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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 (출 14:19-31, 롬 14:1-12,마 18:21-35)

첨부 1


본문의 상황인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여러 묵격자들이 증언한 것처럼 새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그 내용이 일치합니다.
물론 각각의 전승은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어떤(하나님의 현존) 에 대해서는 정확히 글로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19절에는 “하나님의 사자” 로 24절에는 “불기둥 구름기둥” 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다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리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요점은 출14: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 까이 못하였더라”
의 말씀으로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며, 밤의 어두움은 애굽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유심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때에 자연의 힘 자체보다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이것은 조화의 장난이 아닌 정당하게 자연의 힘을 이용하셔서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 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서 창조되어야 할 점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인 것입니다.

로마서 14:1-12
롬14:2-3“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자를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레11장 본문은 믿음이 연약한 자, 즉 구체적으로 부정한 음식에 대한 금기사항과, 안식일 준수에 대해 망설이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 복음은 본질적인 내용이 중요하므로 지업적인 문제 때문에 형제, 자매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강한 자라도 약한 자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사45: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 하리라 하였노라”

다만 믿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발 아래서 모든 사람이 정죄당했고, 오직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25
본문의 주제는 ‘용서’ 입니다.
본문과 비교되는 말씀은 눅17:4“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절의 말씀으로, 두 곳에서 언급하신 주님의 말씀을 종합할 때 용서는 산술적으로 무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21절“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에서 베드로는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사실 그당시의 랍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웃을 용서하는 최대치로 4번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7번은 유대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7번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사실 원시시대에서는 잘못에 대해 무제한적인 복수가 있었는데, 지금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제한적인 용서가 있을 뿐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을 헬라어로는 “일흔 일곱” 이라 하는데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수없이 많은 무제한적인 용서를 말합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용서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에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이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마태의 독특한 문장 연결로서 22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대답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말씀처럼 자신이 죄 용서함 받는 것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도 단순히 말만이 아닌 실제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용서의 기초는 인간의 너그러움과 심성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며, 끝없이 우리를 믿어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움과 같이 노래합니다.(시114:7-8)“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8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오늘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현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1.용서의 기초는 소망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19-31
가장 절망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꽉 막힌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기적의 사건은 과거 한시점에서 일어난 단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용서할 힘을 갖지 못하지만 전능하시고,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용서할 힘을 공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를 바다에서 심판하셨듯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 인생을 공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판단 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2.용서의 기초는 내 자신이 무한히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마18:21-35“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는 횟수를 헤아리면서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을 기억하면서 감격 가운데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일만 달란트 빚졌다는 것은 도저히 체무가 불가능한 엄청난 액수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자기가 빌려준 빽 데나리온은 참으로 적은 액수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통해서 무한히 용서받았음을 깨달아야만 우리 이웃의 작은 잘못을 능히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며, 용서하는 일은 우리의 분깃임을 아는 데서 용서가 가능합니다.
롬14:1-12“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자를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 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5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 하리라 하였느니라,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간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판단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간에 모든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으로 십자가 밑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고,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면서 겸손히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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