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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자손이 얻은 기업 (수 16:1 - 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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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자손이 얻은 기업 (수 16:1 - 수 17:18)

  예로부터 '부자(富者)'는 실제로는 부러움을 받으면서도 겉으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듯이, 흥부의 착한 마음에 감동을 받고 놀부의 못된 심보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어느 역사 선생님께서 이 흥부전을 전혀 색다른 각도로 비평을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흥부가 마음씨 좋은 것은 물론 인정하고 또 본받아야 할 일임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들만 주렁주렁 많이 낳아서 가계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은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그 선생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놀부로 말하자면, 이 또한 그 나쁜 성격은 당연히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그렇게 능력 없고 게으른 동생이 매일같이 구걸하러 오면 세상의 그 어떤 형이 끝없이 도와줄 수 있겠으며, 같은 의미에서 볼 때 놀부의 아내가 그런 못난 서방님 정신 좀 차리라고 밥주걱으로 뺨 한 대 친 것도 몽둥이로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것 아니냐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흥부전에 대한 그 선생님의 '현대적이고도 실용적인 해석'에 꽤 충격을 받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고 부자는 나쁜 사람'이라는 옛날이야기들의 기본공식에 잠재되어 있는 선입견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었습니다.
  그처럼 '부자는 무조건 나쁘다'라는 선입견은 자본주의와 자유경제체제에 익숙해진 오늘날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일반적인 심리를 부채질하여 대중을 선동함으로써 권력 장악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명백하게 가르쳐 줍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지(딤전 6:10)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 자체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 자에게 내려 주시는 대표적인 복이 바로 '부귀와 장구한 재물'이라고(잠 8:18) 곳곳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 중에서 요셉 지파가 바로 그런 물질 축복의 대명사가 된 '부자 지파'였습니다.
  본문 16장 1절에 "1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이라고 시작되어 "4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고 4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각 지파별로 땅 분배를 받는 과정에서 요셉 자손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얻게 된 기업에 대한 내용입니다.
  원래는 '요셉 지파' 하나였던 것이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누어진 것은, 옛날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라고, 이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정식으로 한 지파가 될 것이라고 축복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2007회계연도를 결산하는 주일을 맞이하여 이처럼 '요셉 자손이 얻은 기업'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본문을 통하여 상고함으로써,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런 '요셉의 기업'을 받는 성도가 왜 필요한지 그 '목적'과 또한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요셉의 기업'을 받고자 하는 목적은 교회를 물질적으로 힘 있게 섬기는 리더로 쓰이기 위함입니다.

  16장 5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5에브라임 자손의 그 가족대로 얻은 것의 경계는 이러하니라 그 기업의 경계는 동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 호론에 이르고 6또 서편으로 나아가 북편 믹므다에 이르고 동편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 야노아 동편을 지나고 7야노아에서부터 아다롯과 나아라로 내려가서 여리고에 미치며 요단으로 나아가고 8또 답부아에서부터 서편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미치나니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이 이러하였고 9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별한 모든 성읍과 촌락도 있었더라 10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자손 중에서도 므낫세 지파보다 에브라임 지파가 먼저 기업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48장 20절에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는 땅 분배도 므낫세 지파보다 먼저 받았고 또 그 위치도 더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지역은 가나안 땅의 중앙부에 해당되며 동쪽으로는 요단강까지,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미치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또한 남쪽과 북쪽으로 여러 다른 지파들과 연접해 있어서 교통의 요지에도 해당되었고 또한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에도 바깥쪽의 지파들이 절로 완충을 해 줄 수 있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9절에 나온 대로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별한 모든 성읍과 촌락" 즉 원래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된 땅 중에서도 에브라임 지파에게 나누어준 기업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두 지파로 나누어지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요셉 자손'임을 확인하는 동맹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런 이유들로 해서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 자손들 중에서도 므낫세 지파보다 더 강력한 지파로 자라났고 나중에는 북조 지파들 중에서 단연 리더가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17장 1상반절에 "1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 이러하니라"고 시작되면서 그 이하 6절까지 "5요단 동편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으니 6므낫세의 여손들이 그 남 자손 중에서 기업을 얻은 까닭이었으며 길르앗 땅은 므낫세의 남은 자손에게 속하였더라"라고 기록된 내용에서는 원래 "요셉의 장자이었던"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요단강 동쪽의 땅을 받은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또 다시 "7므낫세의 경계는 아셀에서부터 세겜 앞 믹므닷에 미치고 우편으로 가서 엔답부아 거민의 땅에 이르나니"라고 시작되어 1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나머지 '므낫세 반 지파' 즉 요단강 서쪽의 땅을 받은 종족들의 기업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과 북동쪽 방향으로 요단강의 동서 양쪽에 걸친 방대한 지역을 분배 받았으며 땅 넓이만으로 본다면 에브라임 지파보다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므낫세 지파에서는 여자들에게도 땅을 나누어줄 수 있는 여유까지 가질 수 있었습니다.
  17장 3절부터 5절 말씀에 보면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에게도 기업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은 민수기 27장 1절부터 11절의 말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사건인데, 슬로브핫은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문에는 땅 분배를 받을 상속권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는데, 그 다섯 딸들이 모세에게 청원을 해서 결국은 그녀들도 "남(남자) 자손"의 기업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새로운 관례로 제정되기까지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그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에게 "요단강 동편 길르앗과 바산 외에" 즉 요단강 서편의 므낫세 반 지파에 속한 "열 분깃"의 기업 중에서 특별히 '다섯 분깃'이 배당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 자손의 지파들은 땅 분배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축복을 누리게 됨으로써 절로 이스라엘의 지파들 중에서도 유력하고도 선도적인 지파가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야곱의 '혈통적인 장자'는 르우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르우벤은 자기 서모와 통간함으로써 장자의 권위를 상실했고, 그 대신에 유다가 '영적 장자'가 되었으며 이 요셉 지파는 '물권적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유다 지파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으며, 반면에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물질적으로 형제 지파들을 도우며 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49장 22절에서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예언되었던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네 지파 내의 자체 조달에 부족함이 없는 '무성한 가지'였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이제 다른 형제 지파들에게도 도움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담을 넘는 가지'도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요셉 자신부터가 그런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됨으로써 물질과 명예 둘 다 최상으로 누렸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받은 축복으로써 자기 아버지를 크게 봉양할 수 있었고 자기 형제들까지 다 살려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로 이런 '요셉의 기업'으로 성도를 돕고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신자들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교회는 일단 '유다의 장자권' 즉 목사의 영적 리더십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교회의 재정까지 다 맡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목사의 직분이 애초에 돈 많이 벌어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하라고 주어진 직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목사의 설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현실적으로 물질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자체 내에서 기본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경상비가 있어야 하며 또한 밖으로 나누어주는 구제와 전도와 선교 사업도 돈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요셉의 물권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람이 꼭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목사가 아니라 바로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교회의 직분자 된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장로 피택 후보자들과 면담을 하게 될 때 이 두 가지를 철저히 확인합니다.
  그 첫째는, 장로 직분이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듯이 '목사의 권위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하게 '성경중심'으로만 나아가야 하고 그런 까닭에 '말씀을 맡은 장로'인 목사의 리더십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장로는 바로 그런 목사의 영적 권위를 그 누구보다도 존중하며 보좌해 주는 '아론과 훌'이 되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처럼 목사의 사역을 잘 돕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헌금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장로가 헌금의 정성과 능력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으로 교회에 힘이 되며 어떻게 교인들에게 덕이 되겠다는 것이겠습니까?
  흔히 '신앙만 좋으면'이라는 말을 하는데, 신앙 좋다는 것은 사실상 장로만의 특별한 자격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다 가져야 할 자격입니다.
  교회에 구체적으로 봉사하고 힘 있게 충성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이 그저 '신앙만 좋은 장로'를 세워 놓고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 '신앙 좋은 장로'로 하여금 '신앙 부족한 목사'를 신앙적으로 지도하고 견제하겠다는 것이라면, 아예 그 목사는 당장 사면을 내어야 마땅하고 그 장로가 목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신앙 좋은 장로'를 세워 놓고 모든 교인들이 그 신앙을 본받을 수 있는 '역할 모델'로 삼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성자니 성녀니 하고 사람을 섬기는 천주교의 인본주의적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경향교회는 지난 삼십 수 년 동안 바로 이처럼 '물권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장로님들이 자신의 책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온 까닭에 강단을 통하여 선포되는 '주의 말씀 역시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큰 부흥을 이룬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도 문관도 있어야 하고 무관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조직이든지 간에 '브레인(brain)'과 '파워(power)' 이 둘은 항상 같이 있어야지 둘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역시 목사의 영적 리더십이 제대로 부흥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힘이 뒷받침해 주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특히 장로와 집사들은 물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또한 그런 물권을 바로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9절에서도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 크게, 더 힘 있게 쓰여야 하겠다는 이 멋진 목적을 바로 세움으로써 '무성하여 담을 넘는 가지'가 되는 요셉 기업의 큰 상속권을 약속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셉의 기업'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받은 것에서부터 계속 개척하고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17장 12절과 13절 말씀에 "12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13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땅 분배에 있어서 특권적인 축복을 받았던 요셉 자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바로 자기네에게 할당된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던 가나안 민족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16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이 "철병거"를 가졌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이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본토 정복전이 시작될 때에는 제일 선두부대에서 함께 싸웠던 지파였습니다(수 4:12).
  하지만 이 시점에 와서는 그냥 지금까지 정복하고 분배 받게 된 땅에 안주하면서 더 이상은 너무 힘들다고 포기상태에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 쪽에서 이렇게 정복 의욕이 사라져 버리니까 반대로 그 지역의 가나안 사람들은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의지에서부터 벌써 밀리게 되니까 저쪽에서는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자기네 땅을 사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지역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즉 다윗과 솔로몬 때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이스라엘 영토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요셉 자손들이 영적 긴장이 풀리고 전투 의식이 해이해진 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4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15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16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17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요셉 자손은 여기서 스스로 "큰 민족"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듯이 사실 이 두 지파를 합치면 수적으로도 가장 큰 지파였고 그 많은 식솔들을 먹여 살리자면 자연히 큰 땅이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까 보았듯이 이 요셉 자손들은 제비는 한 분깃을 뽑았지만 지역적으로는 가장 넓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또한 다른 지파와 '인구 대 땅 넓이'의 비율로 비교해 볼 때에도 가장 넉넉한 기업을 이미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받은 것이 불공평하다고 여호수아에게 불만을 제기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부당한 요구에 여호수아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만약 더 필요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이제부터는 어디까지나 요셉 자손 자신의 의무라고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너희들에게 배당된 땅이 너무 좁다면 스스로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동서쪽에 접경해 있는 지역을 가리키며, "개척하라"는 말은 '잘라내라'는 뜻입니다.
  즉 농사짓기 어려운 산지라도 벌목하고 개간해서 쓸 수 있는 땅으로 만들라는 뜻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자손들은 그 지역에 사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라고 또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너희들은 이미 큰 민족이요 큰 힘이 있는 지파이니 비록 그들이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하고 독려했습니다.
  '한 분깃만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면 당연히 더 큰 분깃을 얻기 위한 목표를 세워야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무리 '황무지'이고 '강한 거민'이고 간에 자기가 받을 축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개척하고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이만큼은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할 줄 압니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한지는 다 알고 있으며, 교회 중심으로 선한 사업에 더 충성하고 받은 직분을 위하여 더 힘 있게 섬기기 위해서는 지금 받은 기업만 가지고서는 아직 '좁다'는 것은 다 계산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내게 한 분깃만 주시면 어쩝니까?"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만 하기 일쑤입니다.
  그저 이것저것 필요한 것은 많은데 받은 것은 적다고 안달하고 발만 구르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시는 축복'만을 기다려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요셉 지파에게도 그런 식으로 복을 내려 주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삼림'인데도 내가 여태껏 개척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아야 합니다.
  알기는 알지만 힘들 것이라고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전혀 도전할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있던 '산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3D 직종 기피' 따위의 망상은 당장 벗어버리고 지금 얻을 수 있는 직장,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기업'부터 일단 개척을 해야 합니다.
  왜 지금 우리나라에 실업률은 이렇게 높은데 노동인력은 오히려 외국에서 수입해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도 미국에서 신학교 공부하는 동안 소위 '최저 월급'(minimum wage)을 받는 일들은 거의 종류대로 다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불만스럽거나 부끄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작은 동네에서 특별한 재주도 없는 제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고, 또 신문배달이든지 세탁소 일이든지 청소부든지 누구보다도 잘 했고 더 빨리 해내었고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보람되고 재미있게 했었습니다.

  주식 투자를 잘못했다가 12억 원의 전 재산을 날리고 IMF 때 실직까지 하게 되었던 김민영 씨가 어느 기독교 라디오에 나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그처럼 빈털터리 때에 호떡 장사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김민영 왕호떡' 프랜차이즈가 되어서 120개 이상의 가맹점들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번듯한 직장을 그만 두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보는 눈이나 또 본인의 기분도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 호떡을 팔면서 온갖 아이디어들과 최고의 서비스를 계속 시도하고 노력함으로써 결국 그런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고 개척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큰 것을 '정복하는' 결과가 주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기업이 바로 내 곁에, 내 눈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발견하지도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어디서 복덩어리 굴러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지금 있는 '좁은 산지'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잠언 14장 24절에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라고 했으며 11장 16절에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가진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는 사람은 책상 앞에서 말만 잘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 재물이라는 자랑스러운 결과를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사람이며, 그런 축복은 머리만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뛰면서 근면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현재 있는 것에 안주하거나 지금까지 받은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네가 개척하라'는 말씀대로 노력하고 나아감으로써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는 요셉 기업의 축복을 남김없이 정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최근에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금융기업가가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아름다운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납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정말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도대체 돈이 왜 더럽습니까?
  돈을 더럽게 버는 것이 더럽고 돈을 더럽게 쓰는 것이 더럽지 돈 자체는 결코 더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재물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회가 돈이 돌아감으로써 유지되게 만들어 놓으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사업에도 바로 그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너희가 성소에 드릴 예물을 가져오라'고, '복음을 위하여 쓸 것을 보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자'로서 성공하는 것은 무슨 위대한 정치가로서 명성을 남긴다든지 고명한 학자로서의 위업을 쌓는다든지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훌륭한 업적이며 존경받아 마땅한 성취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어서 부모님 최고로 잘 봉양해 드려야지." - 이것이 불효한 생각입니까?
  "내가 꼭 성공해서 이렇게 눈물겹게 뒷바라지해 주는 아내를 좀 편히 살게 해 주어야지." - 이것이 유치한 욕심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경향교회에서 제일 헌금 많이 바치는 장로가 되어야지." - 이런 꿈이 도대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는 것은 정말 멋진 각오이며 너무나도 고귀한 목표인 것입니다.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참 신기한 말씀 아닙니까?
  진정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재물을 더럽게 여기고 회피하는' 자기 아니라 '재물을 보응으로 얻게 되는' 자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자신의 기업을 확장하며 용기를 내어서 물질축복의 장막터를 계속 넓히는 자에게만 '재물 얻을 능'을 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요셉 자손을 축복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금년의 남은 날들과 앞으로의 평생을 통하여 이미 베풀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계속 개척하고 정복해 나감으로써 물질적으로 '열 고을의 권세'를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더욱 크고 힘 있고 영광스럽게 쓰이는 '요셉 자손의 기업'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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