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습관에 대하여

첨부 1


펄벅여사의 소설 <대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왕융이 장가를 들어 부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복숭아를 씹어 먹는 왕융이 신나게 맛있게 먹고서 속의 씨를 길가에 버립니다. 아무런 생각 이나 조건없이 복숭아를 먹었으니 그 씨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결혼하기까지 어떤 부잣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였습니다. 하녀 생활을 통해서 주인이 버리는 것에서 새로운 생산적인 것으로 돌리는 지혜를 길러 왔었습니다. 새신랑 왕융이 복숭아를 다 먹고는 무심코 씨를 버리는 것을 보고 부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혼자 말합니다. '이걸 심으면,또 복숭아가 열릴텐데...' 그러고는 그 씨를 감추어 가지고 와서 자기 집안에다 심었습니다. 물론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복숭아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동양의 여인들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얼마나 생산적이냐 하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대목에서 습관적인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년,또는 민족적인 것은 수천년간의 생활 속에서 고정되어 굳어버리는 생의 형태를 일컬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습관에서 생산성이 있는 씨알들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쓰레기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랬다는 식의 생활 태도는 소위 만네리즘에 빠져서 신선한 맛이 없고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없이 질펀한대지에 아지랑이 끼어들고 있듯이 아무러한 상념이나 의식이 없이 소가 걸어가듯이 어슬렁 어슬렁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권태와 낭비만이 깔리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까뮈의 작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스>가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쏘아 살인을 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있을 법한 그러한 생의 과정을 걸어가는 습관적인 삶을 우리는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습관은 바로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비생산적이고 고루한 생의 형태는 바꾸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입니다. 말하자면 생의 유신을 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