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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받은 가정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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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은 가정 (눅 19:1-10)

  뉴 호프 커뮤니티교회의 데일 갤러웨이 목사의 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있었던 여교사 톰슨과 테디 스톨라드의 이야기입니다. 테디는 항상 왕따를 당하는 아이였습니다. 멍한 얼굴에 가까이 가면 심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그 아이 옆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보면 채점할 것도 없이 죄다 틀리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톰슨 선생님은 테디의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테디의 생활기록부를 찾아보았습니다. 테디가 초등학교 5학년이니까 지난 4년의 평가 기록을 찾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1학년 당시 기록은 이렇습니다.

  “착한 아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나 가정환경이 불우한 편입니다.”
  2학년 때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조용한 아이입니다. 조금 폐쇄적입니다. 어머니가 불치의 병을 앓고 계십니다.”
  3학년 때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집니다. 금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4학년 테디에 대한 기록입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현재 이모님이 양육하고 있습니다. 학대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톰슨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치 한 생명이 자신을 비롯한 교육자들의 방관과 유기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듯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톰슨 선생님은 테디에게 교사로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톰슨 선생님은 방과 후 개인적으로 테디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성탄절에 아이들이 선생님께 선물을 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은 일일이 그 선물을 풀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테디 차례가 되어 테디의 선물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손때가 묻을 대로 묻은 쓰다 만 싸구려 향수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짜 목걸이는 알까지 여러 개 떨어져 나간 형편없는 상태였고, 향수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테디의 선물을 보고 박장대소했습니다. 평소 멍청하던 테디가 형편없는 선물까지 했다면서 조롱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때 톰슨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걸이를 직접 목에 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쁘지 않니? 나는 이런 목걸이가 제일 좋더라.”
  그리고 향수를 뿌리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이 향수를 가장 좋아해. 테디, 고마워. 최고의 성탄절 선물이야.”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비웃음이 사라졌습니다. 테디는 톰슨 선생님의 품에 안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목걸이는 생전에 엄마가 하시던 목걸이에요. 향수도 엄마가 뿌리던 향수예요. 그 향수를 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한테 엄마 냄새가 나서 좋아요.”
  그리고 그 일을 잊었습니다. 6, 7년이 흐른 뒤 톰슨 선생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테디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 소식을 선생님께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어요. 저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다시 4년 뒤 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저 과 수석으로 대학 졸업했습니다.”
  다시 4년 뒤 또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멋지죠? 그리고 이제 결혼합니다. 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시죠? 결혼식 때 선생님께서 제 어머니 자리에 앉아주세요. 선생님은 저에게 어머니이십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사랑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깨진 영혼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가 변화되고 행복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삭개오와 그의 가정이 구원 받은 것처럼 여러분과 가정이 구원 받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갈등하는 삭개오

  본문 1-4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의 이름은 ‘순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를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어졌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부자입니다.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쥔 성공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갈등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 때 두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것과 사람이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 삭개오가 뽕나무로 올라갔다는 것은 그의 갈급함과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삭개오는 체면과 명예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뽕나무에 올랐던 것입니다. 많은 아픔과 문제들이 삭개오를 뽕나무 위로 올려 보낸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복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통로였습니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자기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집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결코 쉽게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잡아 당겨도 끝내 오르고 맙니다. 어느 누구도 문제가 없거나 갈등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갈등이 오히려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날개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길라움 아폴리네어는 인간이 벼랑 끝에서 날 수 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그들은 벼랑 끝까지 갔다. 그가 밀었고, 그들은 날았다.

  벼랑 끝에서 발견한 날개는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말합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힘입니다. 하지만 그 힘은 아무 때나 드러나지 않고 벼랑 끝에 섰을 때 드러납니다.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다가 주시는 힘입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섰다고 모든 사람이 하늘로 비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벼랑 끝에서 추락했습니다. 오직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들이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벼랑 끝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보다 기대를 갖고 비상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벼랑 끝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조건이었으나 뚫고 나갔습니다. 뽕나무 위에 우뚝 섰습니다. 무엇도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권력과 부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모든 사람들을 거절치 않으시고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예외 없이 행복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갈등은 무엇입니까? 건강, 재물, 가족, 인간관계, 미래, 영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많은 아픔과 한계와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 혼자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 때문에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지 맙시다. 문제는 더 커지고 멸망합니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옵시다.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갈등 때문에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영접하는 삭개오

  본문 5-6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러러 보셨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도다 하셨습니다. 이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초청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입니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초청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최고의 선택, 지혜, 행복, 축복입니다.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월간지에서 읽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생각납니다. 한강 남쪽에 성실한 농부가 살 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추 농사를 지으며 그런 대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강 이남이 서울로 편입되고 정부에서 강남을 새로운 개발지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의 넓은 땅을 팔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들어온 많은 돈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아내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자식들은 제멋대로 살면서 부모의 속을 썩였습니다. 가정은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는 지옥과 같은 생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호화로운 자신의 집 자하실로 내려갑니다. 그곳에 자신이 배추 농사를 짓던 시절에 사용한 낡은 리어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리어카를 어루만지다가 이렇게 절규합니다. “배추 사려~, 배추 사려~” 깊은 밤에 눈물과 회한에 섞인 그의 절규가 지하실 안에 울려 퍼집니다. “배추 사려~”

  그렇습니다. 좋은 환경이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기쁨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인간의 기쁨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JOY'(기쁨)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J'를 'Jesus First'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기쁨의 이유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무엇도 장애나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성공했어도, 실패했어도,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사람들이 협조하든 방해하든, 젊든 늙었든, 모든 환경과 조건을 뛰어 넘어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즐겁게 영접해야 합니다. 자격이나 행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과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무엇과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행운과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하고 거절하는 것은 가장 불행하고 미련한 행동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변화된 삭개오

  본문 7-10절 "뭇사람이 보고 수근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를 싸잡아서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이고 세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봉사하지만 박수와 갈채를 포기하고 비난과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하고 성숙하게 됩니다. 비난 앞에서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싸우면 사탄의 작전에 말려들어 지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앞에서 자발적으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를 갚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삭개오는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물질보다 더 크고 영원한 복을 받았습니다.

  영적 싸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영적 싸움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드는 자입니다. 작은 일에 불을 지르고 크게 선동하는데 천재입니다. 선동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마귀도 가만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마귀의 방해는 극심해집니다. 마귀가 선동하려고 할 때 이기는 길은 흥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빠르게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한 마음에 흥분했다면 곧 흥분을 가라앉힙시다. 그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쓰는 방법은 대개 뿌리가 없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허망해지는 것들입니다. 미움의 힘 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속전속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귀의 의도에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맙시다. 다윗과 엘리압의 이야기를 보아도 명확합니다. 다윗이 목숨을 걸고 골리앗을 물리치러 나갈 때, 큰 형 엘리압이 그를 방해합니다. 근거도 없는 비난을 퍼부은 것입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만일 이때 다윗이 엘리압과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우군끼리 싸우게 만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자 엘리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후 성경에는 엘리압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귀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방해해도 계속 회개하고 변화되고 예수님을 위해서 끝까지 충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변화될 때 하늘의 상은 크고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늘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삭개오처럼 갈등을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과 가족들이 구원 받은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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