에 불티가 위로 날음같이 고난은 반드시 임한다는 설명이다. 모든 인생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이 원하건 원치 않건 고난은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있다. 지난 3일 오후 청주로 향하던 조근해 공군 참모총장(56세) 일행의 헬리콥터가 이륙 10분만에 공중 폭파를 하였다. 공사 42기 졸업식 예행 연습에 참석하기 위하여 가던 길이었다. 그분에게 그런 고난이 발생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건실하던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나고 내 자식은 설마하고 믿었는데 탈선의 길을 걷고 있는 경우도 있다. 불의의 사고로 가정에 먹구름이 덮히기도 하고 기둥같이 믿었던 아내/남편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의 이야기이고 또한 여러분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고난이 닥쳐오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상식밖의 행동을 나타내게 된다.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러한 고난이 줄줄이 다가 온다고 하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게 된다. 이러한 절망은 누가 주는 것인가

어느 날 사탄이 당국에 폐업신고를 하였다. 사탄은 그동안 사용하던 도구들을 시장에 내다 놓았다. 그는 아마 마음씨가 착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에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사업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탄이 내 놓은 물건들을 보니 거의 모두가 다 깨끗한 것들이었다. 깨끗하다 못해 반짝 반짝 윤기가 그대로 있었다. 어떤 것은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아주 다 낡고 달아 버린 도구가 한가지 있었더란다.

그것이 무엇인가 절망(絶望)이라는 도구였다. 그동안 사단은 절망이라는 도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절망의 순간을 참아 나오면서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으로 새 힘을 얻고자 해서 여기에 나오신 분들이 있는 줄 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절망에 빠진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바란다.

욥은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10 자녀들, 넉넉한 소유, 바닷가의 모래같은 넓은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 이 모든 면에 넉넉한 사람, 복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가정에 환란이 닥쳐왔다.

여러분 욥의 환란을 기억하시지요

1. 스바사람들이 소와 나귀들을 빼앗았다.(15)

2.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양과 종들을 살라버렸다.(16)

3. 갈대아 사람들이 세 떼로 몰려와 약대를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다.(17)

4. 대풍이 불어 집 네 모퉁이를 쳐서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19)

5. 그리고는 욥의 몸에 악창이 나서 그를 괴롭혔다.(2:7)
이 모든 환란이 덮친 이후에 욥의 아내가 욥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렇게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 그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1. 욥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인생이 태어날 때를 생각해 보자. 모두가 다 알몸으로 태어나며 두 손을 굳게 움켜 잡고 태어난다. 그 손에 움켜 잡은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해석하면서 다음 두가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는 금을 움켜잡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금은 다름 아니라 손금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움켜 잡겠노라!'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손을 펴고 죽는다. 불교용어에서 인생을 가리켜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을 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말이다. 석가모니보다 1,600 년이나 먼저 살았던 욥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욥 1:21)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고 재물과 향락에 몰두하지만 그 일의 결국이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인가 허무함 뿐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권불 십년(權不十年)이고 3대 가는 부자도 없다고 한다. 하물며 우리의 가진 명예와 잠간 누리는 향락이 다 무엇인가 모두 모두 수의 한벌 관 한개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누리며 사는가 하는 차이 뿐 아닌가

80을 맞게 된 스위스의 한 노인이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통계를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 왔는가 조사해 본 것이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잠자는 데 26년, 일하는 데 21년, 식사하는 데 6년, 약속을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5년, 멍하니 지난 시간이 5년, 게다가 세면하고 면도하는데 보낸 시간이 228일, 아이들과 노는 것에 26일, 넥타이 매는데 18일,
담배 불 붙이는데도 12일을 보냈다. 행복했던 시간들을 찾아 계산을 해 보니 불과 46시간 뿐이었다고 했다. 흔히 장수는 복이라고 하지만 무작정 오래 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헛되게 살아가는 장수보다도 짧더라도 보람있게 사는 것이 더 복된 삶이 아닌가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하였다. 오늘 하루 하루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2.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몇년 전에 맹인 가수 이 용복이 부른 노래 가운데 '어머니 어머니 왜 날 나으셨나요 ' 하는 노랫말이 있었다. 꽤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다. 이 용복이 그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모친이 살아 계셨는지는 모르나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의 가슴은 더욱 메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누가 장님 자식을 바라서 낳았겠는가 제가 목회하는 중에 더러 장애자를 둔 부모들이 있었다. 장애자 자녀를 원해서 낳은 부모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장애자 가운데는 급수가 있다. 선천적인 장애자가 있는가 하면 후천적인 장애자도 있다. 눈에 보이는 장애자가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자도 있다.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밝은 성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또 여러가지로 자기의 은사를 계발하여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장애자 가운데 원망,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고치기가 힘들다.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다루기 조차 힘들다. 특별히 성격 장애자인 경우에는 더더욱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그 한 사람 때문에 허다한 괴로움을 당한다.

욥의 경우는 능히 원망할만 한 입장이다. 그만한 일에 원망하지 않는다면 제 정신이 아니다. 당연히 원망을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욥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고 하였다.

3. 어려운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고난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미리 알고 있었다. 욥은 말하였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40년동안 시험하셨다. '하나님 섬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서이다.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12 지파 대표들이 가나안을 미리 정탐한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이다. 40 일동안 가나안을 돌아 본 이후에 가나안 정탐 보고대회를 백성들 앞에서 가졌다. 여호수아 갈렙이 백성들 앞에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땅을 악평하였다. '그들은 신장이 커서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10사람의 악평자를 비난하고 여호수아 갈렙을 믿음의 사람으로 치켜세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요단강을 건너 첫번 만난 성을 7 바퀴 돌아 여리고성을 무너트린 것도 믿음의 승리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마땅히 정복해야 할 성을 돌지도 않고 소리 질러야 할 때 소리 지르지도 않는다.

여호수아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사실적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도 여호와의 말씀 순종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히브리 기자의 말이다. 믿음은 즐겁고 평안한 때에 가까이하다가 어려운 때에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누가 이 믿음을 저울에 달 수 있으며 누가 이 믿음의 부피를 계산 할 수 있는가
사람의 믿음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알아 본다.

요즘 흐르는 말 가운데 소위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말이 있다. 땅 바닥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정 바람에 공무원들이 납작 엎드려 있다는 말이다. 인사도 없고 웃음도 없고 교제도 없고 .......

비록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믿음을 잃지는 말자.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브리 11:6을 찾아보자 ①그 분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②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면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하였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벧전 4:10-11)

욥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이다. 시험이 덮쳐도 믿음을 지킨 사람이었다. 시험은 의인이라도 조용하게 다가 온다. 그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시험에 쉽게 좌절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시험의 강을 건너 축복의 가나안을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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