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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와 복음 증거 (골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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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가정과 직장에서 보냅니다. 그래서 이 두 영역이 우리들의 첫 번째 선교 지역입니다. 그런데 가정과 직장에서는 복음을 증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생활권에서는 옛 본성과 세속의 영향들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론 기도와 복음 증거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가정과 직장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가지만 그렇다고 앞 절들에서 주어진 교훈들과 무관하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인간들에게 하는 복음 증거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과외로 붙은 것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 이중적 소명을 적당히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 소명은 우리들의 삶을 채워야 하며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언제나 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섬기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든 간접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든 우리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모든 힘과 시간과 재능을 다 바쳐야 합니다.

 기도

바울은 먼저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을 주고 그 다음 구체적인 중보 기도를 언급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 여기 기도의 3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즉, 기도는 꾸준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기도의 지속성은 응답을 받을 때까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청하는 뜻이 아닙니다. 가끔 그런 조언이 있기는 하지만(누가18:1-8) 여기서는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도 썼듯이 기도에 매달려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머리에서 가끔씩 떠올리는 생각이나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실패될 때 사용하는 최후의 비상 대책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자연적인 반사작용처럼 일종의 자동적인 반응으로 나와야 합니다. 마치 호흡처럼 쉬지 않고 날마다 드리는 영구적인 습성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갖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절실하면 할수록 그만큼 기도의 횟수도 많고 오랫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들의 생명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이 기도의 채널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를 보다 풍성하게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호흡이 생명으로 유지되고 생명이 호흡으로 갱신되듯이. 기도도 하나님과의 교통에 의존하고 이 교통은 또한 기도에 의존합니다. 기도와 신자 생활, 그리고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모두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습관에는 위험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습관이라도 예외없이 내재적인 위험성이 있는데 기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기계적이며 활력이 없고 냉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깨어 있으라’는 의미 깊은 말을 덧붙였습니다(4:2). 이 구절은 ‘기도하는 동안에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볼 수 있고 혹은 ‘기도를 통해서 깨어 있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기도가 단어의 나열이나 공허한 어구들의 연결이나 혹은 공식적이고 기계적인 문장의 유희에 그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1 아마 우리들은 마음에도 없는 생명 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기도를’드려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메마른 형식적 언어의 배출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지속적인 기도를 깨어서 드려야 합니다. 기도할 때 무기력하지 말고 기도의 힘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끝으로 기도는 감사에 차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본 서신에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1:12 ; 2:7 ; 3:15,17).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기도는 감사에 이르는 기도입니다. 감사는 기도의 생활에서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들 편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수단이며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들의 길을 비쳐주고 우리를 인도하며 위로하십니다. 기도는 흔히 생각하듯이 일방 통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도를 통해서 그분에게 드리는 말씀보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실 말씀을 더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이 기도의 통신을 통해서 한 걸음씩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 행복의 한 요소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찬 생활은 감사의 생활입니다. 자그만한 일들까지도 찬송의 대상이 되는 것이 기도생활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습관은 감사의 습관으로 연결됩니다. 기도는 삶을 변화시키고 얼굴을 밝게 해 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기도를 드려야 할 일들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기도 제목을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4:3)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동역자들(아마 디모데와 에바브라)을 위해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흔히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기도의 지원이 필요치 않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목회자들은 영적을 강건해서 항상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는 입장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도 그이 제자들의 기도가 필요하였습니다(마26:38). 그렇다면 연약한 그의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목회자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더 자주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평상 직무에 더 노출되어 있고 피곤, 무기력, 좌절, 긴장 기타 온갖 종류의 유혹에 끌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골로새 교인들에게 간청하였습니다. 바울은 특히 두 가지 기도 제목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복음이 선포될 수 있는 기회를 구하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런 기회들을 바울이 잘 선용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때에는 가능할 수 없는 감옥 속에서의 복음 전파를 소원하였습니다. 어떤이들은 바울이 감방문이 열리게 해 달라는 뜻에서 기도의 부탁을 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요청은 그것이 아니고,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에서 기회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려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도는 자연스럽게 복음 증거와 연결됩니다. 바울이 다음 부분에서 다루는 주제도 전도입니다.

 전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인간들과의 교제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과의 사적인 대화 속에다 차단시키지 않고 언제나 세상 밖으로 내보내게 합니다. 기도는 전도로 발전되고 전도는 기도로 환원됩니다. 기도와 전도는 균형잡힌 영적 생활의 양면이며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두 측면입니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4:5,6)

여기서 우리는 복음 증거(전도)가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교회에 아직 속하지 않은 사람들(‘외인’)을 접근하는 자세와 전도에 대한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복음의 한 특징입니다. 복음은 각 교인들의 독특한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생명은 판에 박힌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한 성령이라도 그 표현은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드러납니다(고전12:4-13). 복음은 이 세상의 필요에 응답을 해 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구체적인 필요도 채워줍니다.

 그런데 대답이란 질문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외인’(불신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상의 동기나 목적이나 표준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교인들의 ‘색다른 생활 방식’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참되고 맑은 교인 생활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인생살이를 생각케 하고 또 질문을 던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처신을 강조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해하여’ 우리들이 불신자들을 대하는 처신에 따라 복음 증거의 길이 자연스럽게 열릴 수도 있고 아예 닫혀버릴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확실히 가장 좋은 설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혜를 강조한 것은 매우 옳습니다! 얼마나 많은 ‘거룩한’생활들이 ‘바깥’에서 진리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였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흠없는’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의’만 따지고 사랑에 찬 지혜가 없이 살아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을 이 세상과 분리시켜 주는 거룩은 오히려 이 세상과의 모든 접촉으로부터 교인을 격리시킴으로써 복음 증거가 불가능하게 합니다.

 지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하는 생활의 한 품격입니다.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약3:17).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처신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거룩과 맑은 양심이 양순함과 존경심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함으로써 지혜의 중요성을 역설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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