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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7) : 장애물(6) - 불평↔감사 (민 14: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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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7) : 장애물(6) - 불평↔감사 (민 14:26-38)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
서양 속담에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행복이 들어오고 불평할 때 행복이 나간다는 말이지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고 선 여섯 번째 장애물은 불평입니다. 불평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항상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어떤 기분이십니까? 좀 짜증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달리 항상 감사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만날 때마다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불평할 때 행복은 달아납니다. 감사할 때 행복은 찾아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해줄수록 양양이라는 말이 있지요. 잘해줄수록 더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더 바라고 더 탓합니다. 제가 교회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중부연회 원로 장로님들을 초청해서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대접을 잘해드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몇 분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불평이 대단했습니다. 대(大)교회가 대접이 그게 뭐냐는 힐난이었습니다. 옆에 교회는 최고급 식사 대접에다가 용돈까지 주었는데 모교회라는 교회는 대접이 너무 소홀했다는 원망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대접해드린 것만 해도 잘했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른 교회와 비교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국제적인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의 창시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박사는 "인류의 첫 번째 불행은 감사의 결핍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지만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지만 한 가지 갖지 못한 금단의 열매 선악과에 욕심을 부리다가 타락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눅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 말씀을 듣고 올라가는 도중에 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후가 문제였습니다. 9명은 다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기들의 병을 낫게 해주신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님과 인종적으로 원수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 하나만 돌아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여간해서 서운함을 잘 나타내지 않으시던 예수님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눅 17: 17). 꼭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과분한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를 잊고 사는 우리가 아닙니까? 감사할 조건과 이유가 넘쳐나는데 원망과 불평을 앞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광야가 거칠고 메마른, 고통의 땅이었지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척척 다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했던 까닭은?>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서 살펴보라고 했더니만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거기 가나안 땅은 험하기 짝이 없는 요새로서 난공불락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거기 사는 거민들은 키가 얼마나 큰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처럼 왜소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기 들어갔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멸 당할 것이라는 보고였습니다.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10대 2로 할 수 없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봇물처럼 일제히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민 14: 1-4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차라리 애굽땅이나 아니면, 여기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둘 것이지 왜 우리를 이곳까지 끌고 와 칼에 맞아 죽게 만드냐는 푸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자녀들은 다 가나안 사람들의 포로로 사로잡힐 것이라고 원망합니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우두머리를 세워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와 같이 과분한 은혜와 축복을 받고서도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입니다. 27절을 보세요.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여기 보세요. 이 한 절에 원망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에 대한 징벌을 주시는데 너무나 무섭습니다.

29-35절을 보세요. 첫째로, "스무 살이 넘은 사람으로, 인구조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 곧 하나님을 원망한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입니다(29절). 둘째로,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30절). 셋째로, 가나안 땅에 포로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한탄했던 자녀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31절). 넷째로, 스무 살 이상된 사람들은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 것이며, 그 자식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며 부모가 저지른 죄악을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32-33절). 그런데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해야만 하는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탐지한 날수가 40일인데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33절).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안선을 따라 지름길을 택할 경우 사흘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광야에서 장장 40년 동안을 배회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신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감사를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하는 백성이 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가 광야생활이었던 것이지요.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
이제 중요한게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불평하는 것이 버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서 감사하는 것도 버릇이라는 말입니다. 민수기를 불평의 책이라고 말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사사건건(事事件件) 불평합니다. 바로 엊그제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와도 즉각 불평합니다. 불평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버릇은 참 끈질깁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것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습관입니다. 감사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아직 버릇이 형성되기 전, 마음이 백지 상태인 어린 아잇적부터 감사하는 버릇을 길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이 입술에 감사가 없습니다. 항상 원망과 불평이 떠나지 않습니다. 큰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를 모릅니다. 더 내놓으라고 욕심을 부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감사도 버릇임을 기억하세요. 서양 사람들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상 "Thank You!"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가르칩니다. 감사가 몸에 배였습니다. 우리도 감사가 버릇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버릇이 얼마나 무서운지 어거스틴은 '습관의 폭력'이라는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고백록」에 보면 어거스틴이 부모 몰래 여자를 하나 알아서 13년 동안 동거합니다. 아데오다투스라는 사생아까지 얻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신분이 낮은 여자와 동거하는 아들이 보기 싫어서 집에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 아들의 출세에 지장이 된다고 해서 동거녀를 쫓아 보냈습니다. 그런 후 10세 된 로마 제국의 고관의 딸과 약혼을 시킵니다. 그 당시 혼인법으로 여자가 12세가 되면 정식 결혼을 올릴 수가 있었기에 어거스틴은 2년만 더 참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2년을 참지 못해서 또 한 여자와 동거를 합니다. 어거스틴은 육체적 쾌락이라는 버릇을 끊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고민을 합니다. 그야말로 정욕이라는 습관의 노예가 된 자신을 바라보며 괴로워한 것이지요.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감사가 입술에서 그치지 않아야 함에도 항상 불평합니다. 남을 원망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버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버릇이 고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믿고 주님께 간구하면 불평하는 버릇이 감사하는 버릇으로 바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믿음이 없으니 불평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섭리론 적인 신앙이 없기 때문에 항상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조금만 좋은 일이 생기면 "헤∼" 했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낙심하고 불평합니다. 내 삶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요셉을 생각해보세요. 17세의 어린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성추행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산전 수전 다 겪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한 번도 불평했다는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누구를 원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불평거리, 원망거리가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쳤는데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사하기를 원합니까? 내 삶의 열쇠를 내가 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쥐고 계심을 인정하십시오. 사방에 벌건 바윗돌과 사막만 보이는 광야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불평하고 원망한 이유도 그 근본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 불신앙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할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미래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불평합니다.
꿈, 즉 비전이 없는 사람은 감사를 모릅니다. 지금 가나안 땅은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험악한 요새가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들 역시 사납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뚜기 같다는 말은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현재는 참 어렵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미래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미래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민 14: 7-8에서 두 사람은 외칩니다. "가나안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미래에 대한 꿈과 확신만 있으면 오늘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난의 재를 통하여 영광의 화관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89장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는 가사도 있듯이 여러분이 그동안 받은 복을 세어보세요. 아마 감사할 조건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영어로 "감사한다"는 말은 "Thank"고, "생각한다는 말은 "Think"입니다. 어근이 같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차분히 여러분이 받은 복을 생각해보세요.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생각해보니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감사할 때마다 행복이 찾아옵니다. 불평할 때마다 행복이 사라집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을 굳게 붙드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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