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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너라!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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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 다.

이 사건은 단지 나사로 개인만을 살리는 것으로 그치는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 를 염두에 두신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갈을 받고 나사로 에게로 가면서 '나사로에게로 가자' 혹은 '베다니로 가자!'고 해야 자연스러울 말 을 굳이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무지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 씀을 알아 듣지 못하고 도리어 돌을 들어 죽일려고 꾀하던 무리들이 있는 유대로 다시 가자는 뜻입니다. 왜 유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합니까 이미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자들로서 시체가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자들이기 때문 입니다. 바로 그같은 죽은 자들을 살리러 가자 라는 의미에서 유대로 가자고 하신 것읍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끝까지는 이제 인생을 구원하러 오신 그 목적을 이루 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17절에 있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는 말은 원어 성경에는 나사로라는 말로 되어 있지 않고 '그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에 등장하는 나사로는 우리 모두 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요한복음 1장-11장 까지의 내용이 다시 한번 강조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인생들은 마치 죽은 시체들과 같아서 아무리 진리와 생명에 관 한 말씀을 들려 주어도 그것을 알아 듣고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되며 도 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돌을 드는 자들일 뿐이라는 내용이 강조되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겔37:1-10절을 보시면 이에 대한 아주 상징적인 이야 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꼴자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여기 이 기록은 나사로의 경우보다도 더 심합니다. 나사로의 경우는 죽은 지 나흘 이 되어 냄새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뼈들은 냄새날 것도 이젠 없어졌고 뼈만 남았고, 그것도 다 흩어져 있었 습니다. 그러니까 뼈가지도 어느 정도는 썩어 문드러진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들을 살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립니까 뼈와 뼈들이 접합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깁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던가요 결 정적으로 이 죽었던 시체들이 살아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거는 '생 기'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뼈가 있고 살이 있고 힘줄이 있습니 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히 인간의 존재의 한 일부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지 않는 한은 그 는 시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신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19:23-25절을 보십시다.

"예수게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 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여러분 이 말씀이 부자가 가난해 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런 대목이 아닙니다. 부자란 여기 서 힘있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실력있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19:26절에서;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수 있느니라" 성경이 지적하는 복음과 복음을 필요로 하는 대상인 인간에 대한 지적들을 우리는 아주 자세히 그리고 철저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너무도 부수적인 것에 촛점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잘된다고 하는 데에 너무 많이 우리의 촛점이 찍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되며, 복받는다는 복의 개념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 면 복을 받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받게 되는 복 중에 서 우리에게 쉽게 감동을 주는 복에만 자꾸 시선이 머물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 리가 충분히 감지할 만한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하므로 훨씬 더 중요한 축복들을 놓 치기 일쑤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야기 하는 참 축복은 영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물질 세계에 관한 축복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것이 더 핵심이냐 하는 문 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지하는 축복들은 대개 손에 답히는 물질세계 에 관한 축복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에 대한 지나친 우리의 집착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축복들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부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부자가 갖는 권세나 힘이나 실력이나 어 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생명을 만들어 내거나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으로 뼈를 맞추고 힘줄이 있게 하고 살이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자리가 거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6:63절에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결국 세상 사람들, 즉 불신자들과 우리가 대화할 때에 서로 이야기가 안 되는 가 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쪽은 눈에 보이는 물건 밖에 없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초점이 틀리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 한복음의 제 2부를 여시면서 죽은 시체가 된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등장하시는 것입 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었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는 지를 보 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까지의 전반부에서는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빛 을 근거로 증명을 했습니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우리 인생들은 늘 소경이었기 때문에 그 빛을 보지도 못했고, 비추는 것을 아무리 밝혀도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우리는 그것을 감지한다거나 분 별하여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까지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어떤 기적과 사건을 동원하시고 진리와 생명과 복음을 제시해도 반응하 거나 선택할 수 없었더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어 시체가 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했을 때 '예!' 하고 대답하면서 나왔다면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사로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쫓아 나왔더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님게서 나사로를 향하여 말씀하고 꺼집어 낸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나사로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은 보통 인간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절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슴ㅂ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 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 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말씀이 생명과 빛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설명하는 것 중에서 만 물이 이 말씀을 말미암지 않고는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 니다. 여기서 말씀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향하여 하신 그 말씀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능력이 지금 재창조에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하셨을 때, 나사로를 붙잡고 있 던 사망의 줄이 그를 놓아 줄 수 밖에 없었고, 죽었던 한 영혼이 새로이 탄생해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거듭난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새로운 재창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작업이지 고치는 작업이 아닙니다. 나 사로 사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면 죽었던 우리를 새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새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인 것입니다. 옛날과 같은 사람이 아닙 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우 리가 갖고 있는 권세들과 우리가 갖고 있는 약속들과 우리가 지금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음 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ㅕ기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하나의 시각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꾸만 이런 식으로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이 런 축복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행복해 진다 하는 손에 잡히는 것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으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었이며, 그가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가 누구시냐 하는 데에 우리의 시선을 궁극적으로 고정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시기에 시체 앞에서 시체를 향하여 '나 오너라!'고 그랬더니 시체가 살아서 나올 수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시기에 죽은 자의 영혼을 만들어 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죽음이 동석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가 있는 곳에서 도망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제 그 한 예를 들어 보십시 다. 눅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7:11-15 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 문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 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 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시고 가가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더라" 이렇게 죽음과 예수님이 동석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죽음이 그리스도 앞에 서 도망을 갑니다. 이것은 가장 조그마한 사건입니다. 이제 하나 더 나가 막 5장으 로 가 봅시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을 고치러 갑니다.

막5:39절에;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러자 저희가 비웃습니다. 막5:41-42절을 보시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 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이때의 사건을 더 크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소녀가 죽었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이 와서 곡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들어 가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소리를 듣고 죽음이 아이를 놔 두고 도망가 버린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같은 사건이 막5:25부터 부면 조금 더 확데된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 야이로의 딸 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도 나을 것 같아서 예수님이 지나갈 때 와서 붙잡습니다. 막5:27-30절을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슴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거입니다. 그로부터 생명이 연결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이 자꾸만 예수를 믿어서 생긴 부수적인 결과들에 끌려가고 있 습니다. 이 부수적인 결과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기독교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이런 질병이 깨끗이 나았더라는 식의 부 수적인 것들만을 추구할 때에 우리의 신앙이 마치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양 생각 하므로 신앙인들이 자신의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자꾸 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사실에 모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이 예수 님의 십자가에 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요19:31-33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달라 하 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목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 수게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달린 셋 중에서 누가 제일 먼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먼저 죽었습 니다. 이 내용으로 볼 때에 예수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다른 둘도 죽을 수가 있 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원래 십자가 형이라는 것은 일찍 죽지 않게 하는 형벌입니다. 고통을 오래 연장시키기 위해서 만든 형벌이 십자가인데 왜 이때에는 다리를 꺽어서 일찍 죽였느냐 하면 이스라엘 법에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가장 저주 받은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가장 저주받은 자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회법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오면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 문에 부정한 것인 시체나 나무에 달려 있는 것들을 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서 원래 십자가는 달아서 오래 두어야 하는 것인데, 다음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 바로 전날 십자가 처형을 행하였으므로 미리 죽이고 끌어 내고자 한 것입니 다. 강도 둘은 다리를 꺽어서 죽였는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보니 벌써 죽어 있어서 안 꺽고 그 냥 나무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있는 한은 둘이 죽 을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 하면 훨씬 큰 의문이 생깁니다. 죽음이 예수님이 있는 한 못 온다고 하였는데 그 분은 어떻게 하여 죽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죽음이 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고, 죽음과 예수님은 같이 있을 수 없는데 왜 죽음이 찾아 왔 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9: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어떻습니까 머리가 꺾어지면 죽습니까 죽으면 머리가 꺾어집니까 순서가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죽고나서 머리가 내려오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 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와서 그를 잡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님이 허락하셔서 드디어 죽음이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죽을 권세도 있고 다시 살 권세도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무엇만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죽으면, '예수님, 내가 죽으 면 꼭 천국에 데리고 가는 거지요'라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하는 것을 전 성경이 촛점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어 놓고도 딴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이 결론 적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가봅시다.

예수님게서 유대로 다시 오셨습니다. 시체 앞에 오십니다. 나사로가 아니라 '그' 가 죽은 곳에 오십니다. '우리'의 죽음에 오십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11:21-24절을 보십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 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언제 다시 산다고 했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 수님께서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25-27절을 보십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 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 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대화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르다가 원망 비슷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셨으면 안 죽었을 텐데, 예수님이 늦게 오시므로 그만 죽고 말 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산다 걱정마 라' 그러니까 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마지막 부활의 날에는 다시 살 줄을 압니 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세 사상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러자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그녀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 다. 그걸 믿느냐' '예 믿습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의 신앙을 너무 좋게 평가하지 마십시오. 다음의 27절의 신앙고백을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보다 더 정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의 시체 있는 곳으로 가셨 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무덤의 돌을 치워라!' 그러자 마르다가 뭐라고 대 답합니까 39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 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왜 꺼냈다 넣었다 하세요 이제 다 끝났는데요' 이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서 하였던 말은 전부 무었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깜짝 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과 실제 로 내가 믿는다는 것과 얼마나 거리가 먼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고 백이 결코 마르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다 살 줄을 압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적인 교리들과 믿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가 다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정도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며 내 편이시며 나와 함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 분이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 하시면 죽음에서 조차 뛰어 나오고야 마는 능력이 있으신 주님 이심을 우리는 생활 현실에다 갖다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죽고 난 다음의 대답들입니다. 그 대답들이 너무도 거리가 먼 대답입니다. 누구에게까지 그럽니까 바로 주님 앞에서 조차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 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약속한 우리 손 안에 감지되는 현실적 이익 들에 기독교를 달아매고 있습니다. 현실적 이익에서 손해가 나면 갑자기 예수님도 간 곳이 없어지고, 현실적 이익이 있으면 예수님은 갑자기 부푸는 것입니다. 우리 는 그정도 밖에 안됩니다. 마르다 보다 우리가 조금도 낫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 앞에 놀라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 씀하시는 그 말슴이 갖는 힘과 능력과 권세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말하자면 말씀으 로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이 그 말씀의 능력과 권세로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부르셨고, 우리 모두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 중에 그 어느 것도, 말하자면 빛이 있어라!고 하셨던 그 권위와 권세로 약속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부분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잠 안 올 때에 보는 책입니까 이것은 읽으면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야지 시 체도 일어난다고 하는데 보기만 하면 잠이 온다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그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우시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손해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 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말씀이 내것이라는 것이 힘입니 다. 이것은 분명히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셨던 그 약속, 그 능력, 그 위엄 그 권세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축복의 말씀을 봅시다. 야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창28:12-15절을 보시겠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 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 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의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이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 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에게 한 축복입니다. 성경의 그 어떤 인물이든지 하나님 앞에 받는 축복이 있 습니다. 그것이 개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대 신하는 축복입니다.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은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축복인 것입 니다. 야곱이 이 축복을 받은 때는 형님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맞아 죽을까봐 도망가던 때입니다. 도무지 축복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갖추어 지지 않았을 때입 니다. 그러나 자신의 풍성함과 부요함과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은총이 그를 찾아와서 이 약속을 주시는는 것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축복과 약속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줄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가지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감격과 만목과 희열을 여러분의 생활에서 지금부터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짐승의 가죽 옷을 입으며, 톱으로 켬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으며, 괄시와 저주와 희 롱과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믿음을 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행복하고 만족하기 때 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이라고 해서 못 누 리는 것입니까 기독교가 남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아닙니다. 믿는 자 자신의 행복 자신의 행복이 근거가 되어서 흘러 넘쳐가는 법이지 우리를 쥐어짜서 주는 것이 아 닙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기독교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만족스러운 것이 없고 이것보다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결론>

물론 여러분들에ㅔ게 이런 걱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너무 광신적으로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상식을 더 넘어서는 것이지, 상식에서 옆길 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이요 희열이요 충만함의 넘침입니다. 그것을 누리십시오. 마르다가 되 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 위험성이 다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 도, 그분의 하나님 되심과 약속들의 그 엄청난 권세들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약속들을 여러분의 것으로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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