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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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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33년동안 머무셨으나 실제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으며, 이 기간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공생애 3년동안 모두 38가지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의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적을 통하여 확증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요한복음에는 중요한 7가지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사망이 생명으로 변하는 놀라운 사건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3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병든 가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1절에,“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라는 말씀은 나사로의 가정이 병든 가정임을 보여줍니다.

둘째, 죽음의 가정이었습니다.
본문말씀 14절에,“이에 에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통하여 볼 때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그 가정에 임한 것을 보게 됩니다.

셋째, 슬픔의 가정이었습니다.
33절에 보면,“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질병과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찼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축복의 가정이 된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나사로의 가정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3-35절을 보면,“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고,
38절에서는,“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통분히 여겼다>고 하는 말이 2번 나오는데, 헬라어로 이 말은 <분노의 반발적인 감정>을 뜻합니다. 이렇게 분노로 가득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눈녹듯 사라지고,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으로 바뀌는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만 움직여 놓으면 하나님의 어떠한 역사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만 움직이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바로 여러분의 가정과 심령속에, 생활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세상의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무기는 믿음뿐인 것입니다.

히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도,“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는 믿음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1.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역경과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S.O.S을 보내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3절에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라는 말씀과,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역경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신앙을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3가지의 요건을 갖춘 기도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첫째는, 실상을 낱낱이 아뢰는 기도였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실상을 낱낱이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실상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기도였다는 말씀입니다.

2)둘째는, 즉각적으로 아뢰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병이 들자마자, 고통을 당하자마자 즉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도 고통과 시련에 직면했을 때 즉각적으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셋째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한 기도였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도,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합니다.
4절에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성도들이 기도하고, 주님께 고백하며,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귀를 막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과 고통을 낱낱이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나아가서 본문 4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죠지 위싱톤은, “기도는 세계를 움직이는 손을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토블레디는 말하기를, “무릎꿇는 그리스도인은 천문학자보다도 더 멀리 본다.”고 말했으며,
그럼분은, “기도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 모두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즉각적이고 낱낱이 기도하셔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기만 하면 여러분들의 모든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질 줄로 확신합니다.

2. 성장하는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27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예수를 구주로 섬기는 신앙이었고,
2) 부활의 신앙이었습니다.
3) 그런 마르다의 신앙이 본문 20-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점점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한마디로 <아나이다>에서 <믿나이다>의 믿음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을 때에 크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잘 깨닫기만 하면 우리 믿음의 밭은 옥토밭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놀랍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동질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2절 말씀에는,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두 여자가 동질적인 믿음을 소유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믿음과 부모와 자식의 믿음이 통일되고 동질화되어야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통일되어야만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이며, 한국교회의 일치문제도 믿음이 동질화되지 않고는 결코 불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두가지 면에서 같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첫째로, 영접하는 믿음이 같았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니,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서 맞되.”라고 했고, 32절에도,“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앞에 엎드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마르다도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영접하는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2)둘째로, 고백하는 믿음이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같은 고백을 그들은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고백도 같아야 합니다. 영접하는 모습, 고백하는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변질된 신앙으로는 결코 이적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쪼록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은 내가 먼저 한 믿음, 한 신앙으로 통일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우리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본문 말씀 40-41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라! 하신대 돌을옮겨 놓으니’라는 말은 순종하는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신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죄악의 돌도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불신과 죄악의 돌들을 과감히 옮겨 놓아야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어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때서야 마르다는 깨닫고 돌을 옮겼습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의 두번째 재촉을 받고서야 돌을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예화:오래 전에 전치규라는 순교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페낵 선교사와 친분이 있었는데, 목사가 되기 전 하루는 페닉 선교사가 무우 하나씩을 주면서 제자들에게 무우를 밭에나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코웃음을 치면서 바로 묻었습니다. 그러나 전 목사님만은 하얀 무우가 하늘을 보게 거꾸로 심었습니다. 밭에 나가본 페닉 선교사는 전 목사님만이 순종한 것을 보고 감동하게 되었고, 일평생 전목사님과 더불어 봉사하면서 유명한 원산번역이라는 신약성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믿음은 그렇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이성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꺾어 버려야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기만 하면 사람도 감동하는데, 하나님께서 감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시든지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무덤을 향해 명령하시니 나사로가 죽음의 자리에서 풀려 나왔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만 움직여 놓는다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능력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기도하는 믿음과 성장하는 믿음으로, 동질적인 믿음과 돌도 옮기겠다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때 모든 성도님들의 생활속에도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과 능력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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