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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바라보는가?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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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무엇을 바라보는가? 
◆본 문: 열왕기상 19:1~8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한 농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 도중에 곁에 있던 소 한마리가 가 먼 곳을 보기 위해 돌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이 소를 보며 농부에게 물었습니다.“저 소는 왜 머리를 들고 돌담 너머로 보고 있을까요?”그러자 농부는 대답하기를“그건 소가 돌담은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라고 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난관에 부딪쳐 좌절과 실망으로 답답한 일을 만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소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로막힌 돌담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담 넘어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한순간 갑자기 자기 존재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 같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크게 좌절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一. 엘리야 선지자의 당시 상황.

엘리야 선지자는 주전 9세기(주전 876~853)에 활약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엘리야는 남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하늘을 닫고 여는 큰 기적을 행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은 아합(주전 869~850)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이라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여인과 혼인을 했습니다. 이방 여인을 왕비로 맞이한 아합 왕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세벨은 이 우상숭배를 적극 장려 했으므로 온 백성들까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33절에 기록하기를 “아합이...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은 우상숭배를 장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열왕기상 18:4)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二. 믿음과 기도의 사람 엘리야.

엘리야 선지자는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상황을 참으로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것은 바알과 아세라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이 깨닫도록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엘리야가 이 기도를 드린 후 3년 반 동안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엘리야는 아세라와 바알신이 참신인지, 하나님이 참 신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 각자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선지자는 모두 850명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는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에 기록하기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열왕기상 18:21~24)라고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했습니다. 심지어 칼과 창으로 자기의 몸을 상하도록 하면서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쳐 기도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들이 포기하자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한 것과 하늘로부터 불이 내린 장면을 기록하기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6~40)고 했습니다. 어느 신이 참 신인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거짓입니다. 우상은 미혹의 영입니다.

엘리야가 다시 하나님을 향해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자 3년 반 만에 다시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맺혔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야고보서 5:16~18)고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비를 멈추게도 하고, 비를 내리게도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의 힘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이겼습니다. 엘리야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요즘 대선 때를 맞아 대선후보 보좌관들이나 가족들이 당선 예언이나 당선 비법을 위해 점이나 굿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굿 한판에 4천만~1억 원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굿하면서 작두를 타는 것은 별도로 7백만 원씩 더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후보는 당선을 위해 조상들의 산소를 옮기기도 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모두 부질없는 헛된 수고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창조주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종말은 파멸뿐입니다.

三. 엘리야의 좌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고 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낙심과 좌절로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자 850명 과 대결하여 참신과 거짓 신을 가리고자 기도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린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임이 판명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자 850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비를 내린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용기와 그 담대함은 다 사라지고 로뎀나무 아래 맥없이 앉아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한 순간에 무너져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에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운 후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모두를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전한 내용을 열왕기상 19장 2절에 기록하기를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3절에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는 말씀이 곧 이세벨의 위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세벨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영적 침체는 우리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만 바라볼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 출렁이는 파도보다 자기를 도우고자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바람과 파도 쪽으로 옮겨지자 베드로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9절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고 했습니다. 물위를 걷던 베들로가 바람을 보자 무서워 빠졌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물위를 걷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있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좋지 않은 상황만 바라보면 베드로처럼 물속에 빠지게 되고 엘리야처럼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집중하면 “현실에 대한 과장된 상황인식”의 태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위협은 무기력한 협박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엘리야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힘없는 협박에 놀아나고 말았습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면 현실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에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사냥을 다녀와서 배가 고프던 차에 동생 야곱이 먹음직스러운 팥죽을 들고 와서 장자의 명분과 맞바꾸자고 했습니다. 이때 에서가 뭐라고 말을 했습니까?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현실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한 표현입니다. 사람이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시선이 온통 먹음직스러운 팥죽과 배고픈 현실에 집중되다보니 현실을 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장된 인식이 에서를 망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에게는 에서와 같은 태도는 없습니까?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낙심한 엘리야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기적의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을 터트리신 기적의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기적의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건장한 몸에 잘 무장한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헛된 일로 알고 후회스러웠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을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가 바라본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꿈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기골이 건장한 가나안 사람들만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말하기를“저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 말대로 되었습니다.“저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메뚜기처럼 힘없이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아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리라.”고 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략한 골리앗 장군은 거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을 비롯한 군대들은 골리앗을 보자 괴물처럼 여겼고, 그만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기가 꺾인 사울 왕의 뇌리에는 어떤 대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울왕의 시선은 골리앗만 바라보았을 뿐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나타난 어린 소년 다윗의 시선은 골리앗을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다윗은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했습니다. 그 결과 골리앗은 다윗이 던진 돌이 이마에 박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갑옷과 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한 장군 골리앗이 맨손에 돌을 들고 나간 소년 다윗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가운데 더글러스 헤이그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묻기를 “낙심이 되지 않느냐?”했습니다. 그러자 헤이그 장군은 “낙심이라니!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하에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 크리스천은 낙심할 권리가 없단 말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은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나를 연단하는 과정일 뿐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비록 큰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그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본문의 엘리야의 경우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엘리야는 이세벨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았던 바알신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을 바라보았을 때는 두려움과 공포와 좌절의 늪에서 죽기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잡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스트레스 쌓이게 하는 현실만 바라보면 반드시 절망하게 됩니다.
언제나 현실을 과장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현실보다 그 현실을 뛰어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처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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