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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택하신 자처럼 (골 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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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내가 누구냐'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어있습니다. 또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성공의 지름길이기에 철학자도 '네 자신을 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를 아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 야 하고, 또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격 으로 나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도 더러 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독존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이란 역시 피조물입니다. 즉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생각과는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두 생각의 차 이와 그 거리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운명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입니 다. 그러면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있고 부모님이 계신 것입니까 간혹 어떤 때 보면 자기주장이 관철되 지 아니할 때 화가나서 하는 소리로 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고 소리를 바락바 락 지르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믿든, 믿지 않든, 만나 보았든, 만나 보지 않았든, 분명 부모는 있었습니다. 흔히 쉽게 말해서 사랑이 있다 없다 말을 하기도 하지만 모두 다 쓸데 없는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거니와 사랑 없이 살아 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형제의 사랑이 있 었고, 더불어 사는 모두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 랑을 못 받았다고 해도 지금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지 금까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인의 신앙 고백의 첫째가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라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있고 내가 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비로소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자기의 생 의 의미를 채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선과, 자기의 의, 나아가서 는 자기의 뜻과 존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 대 선배인 사 도 바울은 말하기를 [빌] 1:21에서 "이는 내게 사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내 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그 자체, 그 본질 자체가 곧 그리스 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성격과 그 본질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되어져 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잣을 살고 되어진 바를 살아가고 있습니 다. 오로지가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 피의 값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이 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만들어진 내 존재를 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양자된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된 바의 자기 가치를 지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 그러한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아니면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믿 느냐 믿지 않느냐 이렇게 수락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그것만이 문제입니 다. 따라서 이것을 알고, 이렇게 받아들이며,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과 이것을 모 르고 사는 사람과의 거리는 실로 엄청나게 먼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의 호칭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선택된 자", 또 하나는 "거룩한 자", 그리 고 "사랑 받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뿌리입니다. 생의 뿌리 요, 존재의 근본이며 우리 신분의 신분증입니다. 우리는 이대로 알고, 이대로 믿으 며, 이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선택받은 자"라고 할 때에 그 선택받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예정론을 몰라도 좋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주도적인 구원 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내가 있기 전에 그가 계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며 살았지만 그는 나를 끈질기게 붙드셨습니다. 주도적으로, 강권적으로 인도하셔서 오늘의 내가 있 게 했다는 이 사실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그 시작에 있어서나, 그 성격에 있 어서나, 그 운명에 있어서 추호도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주도하셨 습니다. 그런 의미의 선택입니다.

 또한 나됨의 자격도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그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지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절대적 은혜 가 작용해서 오늘의 내가 있다 라고 믿는 이것을 선택의 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습니 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의 필요, 내가 필요하냐를 안하냐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 다. 그분이 필요하시다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적, 나의 쓰여짐도 그분 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의 섭리와 그의 경륜에 나 의 존재의 필요성이 걸려있습니다. 또한 나의 가치, 나의 효율도 그의 능력과 지혜 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없어집 니다. 따라서 나의 주관도, 나의 판단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선 택하셨습니다. 그 선택함을 이제야 알고 그에게 감격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 니다.

 다음 또 하나의 호칭은 "거룩한 자", 즉 '성도'라는 부름입니다. 오늘 본문 말 씀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 다. 거룩한 자, 이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의 참으로 귀한 이름입 니다. 거슬러 올라 가보면 기독교인의 맨처음 이름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 다 음은 그리스도인, 또 그다음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즉,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안할 말이지만 현대의 그리스도인을 '성 도'라고 부르기에는 여러가지로 부담스럽습니다. 오리려 불편하고 쑥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성도'라는 아름다운 말이 점점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마 음쓰는 것까지도 구별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성도라고 부르기도 어색하고, 불리움 을 받아도 거북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성도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 다르다고 하면 교회에 나온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것을 잊자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 입니다. 존재가 다르고 생의 의미가 다릅니다. 마지막이 분명 다른 것입니다. 가 는 길이 다르고 오늘을 사는 가치관이 다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가치관이 다르듯이 행복에 관점도 다릅 니다. 가졌고 못가졌고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죄와 세상, 엣 사람과 세속적 가치로부터 구별된 생을 삽니다. 진정 예수를 똑바로 믿었다면 성경 말씀 그대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도 아니 할 것입니다. 권모 술수와 더러운 말이 오가는 자리에 앉지도 아니 할 뿐 만 아니라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숨이 막혀서! 적어도 이 정도가 되어 야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같이 협작하고, 같이 권모하며, 같이 쑥덕 거리고 돌아간다면 무슨 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인이란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별되었다는 의미의 성도요, 단적으로 말하면 산 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깨끗이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더 이상 땅에 있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 으로 사는 것이 거룩하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처럼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받는 자"라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 니다. 과거의 사랑받았다 하는 문제라면 이것은 지식이요, 기억이며 하나의 추억이 요, 역사이 이야기, 나아가서는 교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나간 이야기로 서의 사랑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먼 미래를 이야 기 하자고 들면 이 것은 하나이 이념이요, 신념에 불과한 것이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오늘은 괴롭더라도 끝까지 참으라고만 한다면 하 나의 이념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현재적이라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사랑을 고백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이제 만약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마다 "옛날 우리 신혼 여 행 갈 때 참 좋았찌!"하고 그 때 이야기만 자꾸 하자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 때 좋 았던 것이 지금 무슨 소용입니까 오늘이 더 중요한거지. 그런데 오늘을 생각하면 서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이만큼 살아왔으니 남은 생애도 그렇게 참으며 살아갑시 다 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조금 만 참아 주면 앞으로 풍족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해 줄터이니 오늘만은 참으라 고 한다면 이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마치 지금 북한에서 곧 이팝(쌀밥)과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주민을 착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이념과 신념 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래가 올터이니 오늘은 참으라 이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닙 니다. 그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만큼 속았으면 됐지 더 이상 얼마나 더 속으란 말입니까 또 얼마나 참으란 말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현재적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늙어 쭈글쭈글하게 되었어도, 그래도 당신이 좋다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돈 한푼 못 벌고, 병들었어도 오늘 이대 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이것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하기에 행복하고 그래서 나는 기쁜 것입니다.

 지금 사랑받는 자! 십자가의 그 사랑이 오늘 확증되고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 가 오늘 내게, 솽 가운데 벅찬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요. 선택받았습니다. 거룩한 자입니다. 이제 그는 남을 불 쌍히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받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자식도 바로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사랑 받은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것입니 다. 사랑 받은 마음으로 사랑 할 때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수직적인 사랑으로 수평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긍휼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라!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 럼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비하라는 것은 주는 마음이요, 넓 은 마음이며, 친절과 큰 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도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자연 히 친절과 이 주는 사랑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온유하라는 것인 데 이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택받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 겠습니까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낮아지고 낮아집니 다. 사랑받는 자이기에 낮아지고 또한 온유하여 굽힙니다. 더 이상 고집스러운 것 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니까 온유합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이것 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내란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용서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택받았으니 겸손하고 온유하라! 사랑받고 있으니 사랑하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백성이 인내하라 ! 하나 님 편에서 인내하고, 용서 받았으니 용서하라! 용서하되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 용서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참으로 귀한 말씀 입니다. 이제는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사랑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즐겨 부르는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은 J. Newton (죤 뉴톤)이라는 목사님이 작시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1725년에 태어나서 82세 에 떠나신 장수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한 때 이교도였을 뿐만 아니라 탕아였습니다. 그는 아주 악한다 노예 사냥꾼이었꼬 대표적으로 잔인한 사람이었습 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고 남은 생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감격에 살아갔습니다. 그 러던 그가 마지막에 아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가면 세가지 놀랄 일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전혀 하늘 나라에 올라 올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와 잇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랄 것이고, 두번째는 꼭 와야 할 것 같은 사람을 거기에서 못 만나게 되어서 놀라게 될 것이요, 세번째는 나 자신 도 나 같은 죄인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질문을 받은 그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만 구하라고 하시고 그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면 나는 그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택해서 주십시요"라고 하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알아서 주실 터이니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선택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총을 감격하여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채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 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성도 여러분! 택하심을 받은 자, 그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원 망도, 미움도, 원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절망도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그 감사와 그 찬양으로 모든 시험과 죄악을 이기며 날마다 승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은 총, 이 기쁨, 이 감격이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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