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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 (벧전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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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특정한 그룹에서 주시는 말씀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그런 본문들은 특별한 상황에서 특정 대상을 상대로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내게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쉽습니다.
본문은 언뜻 볼 때 교회의 장로가 아닌 자들에게는 무관한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베드로가 “장로들에게권”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 내용은 모든 신자들이 본 단원에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성경 자체가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장로인 베드로
베드로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명시했었습니다.
그리이스에 가면 그리이스 전역에 산재해 있는 정통 교회마다 획일적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회중들이 서 있거나 걸어다니는 바닥은 평지의 땅을 대표하고 벽은 여러 성자들을 그린 벽화들로 채워져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마다 중앙에 둥근 천장이 있는 비잔틴식 건축 양식을 딸라 지어져 있는데 대부분 이 천장에는 어디서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둘레에는 대개 성자들이 겹겹이 묘사되어 있고 천장 지붕 가까이로 보면 12사도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베드로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영국의 오래된 많은 사원들의 석조물에도 새겨져 있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문을 기록할 때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높이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북부 터어키에서 봉사하는 교회의 장로들을 보고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장로들이란 자기들이 돌보는 양 무리와 함께 있는 자들임을 시사합니다(5:2). 그래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라고 해서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것이 커다란 영예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겸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부터 줄곧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사실상 교회를 향해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한 자였고, 예수님의 유명한 설교들을 직접 곁에서 들었으며,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목격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 모든 엄청난 사건들에 참예한 특권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고난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최악의 시간을 연상케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살아서 주님의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용한 위치로 회복되어 다시 주께 봉사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을 크게 실망시킨 자들에게 더없이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들은 사실상 부름 받은 주님의 일에서 여러번 실패하고 주님께 많은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무익성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는 은혜와 긍휼을 지니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자기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눈여겨보시며 조만간 하나님을 다시 섬기도록 해 주십니다. 이렇게 구원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된 자들의 입에서는 주님께 대한 찬송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베드로는 다시 한번 자신을 보통 신자들과 일치시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상에서 목격하였고 주님의 고난과 승리를 본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십시오. 나는 사도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합니다. 그 축복의 때가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주님의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베드로도 겸비한 한 종으로서 하나님의 보혈로 구속된 다른 성도들과 나란히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장로의 일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신자들은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들입니다(시100:3).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맡은 목자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만 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징계하셨습니다(겔34:1-10).
베드로는 예수님이 목자의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습니다(요10:1-18). 또한 99마리의 양들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던 목자의 이야기를 담은 잃은 양의 비유에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 있습니다(눅15:3-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 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주님께서 주셨던 목자의 교훈을 그의 수신자 교회를 보살피는 장로들에게도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장로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돌봄을 받는 자들입니다. 장로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먹이며 그들의 안녕을 돌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성경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적용시킴으로써 이 돌보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게 있고 깊이 있게 강권해야 합니다.
“장로들이 성도들에게 주어야 할 양식(설교)은 공허한 사상이나 경박한 내용을 늘어놓는 말장난이 되어서는 안된다. 양들을 먹이는 양식은 건전한 진리이어야 하고, 영적으로 깨달은 신령한 사물들에 대한 단단한 음식이어야 한다. 이런 양식은 거룩한 이해와 경건한 사랑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레이톤)
장로들은 또한 감독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돌아보는 자들입니다. 신약에서는 각 교회에 여러 명의 감독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빌1:1)하였습니다. 감독들은 높은 의자에 앉으신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일을 맡아보는 특정된 책임을 가진 존경받는 겸비한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구절과 사도행전 20:17, 28절을 보면 ‘장로’와 ‘목자’(목사)및 ‘감독’은 동의어로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어휘들이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직명을 가리키고 ‘목자’와 ‘감독’은 직책의 사역을 서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장로들의 직책은 달리 맡을 사람이 없어서 받는 것일까요 목사 또는 장로의 직책을 맡는 일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나, 막연한 소명감이나 혹은 교회에 오래 다녔기 때문에 타의반 자의 반으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므로 함부로 나서서도 안 되고 교회 전통이나 인습에 따라 자격이나 은사가 없는 자들을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장로들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사단의 공격을 앞장서서 막아야 하며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겸손한 자세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어야 하고 자신의 신앙 생활이 온전해야 하며 양떼의 영적 안녕을 점검할 수 있는 능력을 각오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본 서신을 받은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은 임박한 핍박의 어두운 지평선을 바라보며 두렵고 무거운 영적 하중을 느꼈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돈이나 명예를 위하여 맡는 직책도 아닙니다. 물론 베드로는 감독들이 보수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0). 그러므로 장로들이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베드로가 주는 교훈은 장로들이 돈에 욕심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장로(목사)의 수입이 좋기 때문에 사역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인기나 존경이나 안정된 봉급 생활이 목회자가 되는 주된 동기라면, 교회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 대단히 유감스런 비성서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목회자들이라고 당연히 무슨 존경을 받아야 할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무엄한 착각입니다. 지도자들이라고 무조건 성도들에게 복종을 받도록 주님이 그들을 교회의 감독자들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장로들은 존대를 요구하지 말고 존경을 받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일에 모범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4:12). 장로들은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지도력으로 “양 무리의 본”(5:3)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보상
베드로는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 장로들은 (목사의 직명을 가진 자들 포함). 목자장 아래에 있는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목자장이시기 때문에 양떼는 사실상 교회 목회자들이 직접 돌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돌봄은 완전하고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어느 날 다시 자기의 양떼들을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때 신실한 장로들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우승자들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 화관은 대개 오래 지지 않는 꽃들로 만들어졌지만 결국은 다 시들어 버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이었던 마케도니아 왕 필립은 주전 336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관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된 금관으로 장식되었는데 작은 야생화와 나비와 같은 곤충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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