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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자의 비밀 (렘 8:7-9, 롬 8:18-25, 마 25: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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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비밀 (렘 8:7-9, 롬 8:18-25, 마 25:40-46)

여러분께서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어떤 나라가 제일 아름답고 살기가 좋습니까? 요즘에는 모든 사람들 답이 나이가 들수록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좋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근데 어느 나라가 좋냐 하는 얘기는 사람마다 다 관점이 다를 겁니다. 

무엇이 좋아야 좋은 나라인지. 유럽에 가보면 자기들이 좋다고 하고 남미에 가보면 자기들이 좋다고 그러고. 근데 아프리카에 가보면 자기들이 좋다는 얘기는 잘 안합디다. 그래서 제가 성경말씀을 다시 들춰보고 읽어볼 때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샘, 함,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게 창세기 기록이긴 한데요 서양에 있는 학자들이 이 얘기를 보고서 샘이 큰 아들인데 큰 아들에게 주신 땅이 어디인가 하고 검토를 해보았더니 서아시아라 이름 하는 아시아 쪽 그쪽이 샘에게 주신 나라다. 저희들 아시아 나라입니다. 야벳한테는 유럽을 주었다. 그래서 백인 나라입니다.

가운데 토막인 함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을 주었는데 흑인들의 나라입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서양 사람들이 우리가 꿈꾸는 가장 좋은 나라. 에덴동산. 에덴동산이 어디 있었을까 하고 추적해보면 야벳 나라도 아니고 함 나라도 아니고 샘이 지배하던 나라다. 그래서 아시아 쪽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에덴동산이 있었던 나라. 그곳이 아마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어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서양 고고학에 보면 에덴동산에 있었던 그 앞으로 찾아질 곳 그래서 아시아. 아시아가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 우리 에덴동산으로 복원해야한다. 이런 관점이 고고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많습니다. 근데 제가 해석해보면 동쪽으로 갈수록 더 아름다우니 한국 땅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에덴동산 찾고 싶으시면 아시아의 동쪽에 오십시오.

그래서 아시아 동쪽 얘기를 하신분이 시인도 많았고 또 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사실은 이런 얘기를 떠나서 우리는 어떤 나라에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이렇게 여쭤보면, 나라 이름을 대기보다 자기가 살고 싶은 나라에 삶의 질이 얼마큼 제 맘에 들고 저한테 다가오는지 그 나라가 아마 제일 살기가 좋을 겁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어떤 나라가 제일 좋냐 질문을 던졌더니 성경말씀에서는 분명히 답을 합니다.

하늘나라가 제일 좋다. 하늘나라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그 답변에다가. 하나님 나라에 뭐가 있으면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로마서를 인용해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알알이 결실 맺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여라.

나라를 장소로 말하기보다 질로 말했습니다. 삶의 스타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여건으로 말했습니다. 그 나라에 가면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나라에 가면 그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라. 물론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기쁨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부분적이긴 하나 그 나라를 잘 꾸미는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니라.

에덴동산이 어떤 곳이었을까 하고 물으면 사도바울의 로마서 1장을 빌어서 답변을 하면 그 나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였습니다. 평화가 들풀처럼 피어나는 나라였습니다. 기쁨이 용솟음치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가 어디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에덴동산을 꿈꾸시면 이 세 가지 삶의 질이 넘쳐나는 나라를 만드십시다.

제가 아는 판사가 한분 미국에 계시는데요. 이분하고 언젠가 미국 갔을 때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시면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판사 입회 하에 개인사 문제 또 작은 문제들을 직권 중재 해주는 즉결재판 판사가 있습니다. 일상의 얘기를 조정해주지요. 결혼 하는 사람 옆에 서서 결혼했다는 확인서도 주지요. 말하자면 일상생활에 있는 작은 소 재판소입니다.

그 재판관이 젊은 분이신데 훌륭한 거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즉결재판 내지는 작은 일상의 재판의 이름을 영어로는 justice of the peace. 그대로 번역하면 평화의 정의. 여러분 아시는 대로 justice 재판소, 재판관도 뜻합니다. 평화의 재판소. 이것이 일상에서 나오는 뜻인데 그런데 거기서 재판을 하고 나면 싸우다 온 두 사람이 직권중재를 받으면 행복해 하더냐. 기쁨을 누리더냐.

그런데 이분 말씀이 실제 justice of the peace 라는 이름을 걸때는 그분 말씀은 성경은 잘 모르지만 기독교적인 정신에서 썼을 텐데 정의와 평화와 그 다음에 둘이 합치면 기쁨. 이것이 나와야 되는데 고민은 정의와 평화를 재판소 이름으로 담았는데 그 결과가 실재로 기쁨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고민이다. 제가 얘기를 들으면서 우선 내용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의 판단 속에는 평화를 위하여 정의롭게. 정의를 위하여 평화롭게. 이렇게 재판해 주시는데 그 결론의 핵심은 기쁨입니다.

이 말이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행복, 축복,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하늘나라 가면 정의가 있든 평화가 있든 중요한 것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을 창출할 수 있으면 기쁨을 만들어내는 정의와 평화가 아름다운 거고 평화란 이름으로 정의란 이름으로 기쁨이 좌절되고 슬픔이 있거나 아픔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가면 기쁨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말은 그냥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 아니고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정의와 평화가 있되 그 결론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느끼기에 둘이 공유할 수 있는 기쁨이면 참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람이 기쁨을 자기 맘대로 할까봐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기쁨, 정의와 평화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개입된 상황 속에서 기쁨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만들기 위한 정의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누리기 위한 기쁨의 평화고 그 기쁨은 성령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 이 기쁨을 찾자는 것이 저희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겁니다. 오늘 구약을 쓴 예레미아는 이렇게 한탄을 합니다.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이 언제인지 압니다.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제가 언제 돌아올지 그 때를 압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압니다. 그곳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백성은 자기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인 주님의 법규. 율법. 주님의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이냐. 예레미아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본래 주님의 율법은 훌륭하고 좋은 것이었는데 우리 서기관들이 거짓된 붓으로 율법을 왜곡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율법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질타합니다. 기쁨이 없는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오늘의 주제는 사실은 기쁨입니다. 기뻐야 합니다. 사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하늘이 기뻐야 하고 우리도 기뻐야 합니다. 슬프시려고 사십니까? 죽으려고 사십니까? 아프시려고 사십니까? 고통스러우시려고 사십니까? 아니지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 기쁨의 집이 평화의 집, 정의의 집, 그렇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어디 가서 찾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왜곡되고 잘못되어 하나님께는 기쁨이 없고 사람에게도 기쁨이 없다. 예수께서 당시 오셨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마태복음 말씀대로 봅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아, 진실로 기쁨을 찾고 싶으냐? 기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기쁨의 주인은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서 찾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된 예수. 그 예수를 찾는 것이 기쁨이고, 하늘 찾는 것이 기쁨인데 기쁨을 어디서 찾는 줄 아느냐?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실 겁니다. 내가 배고프다. 먹을 걸 좀 다오. 여기 오면 그대들은 기쁘니라. 나 좀 목마르다. 마실 것 좀 다오. 나 좀 헐벗었다. 추우니 입을 걸 좀 다오. 내가 나그네 되어 돌아다니니 내가 거할 곳 좀 다오. 나 아프다 좀 찾아와 주라. 내가 불의하게 고통당해서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 날 좀 문안 와주라. 유대 백성들은 율법이요 법조문에 쓰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은 법조문에 쓰인 율법도 있으나 본래 율법은 사람의 마음속에 쓰느니라.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니까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의 율법은 배고픈 사람 뱃속에 있느니라. 율법 준서가 뭡니까? 뱃속에서 배고픔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이 율법이면 와서 먹을 걸주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니라.

목이 마른 사람한테 와서 물 한잔 줘야 율법을 준행 하는 것이지 그거는 별도고 율법을 찾으려고 왜 글로 쓴 돌 판을 찾아다니느냐. 마지막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배고픈 자 도와주는 것이 곧 하나님을 도와주는 것이다. 언제 당신이 배고팠습니까?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논쟁이 뭐냐 하니까 배고픈 사람 속에 내가 있었느니라.

배고픈 사람의 슬픔 속에 배고픔 속에 먹을 것을 기다리는 하나님이 계셨느니라. 하나님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배고프면 배고픈 사람에 계신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계신 하나님은 얼마나 배고프겠느냐? 한 숟갈만 좀 다오. 그것도 안주면서 어디 가서 배고픈 자를 돕겠다고 찾았느냐?

오늘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유대 서기관들의 율법 해석이 정면 대치를 합니다. 율법은 쓰여 진겁니다. 돌 판에 있습니다. 법령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본래 율법은 배고픈 사람 속에 있느니라. 먹을 밥 한 그릇이 율법이니라. 밥 한 그릇만 다오. 그래서 신약에 보면 진실 된 율법은 살아있는 율법은 영으로 쓰였는데 영으로 쓰인 율법은 우리 가슴에 있고 마음에 있고 세상에 있고 가족에 있지 돌 판에 있지 않습니다.

법령으로 쓰인 율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굶주림이 낫지 않기 때문에 밥한 술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내 배고픈 자를 도와서 먹을 걸 주었더니 배고픈 자가 해맑은 웃음을 띱니다. 고맙다고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기쁨은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받았을 때 느끼는 것이 기쁨이고 배고픈 자가 환한 웃음을 웃는걸 보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기쁨이니라. 그러면 사람이 기뻤는데 하나님은 어디계시냐 하면 두 사람의 기쁨 속에 하나님이 웃고 계시느니라. 이런 율법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은 그런 율법입니다. 하나님을 어디서 찾으려 합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나란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곳에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는데 있고 기쁨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정의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는 정의다. 정의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평화는 뭐냐.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받아먹었더니 너무나 기쁩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둘이 합하여 뭐가 이루어집니까? 당신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하늘도 기쁘고 모두가 기쁘고. 그저 기쁨이 넘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디서 찾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곳 보이지 않는 곳 그러나 분명히 기쁨이 용솟음치려고 자기 둥지를 찾는 곳. 그곳에 하나님은 율법을 썼습니다.

그 율법을 신약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율법이라고 하지 말자. 복된 소식이라고 하자. 모두가 복되고 하나님도 복되고 에덴동산을 어느 특정한 샘의 지역 야벳의 지역 함의 지역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을 하나님이 계신 모든 곳에서 찾자. 하나님의 나라에 장소를 묻지 말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질이 어딘가를 찾자.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을 제가 누릴 수 있으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자하는 모든 사람들한테 여기저기 하나님 나라를 찾지 말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그 말의 본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 된 기쁨이 창출되는 곳이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숨어계신 방법으로 계십니다. 이젠 하나님 나라의 장소를 찾는데 너무 노력을 기울이지 맙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곳으로 좀 찾아가 보십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두가 다 기쁨으로 창출되는 곳으로 찾아가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계시는데 절대로 보이는 방법이 아니고 안보이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 숨어계시지만 반듯이 있는 하나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랄수가 있느냐.

우리가 희망하는 곳, 바라는 곳, 기대하는 곳, 그곳은 일상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있는 곳. 그곳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나라라 이름 합니다. 우리 보이는 것 가지고 너무 고생하지 마십시다. 안 보이는 것을 소망해야 진실 된 소망이지 그런데 그 소망은 반듯이 찾아지고 맛봐지고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왜 잊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좀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말씀이 가난한 자한테 가봐라.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고통 속에 가봐라.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가봐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느니라.

찾아봐라. 반듯이 그러면 기쁨이 우리한테 창출될 것입니다. 사실은 배고픈 사람을 도와주고 먹을 걸주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걸 통해서 기쁨이 용솟아야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진실로 기쁨이 뭔지 우리 기쁘게 한번 살아봅시다. 기쁨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식도 아니고 아주 작은 일상의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계가 넓어지고 아이티 산업을 얘기하고 모든 이런 문명의 와중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일상생활에서의 일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을 모르고 크고 넓고 힘든 것만 자꾸 찾아갑니다. 이제 우리보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큰 문명의 틀에도 계시지만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속에도 하나님은 있습니다.

오늘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말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피조물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에는 죽고 마는데요. 죽고 마는 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허무에 복종했습니다. 인생의 유한성입니다. 그러나 복종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생명이 끝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여러분에게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면 영광된 자유의 나라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겁니다. 영광된 자유의 나라는 죽음 이후에 올 무한대의 세계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다시 가장 힘들고 약하고 지금 맘이 아파서 굶주리고 아파서 지금 슬퍼하고 있는 곳에 가면 영광된 자유의 주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번 경험해 보시지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크고 넓게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지난 몇 주 전에 종교지도자들이 모여서 이 땅에 평화를 추구하는 일이 뭐냐 하는 토론회가 있어서 제가 사회를 본 일이 있는데 그때 한국에 있는 이슬람의 이맘이라는 분이 오셔서 이런 얘기를 합디다.

아프간 사태 때문에 자기가 노력해서 탈레반 사람들을 만났더니 탈레반들이 하는 말 중에 아프간에 와서 기독교 선교를 하는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한국이 와서 선교를 한 것은 총칼 없는 침략자들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 총과 칼만 들고 오지 않았지 우리나라를 침투한 사람한테 우리가 어떻게 자선을 베풀라는 말입니까?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이슬람 백성과 함께 나누고 싶으면 총칼 없는 침략자 아니 구요 오늘 말씀대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게 해주는 일. 그냥 배고프면 도와주고 목마르다면 물 좀 주시구요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기뻐하고 내가 기뻐하면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자기 방식대로 기쁨을 누리면서 자기 나라를 자기 방식대로 이루어 질 겁니다.

말을 바꾸면 한국에서 온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이분. 하나님 나라 가십시다. 그런데 목마른 자에게 물 한번 주지 않습디다. 총칼 없는 침략자들. 그 말이 사실 듣자마자 섬뜩합니다. 혹시 이슬람이 아니라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은 자에게 가서 도와줄 때 밥 한술 없이 물 한 그릇 없이 옷 하나 없이 하나님 믿으세요.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총칼 없는 위선자들. 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오늘 하나님이 우리한테 분명히 계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찾고 싶다. 나 좀 만나주라. 세계 곳곳에 있는 가장 비참한 곳들 어려운 곳들 우리 일상에 있는 작은 것들 속에 하나님은 계셔서 우릴 찾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큰지 너무 교만한지 우리가 자꾸 지나쳐 버리고 우리가 일상을 떠난 특이한 상황만 우리가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인자란 말은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할 때 심판자를 가리킬 때 인자란 말을 썼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를 표현할 때 인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뜻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그 말에 가장 기본적인 컨셉트는 심판자, 우리에게 복을 주실 자. 그리고 희망의 주인으로 오실 자. 그분을 표현할 때 인자. 그랬습니다. 인자를 기대하십니까? 메시아를 찾습니까?

가장 작고 험난하고 아쉽고 우리 주변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밥 한 숟가락을 원하는 곳. 물 한잔을 원하는 그곳에 가서 거기다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진실을 담아서 주면 기쁨이 용솟음칩니다.

이 날을 저희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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