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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호세아의 회개 (삼하 05:1-5, 엘 05:8-14, 요 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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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 첫 절은 에브라임에 대한 일련의 위협과 정죄부분 (5:8-15)이 마무리되는 장면을 나타낸다. 그 나머지 부분(6:1-3) 은 회개의 시에 속하고 있다. 또 하나의 긴 일련의 정죄가 회개 의 노력에 응답하여 나타난다(6:4-7:16). 5:8-7:16의 전체 부분 은 매우 특수한 매우 특수한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 때는 앗시리아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되기 10년 전의, 다시 말 해 주 전 733/2년의 이스라엘 북왕국(=에브라임)을 말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에 앞서 여러 해에 걸쳐서 이스라엘 왕 베가 (Pekah)는 아람(Damascus)왕 르신(Rezin)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 아에 대항하였다. 유다의 왕이 이 동맹에 연합하기를 거부하자 베가와 르신은 유다를 침공하나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없었다.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는 이러한 위 험 천만한 움직임을 보다 못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수리아와 팔 레스틴(Syria-Palestine)으로 진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지경(갈릴리)을 노럇하며 사마리아를 멸 망시키려고 위세가 등등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엘라(Elah)의 아들인 한 호세아가 이스라엘 왕 베가를 살해하고 왕권을 찬탈하 고 앗시리아에 대한 조공을 다시 드리기 시작했다(참조;왕하 15:30).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사건들을 언급하고(참조;7:3, 7, 13),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한 사실도 언급하 고 있다(호 7:11). 일종의 평화를 확보한 왕의 업적이 호세아의 예언에서는 아무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 와 반대로 호세아는 미 래에 대한 전망이 정말 매우 나쁘다고 선포한다. 남쪽으로부터는 유다 왕니 침략할 것이다(호 5:8 이하, 7:16). 그러나 유다 역시 여호와의 지노가 임박하고 있다(5:12-1

4. 전에는 자기 백성에게 구원과 보호를 약속한 똑같은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무서운 적이 되었다. 무섭고 담대한 비유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는 사납고 무서운 사자로서 묘사된다(5:14). 이 부분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마지막 파멸이 일어날 때에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다' (5:15)는 동방 신화로부터 온 듯한 새로운 이미지로 끝맺 히고 있다. "저희가 그 죄를 깨닫기(acknowledge) 전에는" (RSV) 이라는 번역은 오역이다. 그것은 "저희가 징벌을 받기 전에는" 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호세아 6:1-3은 회개의 노래를 인용한 것인데, 이는 아마 사마 리아에서 공적인 고백의 날에 불리웠을 것이다(참조;삼상 7:5-6). 공적인 회개의 노래들은 시편 79:,85:5-8, 90:13-17에 보존되어 있다. 이 예들 중에 나중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세아 6:1-3도 죄의 고백과 죄과의 인정에 대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고, 맹세나 약속도 없다. 그처럼 이 노래는 5:14에서 선지자가 사용 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이미지로 하나님을 말씀하는 일반적인 경 건에 관해 표현하고 있다. 호세아 6:1은 "돌아오라"는 선지자의 요청에 응하는 듯하나 호세아 5:4을 보라! 6:2에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리라"(he will keep us alive)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그가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리라"가 아니라).

"이틀 후에.....제 삼일에"라는 표현은 매우 짧은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동방의 풍요신이 이틀 후 또는 제 삼일에 살아난다 는 신화가 있었지만, 이 귀절이 그것을 짐짓 언급하고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리라" 는 말은 죽은 자 가운 데서 일으키신다는 것이 아니라 병상에서 일으키시리라는 것이 다. 호세아 6:3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풍요신과의 유비(analogy)를 통해 이해한 신앙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호세아 6:4은 이러한 전적으로 부적합한 회개에 대한 선지자의 응답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귀절이 제사장적 예언의 문체로 되 어 있는 한(참조:시 85:9), 여전히 정당한 예배적 응답을 반영하 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자연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회개와 그 순진하기만한 상상을 비웃는 것이다. 하 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이시고 심판하시는 역사의 주님이시다(6:5):즉 그는 풍요신처럼 달래시지 않는다. "제사보다 사랑" (6:6)이란 말은 무너진 정치 세력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의 기본 적인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입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으면, 구원의 가망은 전혀 없을 것이다.

 제 2주제:로마 8:1-10(11) 이 서신의 앞 장에서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했다. 8 장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것 을 취급한다. 로마 8:1-39은 분명한 구분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 의 문학적 단위다:(1)육(flesh)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성렬 안에 있는 생명, 8:1-11:(2)아들됨을 말하는 성령 안에 있는 생 명, 8:12-17:(3)종말론적 상황 속에 있는 성령, 8:19-30:(4)종 말론적 승리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랑, 8:31-3

9. 이번 주일을 위한 일과는 8:11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겠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육"(flesh)과 "영"(spirit)이라는 용어는 아주 중요하다. "영"이란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신적인 능 력이다. 즉, 그것은 기적 및 황홀함(ecatasy)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이 기존 세계를 깨뜨리고 들어오는 세력인데,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수단으로 만들어내거나 지배할 수 없는 실재를 경험 하도록, 그것은 파괴하고 유동하고 세우고 고무하는 것이다. 한 편 인간의 지배 영역은 "육"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 그 당시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영"과 "육"은 서로 전적으로 상반되는 것으로 본다. "육"은 모든 일시적이고 약하고 과도적이고(passing) 파괴 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이 되었다:이에 대해 "영"은 강하고 지 속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지칭했다. 인간학적으로 말해서 "영"은 인간 존재 중 진정한 신적인 자아로서 이해하였고, "육"은 쭉을 수 밖에 없는 육신으로 보았다. 바울은 이 용어 개념에 의존하지 만, 전존재로서의 인간, 즉 몸과 영과 혼은 "육"의 세력에 예속 되어, 생명을 얻도록 행하기를 재촉하는 율법의 악순환에 붙들려 있어 인간이 율법을 성취하는 경우에도 오직 사망을 열매 맺게 되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롬 7:7-25). "영"은 율법을 포함한 이 인간적 가능성의 영역에 반대하여 나타난다. 바울은 이 "영"을 인간의 마음이나 율법에 의해 대표되는 도덕과 질서의 영역에 연결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 "영"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며 세례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었다면(고전12:13), "영"이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로마 8:1은 "그리스도 예수 안", 즉, 교회 안에 있음으로 모든 정죄(종말론적 심판)가 끝이 났다고 말한다. 어떤 번역은 "육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라고 하는 말을 여기에 덧붙이고 있으나, 이것은 단 몇 개의 사본에만 나타나는 이차적으로 확대 된 것이다. 전체의 본문에 주제를 담은 말은 8:2에 있다."성령의 법"은 새로운 도덕이나 제의법(ritual law)이 아니라 종말론적 상황을 결정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서 이 영을 현실화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유라고 부르게 되 는데, 이 자유는 "율법"이 긴밀하게 연합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영역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로마 8:3은 "율법에게는 불가능 했던 것을, 즉 율법이 육 때문에 무능(연약)하였던 때에--하나 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사..."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첫 문장을 끝내지 않고 있으나 확대된 신조(참조:갈 4:4, 요 3:16 이하)와 병렬시키기 위하여 갑작스럽게 마치고 있는 것이 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상대역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 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 즉 십자가에 서 일어난 승리와 심판에 대한 우주적 차원의 사건이다. 이것이 "율법의 정당한 요구"(8:4)를 성취하였고, 그럼으로써 "육을 좇 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이 사건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옛 행위와 새로운 행위는 다같이 그것이 육이든 영이든 "사람 의 마음을 어떤 것에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 나 "율법"이란 용어는 바울이 옛 용어에 관해서 말할 때 (8:7) 등장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굴복"과 "할 수 있다"(참조:8:7과 8절에 이중으로 나오는 "할 수 없다")는 말은 여기에만 등 장한다. 그러나 "영 안에 거하는"(8:9 상) 자들에게는 율법을 만 족케 할 "능력"이나 율법에 "복종"함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고, 새로운 존재(8:9 하)인가가 문제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사망 이후의 생명이다. 이것은 8:10-11에서 세례에 언 급하는 형식 (참조:롬 6:1-10)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마치 그 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죄와 사망을 실제로 체험한 것과 같이(그리 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유비되는 것으로서, 참조, 위의 8:3을 보 라). 이제 (하나님의!) 의가 실제인 생활속에 있다(8:10). 로마 6장에서와 같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여전히 미래에 있어서 기대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은 언젠 가 살게 될 죽을 몸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8:11).

 복음서 주제:마태 20:17-28 이 단락(pericope)은 두개의 상이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1)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마태 20:17-19, (2)"그리스도와 세 배대의 아이들", 마태 20:20-28, 이 두 부분에서 마태는 그의 자 료인 마가복음(참조:마 10:32-34과 10:35-45)을 따르고 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중심부분을 예수의 수난에 관한 세 번의 예고 (막 8:31-33, 9:30-32, 10:32-34)로 부각시켰다. 이 세 예 고는 그리스도께서 넘기워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신 것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조의 형식을 번영시키고 있 다.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무리를 "고백적인 교 회"로 보며, 마가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놀라움과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수난의 마지막 예고에서 특히 이를 강조하였 다.

 두 번째 부분인 마태 20:20-28( 막 10:35-45)은 보다 복잡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원래 그것은 교회에서 설교와 교훈을 위해 쓰였던 단순한 모범적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왕국에 서 받을 영광에 대한 질문(마 20:21)과 마태 20:23 하반절 ( 막 10:40)에 보존되고 있는 듯한 예수의 말씀의 형식을 빌은 대답으 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야기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을 약속하는 것은 예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권리임 을 밝히려는데 있었다. 이 애초의 이야기는 세 개의 상이한 방법 으로 확장되었다.

 (1) 마태 20:24-27(막 10:41-44와 평행 귀절)--이는 모든 제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서--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은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측정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위대함은 섬김이다. 마태는 힘의 남용을 의미하는 "주관 하고"와 "권세를 부리는"이라는 어귀를 사용함으로써 세속적인 기준에 대한 거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과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을 비교해 보라. 누가복음에는 "주관하는 자들" 과 "은인" 이라는 용어--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다른 고관들에 대해 빈번 히 사용하는 칭호인--는 교회에서의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nobodies), 즉 젊은 사람들과 종들과 대조되고 있다(눅 22:25).

 (2) 섬김에 대한 또 하나의 말씀이 마태 20:28(막 10:45에서 연유한)에 첨가되어 있다. 그것은 수난의 예고 가운데 나타나는 "인자" 칭호에 대한 이해와 일치하도록 짜여져 있다. 누가 22:27 은 "인자"라는 칭호가 아직 사용되지 않던 더 오래된 형태를 보 존하고 있다. 예수는 단지 "섬김"의 모범일 뿐 아니라, 그의 섬 김, 즉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속주의 사역을 완수하시는 분이 다. 그러므로 "섬김"은 "주인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 는 것"에 대한 반대어가 더 이상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 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대속물"(ran-som)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 성서 가운데 이곳에서만 나 타난다 (또한 평행귀절인 마가 10:45에 나타나고 디모데 전서 2:6에서 유사어가 나타난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예를 들어 노예나 죄수를 자유케 하는 데서처럼 "자유를 사기 위해 치루어 진 값"을 말한다.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히 9:15)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이 땅의 삶으로부터의 구원(롬 8:23)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보통 자유는 위와 같은 자유를 말한다(참조:눅 21:28, 엡 4:30). 또한 마태 20:28은 "섬김은 자유를 획득한다"는 역설 을 일반적으로 말해 주지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섬김에 대해 서도 말한다. 즉, 그것은 지배자가 지배할 수 없는 것을 준다.

 (3) 원래의 형태에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것은 마태 20:22-23 상반절(막 10:38-39에서 비롯됨--그러나 마태는 "세례"에 관한 글이 생략되어 있다. 참조:눅 12:50)에 나타난다. "잔을 마시는 것"은 죽음을 지칭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한 순교자의 죽음을 제 자들에게 예고하는 것이다. 후대의 교회는 순교자들에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뛰어난 "성자"로서의 특별한 명예를 부여했다.

이 단락의 문맥에서는 순교자들조차도 특별한 권익이 없이 나타 나고 있다.

마태는 마가의 기본 단위를 구성한 이들 다양한 전통들을 사용 하면서, 그 자신의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마태 20:17 에 그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라고 기록했다.

예수를 따르며 그로 말미암아 자유를 획득한 사람들에게만 예수 의 "섬김"과 제자들의 운명 사이의 신비한 관계가 의미가 있다.

이 본문은 "내적인 그리스도인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20(참조:20:21)에 마태는 자기 아들들의 영광된 자리를 요청 하는 사람으로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소개 한다. 세속덕 인 사회적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야망이 교회의 경험속으로 들어 온다. 이처럼 예수의 섬김과 서로를 섬김으로써 자유의 임무를 다하는 것 사이에 신비하게 존재하는 관계를 통일성이 위협받는 방향에서 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전통적으로 이번 주일은 "상쾌한 일요일"[Refreshment Sunday), 또한 "즐거운 (Laetare) 일요일"과 "귀향 (Mothering) 일요일"이라고도 함]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주기를 통해 위로가 나타나는데, 이는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는 옛 주제보다는 자유 의 주제에 초점이 모아지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바울의 말씀보다 복음서 주제를 먼저 취급하는 것이 아마도 현명한 일일 것이다.

 주석이 보여주는 바는 호세아의 짧은 본문을 통하여 선지자가 그의 의심하는 자를 표현하려고 하는 회개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 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노래"는 상처와 병으로부터의 회복이 부활로서 인정되지 않는다면 부활과 전혀 관계가 없다. 거기에 나타난 표현들이 구약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데 깊이 뿌리박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살린다"(revive)나 "이틀 후에... 제 삼일 에"라는 말들을 회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후자는 우리가 일찌 기 언급한 보다 긴 "40일"과 대조하여 "거의 즉각적으로"(눅 13:32-33에서 그 사용법을 보라)와 같은 것을 보통 표현하는 방 법이다.

 긴장이나 긴박한 상황에서 주께로 "돌아가는"(return) 것(그러 한 돌아오라는 요청은 아직 더욱 용이한 일이다). 즉 회복에 대 한 희망을 재빨리 표현하는 것과 문제들에 대한 거의 즉각적인 해결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순진무구한 가정", 즉 "아마 잘 되어 나가겠지"하는 생각은 선지자가 일반적인 반응을 듣는 차원이리라. 그 반응은 바로 곧 사라지는 것을 비유한 아침 구름 이나 이슬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처리 방법은 그와 같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 (6:6에 있는 항의 의 절정을 참고하라.) 그러나 돌이킴과 다시 살아남과 하나님 앞 에서 사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 상황의 실 제 모습과 만나는 데서 오는 결과라면, 그리고 우리의 관점으로 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하신 무한히 고상한 의도로 부터 말미암은 결과라면, 신앙의 행동의 정당한 단계와 요소와 관점이 된다. 따라서 호세아의 본문은 부활에 대한 전형적인 예 언에 왜곡됨을 주지 않고도 마태복음과 로마서에 나타난 기대의 주제에 대한 서론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미지(그리스도인 제자의 길)와 그 리스도의 경고(순교의 주제)가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친구들이 에 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와 예수께서 거기 가시는 의도에의 잘못된 기대에 대한 순수한 회상을 언급하고 있다고 믿는 면에 있어서 퀘스트(Koester)박사보다 더 진보적으로 나간다고 생각한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기대는--사순 절 기간의 순례 에서조차 __오도된 듯하다. "황금으로 뒤덮힌 예 루살렘" 은 맞는 말이나 그것은 변화된 예루살렘을 말한다. 충성 된 자들을 위한 보좌(열두 보좌 __마태19:28을 보라)가 구비된 예루살렘은 종말("새로운 창세기")에 속한다. 그러나 보좌가 아 니라, 지독하게 왜곡되고 절망적이 된 인간성의 핑계를 거부하는 십자가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 신앙의 역설은(천상의) 왕인 그리 스도의 (지상적) 보좌가 된 십자가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실로 부터 역설로 타협되고 수용되고 전환되어야 하는 것으로 존재하 고 있다. 그리고 종은 그의 주인으로부터 다른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다 __문자적인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세례받으며" 또 "잔을 마시고"라는 말은 적어도 그렇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는 마지막 단계까지 갈 용의가 있음을 의미하고, 아무리 쓴 경험 이라도 회피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의 새로움에로의 재생과 치유와 부활이 오기 전에 최악의 것을 예상할 준비가 되 어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번 주일에 강조하는 바가 재생이 있기 전에 견디어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다음 주일에는 십자가 각 홀로가 아니라 부활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의 변화는 수난 절기에 들어가기 전 에 필요한 것이지만, 십자가와 십자가에로의 길이 여전히 실재하 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기대 가운데 한 위치를 차지해야 함을 가정하는 것이다. 기대의 양상은 십자가가 로마 가톨릭 형제들이 "구속적"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__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바로 바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마태복음을 다시 보도록 하자.

 우선 주의할 점을 말해야겠다. 즉, 마태의 것에서처럼 분명한 편집 내용을 무시하게 되면, 설교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청중 들에게 신망을 해칠 수 있다. 만약에 어머니의 요청에 강조가 어 떤 형태로든 주어지게 된다면(마태의 경우가 그렇다. 이와 비교 해서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요청을 한 것으로 되어 있 다), 설교자는 그것이 마태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고친 것임을 인 식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혀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지금은 사도 적 인물이 된 두 사람에 대한 "체면 세워주기"(saving-face)의 관점에서든지 혹은 가족 또는 사회의 압력이 기대, 즉 목적의 표 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에서든지 그렇게 밝혀야 한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기대가 예루살렘과 그곳의 기존체제하고 상 충하고 있었다는 점이 모호하게 흐려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관점은 "수난 예고"가 기독교적으로 된 해석 가운데서만 우리에게 보여진다. "우뢰의 아들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 은 그리스도인의 순교로 초점이 바뀐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 것은 죽음 자체(그 "실패"조차도)가 하나님의 뫄적 안에 있을 수 있으며 "구속 받을 수" 있고 "대속물"(ransom)에 속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제 2주제의 주석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 은 진실로 주권자이시며 궁극적인 불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라는 예수의 신앙의 차원에 어리둥절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다(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바울이 말한 대로 문제가 매우 뿌리 깊고 근본적으로 비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죄"), 하나님의 목적("정죄 없음")이 달성되려면 보통의 방 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발 속죄에 대한 안셀 름이나 다른 사람의 기분 나쁜 이론을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생활이나 문화(미국식으로하면 "생활 방식", "자유"에 대한 기 형의 사고로 말하면 "삶의 스타일")에 의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 대들은 기독교의 선포를 통해서 면밀하게 검토된 합법적인 것들 이다. 그것들은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설교자에게 있어서조 차!) 단순하게 "성수를 뿌릴 수"가 없다. 우리는 "조상 아브라 함" 보다 "조상 아브람"(이전의 주일 참조)에게로 쉽사리 돌아가 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문화적으로 공유하게 된 기대들은 어떠한 덧붙여진 종교적 딱지가 선전 효과를 낸다해도, 거대한 자립적 (seft-helf)인 요소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 적 기대이며, 그것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신앙의 스타일,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신앙의 기대--의 차이를 특징지워 주는 것이다.

 구원은 자유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분명한 주장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잘못된 기대로 부터의 자유가 있다. 즉, 은혜는 값싼 것이라는 기대, 영웅적인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보상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앞으로의 기대를 결정할 것이라는, 따라서 그 기대를 제한 할 것이라는 기대들이 그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 에 대하여 "너희 마음을...에 고정 시키라"(to set your mind on)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한 마디 말로써 대답하고 있다. 그것 이 바로 해답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틀"(mind-set) 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교육받지 못해서거나, 충분히 요리문답 교육을 받지 못해서거나, 해결할 문제를 충분히 분석하지 못해서(컴퓨터에 부정확하게 입 력해서) 때문이 아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하나의 신조나 슬로간 을 추출하지 못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이유는, 평범 치 않은 말을 사용한다면,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기 때문 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말할 수 있다면, "끝이 열려져 있다" (open-ended). 그것은 기대 가운데서 기대하지 못한 것과, 기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한다. "눈은 보지 못하였고 귀는 듣지 못하였다." 또는 한 고대의 글에서처럼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 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좋은 가들을 예비하셨으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바를 뛰어넘 는 당신의 약속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 겠다.

 성공, 즉 문제 해결은 우리의 기대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다 시 말해 문자적으로 밑받침이 되며, 이미 알려지고 이미 형성되 고 (예배적으로 조차도) 이미 예상된 지상적인 것에다가 기대를 붙들어 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조차도 바로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과 예술도 오랫동안 반대를 받아왔다. 우리 모두는 아마 "고도를 기다려" (waiting for Godot) 왔을지 모른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반문 화의 혁명 말고도 환경 문제 안에 그리고 널리 퍼져 가고 있는 풍요와 더불어 살며시 다가오고 있는 권태와 포만과 환멸 가운데 "성공"이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되지 못하고 성취가 어딘가 에 공허함을 갖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일깨우는 것으로써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그리 고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c'est son metier)!] 사실 등 많은 "징조"(indicators)가 있다.

바울의 계시는 그것 이상의 무엇이 있다. 우리는 다시 그 "이 제는"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죄함이 없나 니......" 그러나 이전에는 정죄함이 있었다. 현재에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이라는 뜻이다.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생명의 성령,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한 새로 운 "이제는"의 상황이 있다. 모든 문제를 약속과 희망과 자유의 흥겨움으로 끌어 올리는 시간이(이 사순절 주기 가운데서) 왔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만 한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의 흥겨움 [exhilaration--라틴어나 헬라어에서 다같이 "환희"(hilarity) 를 나타내는 말에 가까운]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법칙 ("율법")에 의해서 획득할 수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고쳐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렇게 하 는 것은 "모형화" 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것을 깨뜨려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도록 요청받고 있 다. 롬 12:2).

 바울은 말하기를 육의 "마음 틀"(mind-set)은 우리를 바이스 (vise)라는 연장으로 조이듯이 꽉 조였으며 그 무기는 죄와 사 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변했다. 그리스도, 즉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우리의 처지와 온전하다고 친밀하게 하나가 되어서, 모든 종교가 성취하려고 하는 바가 우리가 성령 의 영역으로 옮겨가면(또는 옮겨지면) 실체가 일어날 수도 있게 되었다.

바울이 이것에 관해 말할 것이 많음은 그것이 전체의 그리스 도인 생활과 "인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 성령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시 형식성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실재를 밝혀주는 "마음의 틀"이다.

그것은 여러 방면에서 입증된다.--아무리 극단적인 용어라도 그것을 지나칠 수 없다 ("생명" 대 "죽음", "적대감" 대 "화평" 등). 또는 인격의 다양성이 마치 잽싸게 변화하는 환경이 그러 하듯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오늘에 맞는 해석으로 그것을 요약할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다--그것은 "기다리는 삶"이 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안에 있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그 성령 에 의해서) 삶의 경험을 향해 새로운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기대는 제한될 수 없다. 경험은 제한될지 모르나 보통의 경험으 로 부터 나오는 것은 기대하지 않은(계획되지 않은) 새로운 양 상, 새로은 관계, 새로운 느낌, 새로운 분위기다--어떻게 그 것을 묘사할 수 있는가 당신이 그것을 알았다면 무엇을 의미하 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리스도인은 새로운 가능성들, 순전히 우연한 일들(다른 이들은 그렇게 부를 것이다). 평범한 일들 가운데 새롭게 계시되는 일 종의 불꽃을 경험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기대에 차 있으며 하나 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실재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 러한 개방성, 기대감은 조작될 수 없고, 다만 기도에 의해 자양 분을 공급받을 수 있을 뿐이데,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하기를 우 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 전에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씀하신 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마음 틀"(mind-set)이 가지는 특징이다. 이 개방된 기대감은 "육"의 엄격하게 계획되고 제한 된 본질로 말미암은 명령에서 해방되어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궁극점(the new end)을 향해 열려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서 정의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노리치(Norwich)의 쥴리안(Julian) 은 이것을 이해하였다. 즉, 그녀가 "나는 다른 어떤 신비보다 예수를 '사랑했다'"고 썼을 때, 그녀는 "올바른 즐거움"에 빠져 있다고 종종 고백하였다.]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몸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죽음의 종국을 맞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이미 우리안에 계시 고,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으로서 알려진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고, 죽음으로서의 종국은 기대감, 즉 아직 오지 않는 풍성한 생명에 대한 기대감에 대한 다른 하나의 가능 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예 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육체적 죽음 뿐이기 때문에, 우리의 근 본적인 기대로서 생명, 즉 주어진 성령, 내재하는 생명은 남아 있는 것이다. 슬픔, 저주, 혼란, 부패(decay), 제한 가운데 성 령의 기대와 함께 생명은--이제--뚫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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