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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과 노사 관계 (골 0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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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가져오는 변화의 측면들을 다루면서 이제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관점(‘그리스도 안에서’)에서 본 노동 관계를 언급합니다. 본문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앞 장에서 한 것처럼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가정 형편과 노동 환경은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점들을 명심하고서 성경을 이해햐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피고용인들은 고용주들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를 퍽 알고 싶어합니다. 또한 기독교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놓고 고심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해답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과거의 복음

우리는 먼저 본문의 내용이 20세기의 피고용인이나 근로자들이나 공무원들이 아닌 노예들에 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완전히 자기 주인의 소유였습니다.‘노예는 자기 주인의 재산이었다. 노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이것은 노예제도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준하는 노예 생활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볼 수 있었다. 노예들은 각 시대와 각양의 환경속에서 학대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이 절대적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면 주인의 기분에 따라 중노동을 하거나 악행에 가담되어야 하였다. 노동은 거친자들을 위해서, 악행은 유연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악덕 행위에 배치된 자들은 좋은 보살핌을 받으면서 주인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주인이 싫증이 나면 그들을 매춘부로 삼아 수익을 올렸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노예들은 병약한 채로 방치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은 전혀 돌보아 주지 않았다. 늙은 노예들은 종종 극도의 가난 속에서 죽었고 길가에 내던져지는 경우가 많았다.’(Wallon, Histoire de l'esclavage) 노예들은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할 수 없었고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고용주를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노예는 임금 인상이나 노동 조건 개선이나 더 많은 휴무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노예에게는 거의 복종하는 길 밖에 없었는데 그것만이 더 심한 학대를 면할 수 있는 상책이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3:22) 바울은 여기서 마치 스토아 철학자들이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기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며 더 나은 것을 찾지도 말라고 가르쳤듯이 노예들도 그래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바울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는 자들이 있어 기독교가 인권 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많은 노예들을 속박의 멍에에 방치해 두었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는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는 하늘의 소망을 내세우고 땅에 있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게 하므로써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합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3:24) 그런데 바울은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단순히 만사에 자신을 방치하라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발언을 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3:22,23) 그럼 과거에 있었던 상전-노예 관계와 현재의 고용주-피고용인 관계에서 복음이 끼친 영향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합시다.

먼저 노예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노예의 처참한 생활은 갑자기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복음이 노예 생활에 의미를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달픈 노에의 삶에 들어 오셨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이제 연합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과 자유하심에 동참케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소망으로 채워지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3:4)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가 가져다 주는 소망을 지님으로써 자신의 노예 생활을 일신시키게 됩니다. 그의 자세는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철저한 방임이 아닙니다. 노예들에게 준 바울의 권면은 가학적인 유우머도 아니고 잔인한 냉소도 아닙니다. 바울의 권고는 그리스도인 노예의 생활에서 실천에 옮겨집니다! 그는 자신의 지긋지긋한 상전 뒤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는 상전을 섬기면서 그의 참주인이시며 유일한 주(主)가 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게 됩니다.(고전 8:5,6) 그리스도인 노예의 봉사는 결코 무조건 자신을 내던지는 방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쇠사슬에 묶이고서도 이기는 자기 되고, 끝없는 밤에도 빛이 되며, 고난 중에 기쁨을 갖는 승리의 생활입니다. 그리하여 폭동은 헌신으로, 증오는 존경으로, 저주는 축복으로 응답됩니다. 쓰라린 노예 생활은 때가 되어 이 악한 제도가 정복될 때까지 새롭게 변모됩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사회제도는 폭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에 의해서, 인간의 변화된 심령에 의해서 정복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현 세상은 폭력적 수단에 너무도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보고 노예 제도를 보존시키려는 기득권을 가진 악한 사회체제와 손을 잡고 노예들을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부쳤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항의는 확실히 정당성이 있어보입니다. 바울은 노에 제도의 악을 규탄하지도 않았고 노예들을 소유하는 교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그들에게 한마디의 견책도 없었습니다. 빌레몬은 우리가 아는 노예의 상전이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기 상전을 두고 도망쳤다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킨 오네시모라는 종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었습니다(빌4:7-9). 바울은 오네시모를 도와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지 않고 오히려 골로새에 있는 그의 옛 상전 밑에서 노예 새활을 계속하도록 돌려 보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잔인한 노예 제도에 대해 한마디도 정죄하지 않은 채 오네시모를 다시 속박의 굴레 속으로 되돌렸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20세기의 현대인들을 분노케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를 뒤흔들고 서서히 노에재도를 철저하게 침식시킨 것은 다름아닌 복음이었습니다. 이 평화의 복음은 복종과 순종과 사랑을 촉구하며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폭력들 보다 더 강력한 혁명적 능력입니다. 울 세대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은 비폭력의 항의가 얼마나 효과가 큰 것인지를 실증하였습니다.

바울은 몇 마디 잘 선택된 어휘들을 사용하여 상전들에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는 드러내 놓고 현행 노예 제도를 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초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상전들에게 구차한 동정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훨씬 더 적극적인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는 상전들에게 호의를 청하지 않고 공의와 공평을 요구하였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4:1) 그는 그리스도인 상전들에게, 그들 자신도 사실은 그 시대의 포로들이지만, 노예가 사람이지 물건이 아나며 의무뿐만 아니라 권리도 가졌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께심을 알지어다’(4:1) 바울은 이로써 노예를 상전과 꼭같은 위치로 올려 놓았습니다. 노예가 상전에게 책임을 지듯이 상전도 주인되신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진다는 말은 우리들에게는 당연히 들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교훈의 씨앗은 점점 자라 노예 제도의 불식을 가져다 줄 것이었습니다.노예 제도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더 자세히 알려면 빌레몬서에 실린 그의 주장을 더 살펴야 합니다. 이 서신에는 노예의 권리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나 상전에 대한 공식적인 명령이 없습니다. 그 대신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압력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해방은 빌레몬의 마음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행위라야 했습니다.

 현재의 복음

바울 당시의 불평등한 사회적 주종(主從)관계는 아직도 많은 나라들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 대열에 끼인 나라들의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그럼 고용주가 더 이상 잔혹한 상전이 아니고 피고용인이 옛날과 같은 노예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바울의 교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근로자는 자기에게 부과되는 노동 조건이나 보수나 작업량을 무조건 다 받아들여야 할까요 바울의 말처럼 ‘모든일’에 ‘순종’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맹목적인 순종을 통해 글로자들의 뜻을 거스려 경영주의 이익을 지원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억눌린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돕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현대 사회의 엄청난 불의들과 싸워야 할 권리가(의무가 아니라면) 있지 않습니까(참조 전3:16; 4:1;5:8). 아니면 본 서신이 제안하는 둣한 피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이것들은 쉬운 질문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위에서 우리들이 살펴 보았듯이 상전과 노예 사이의 관계라는 특정된 측면을 다루었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요즘은 아무리 노동 조건이 나쁘다고 불평하여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피고용인이 고용주의 노예는 아닙니다. 그럼 피고용인이 한 고용주에게 평생을 매여있지 않아도 되고 또 국법으로 근로자가 경영주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방법들이 보장된 경우라면 어떨까요 그리스도인 근로자가 그런 법을 이용하여 파업을 하고 자기의 요구 사항을 관철키 위해 노동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바울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했다고 해서 법적으로 허용된 현대 사회의 산업 행위를 정죄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권위에 복종하라고 지시한 바울도 때로는 그런 권위들을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인간들에 대한 순종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책임있는 시민들입니다.권세에 복종하라는 교훈은 로마서13:1-7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민들에게 권리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이익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런 권리들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으 모범을 좇아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유익이 아닌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권위들을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신으 야망이나 탐욕이나 질투심과 혼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르시도인은 이 세상의 불의들을 보고 결코 냉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항의는 때로 고통스럽고 값비싼 투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세상 혼자서 정의를 위해 싸우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의 공의와 화평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해서 지상에서의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에서 제외될 수 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속한 영원한 나라(왕국)는 하늘과 땅, 현 세상의 질서와 내세의 질서를 다같이 포함합니다.

그렇지만 이 투쟁을 위한 무기는 항상 이 세상의 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의 수단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방어하는 정으로운 목적은 바울이 1세기 노예 들에게 권고했던 정신으로 돌아갈 때에 가장 잘 달성될 수 있습니다. 곧 정직, 충성, 양심적인 자세는 어떠한 정당한 항의에도 더 무거운 비중을 얹어 줍니다. 비록 고용주가 불공정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계속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3:25) 사도 바울이 잔혹한 상전을 섬기는 노예에게 그같은 처신을 요구했다면 오늘날의 피고용인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요구를 하였겠습니까! 아무것도 악을 정당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멍예를 걸고 악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명예에는 사실상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터에서 말과 생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3:22) 우리들의 일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섬김으로써만 우리들은 그런 기쁨과 성실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노동 조건이 흔히 불완전하더라도 노동이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을 할 때에 우리들의 신령한 노동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3;23) 그럼 이제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의 자세를 살펴 보십시다. 고용주들의 의무는 훨씬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들도 흔히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요구 조건들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께심을 알지어다’(4:1) 고용주들은 단순한 평등주의나 자선적인 입장에서 피고용인들을 다루지 말고 정의와 공정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에게 주는 훌륭한 이상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목표의 달성을 위해 힘쓰는 과정에서 고용주들은 여러 가지 난관과 좌절을 당합니다. 그들은 흔히 존경과 칭찬보다는 오해와 미음을 더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일이 어렵더라도 고용주들이 받은 소명이므로 잘 참고 이행햐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주권적인 그들의 하늘 상전께서 그들을 이해하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공의는 기독교적인 모든 신령한 일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런데 개신교 기독교는 자주 질서를 위해 공의를 희생시키고, 천국을 위해 이 세상을 제쳐놓고, 영혼을 위해 몸을 억눌렀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한 불가피한 반작용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즉, 순전히 사회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이며 혁명적인 기독교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에는 혁명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폭력을 써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은 개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혁신적인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힘은 직장에서의 주종관계의 사상까지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관점에 변혁을 일으킵니다. 노예 제도는 바울에 의해서 페지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회악은 희생자들의 항의나 폭동에 의해서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노예와 그 상전을 하나님의 종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계급 투쟁이 아니고 형제 사랑으로 유일한 하늘 상전에게 복종하는 사회 계급간의 화해입니다. 이같은 사랑의 관계만이 역사상 가장 추악한 노예 제도의 악습을 철페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복음의 수준을 거부하고 복음의 방법을 멸시하는 사회에서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마6:33) 구합시다.

기독교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서 서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입시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일터에서의 윤리는 공의, 진실, 정직, 충성, 자원심입니다. 우리들이 이같은 하나님의 표준을 지키면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또한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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