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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행함 (약 0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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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야고보서를 "그 따위 지푸라기의 서신"(that straw epistle)이라고 경멸스럽게 못박아버린 것은, 주로 2:14-26의 믿 음과 행함의 논의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마 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가톨릭 교회의 지나친 면들, 특히 면죄부 의 판매(나중에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폐지됨)의 거부와 그리고 유대교의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 및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혼동에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믿음 혹 신념(pistis, 피스티스)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일 종의 경건에 대해 야고보는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한 경건을 옹 호하는 자들은 "평안이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만 지껄여 대면서 값싼 영적 축복들을 시여(施與)하였으며, 자 기들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는 필요한 도움에 응하지 못 한 것을 그것으로 떼우려 하였다. 야고보는 적절하게도 그러한 믿음이란 "죽은"것이라 하여 배격하고 있다(2:17). 요한이나 바 울이나 예수님이었더라도 야고보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셨을 것이 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ergo, 에르고)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바울에게 있어 은혜 와 믿음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편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 니요."(고전 13:2)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은사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energoumene, 에네르 구메네)한다(갈 5:6). 칼 바르트가 마태복음 7:21과 누가복음 6:46을 주석하면서 말한 것처럼, 다만 "주여, 주여"하고 말하는 것이나 사도신조를 외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gumnoi 귐노이)..."(15절), "옷을 초라하게 입고"(ill-clad)라는 번역도 가능하긴 하나 그 원의(原 意)를 약화시키고 만다. 문제는 어떤 외양(外樣)이 아니라 추위 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16절).

 꼭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5장의 대심판 장면에도 사용에도 있 는데, 거기서는 단순히 "벗었을 때"라고 번역되어 있다. 야고보 서 2장에서나 마태복음 25장에서나 다 같이 문제는 곤궁한 자들 에게 반응을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마태복음 25:44 에 보면, 굶주리고 목마르고 외롭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갖힌 이 웃들을 외면하는 자들이 심판주이신 그 임금을 일컬어 열심히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참조:마 7:21). 그러나, 그 따위 경건 이 그들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16절). 이러한 "축복"을 선포하는 소위 크리스천들은 도움을 구하는 자들이 꺼 져버리기를 열망하고 있다. "평안히"란 말은 관헌들을 불러 오기 전에 이 어려운 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어쨌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은 하나님이나

남들이나 또는 춥고 배고픈 그들 자신에게 떠맡겨져 있다. "(그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글자 그대로의 뜻은 "(그것이) 무슨 도움(ophlos, 오펠로스)이 되리요"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자들에 있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못 된다. 혹은 그 의미는 2:14에 나타난 뜻인지도 모른다.-그러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 는 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왈가왈부할 것 없이 분명히 중 요한 것은 행동인 것이다(참조:막 8:36, 눅 6:33-35, 롬 2:13, 고전 3:14, 갈 6:7-9).

 곤궁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만 하는 가짜들은 실상 이렇 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은사가 어디 한 가지 뿐인 가 믿음의 은사를 가진 자가 있는가 하면, 행위의 은사를 받은 자도 있지 않은가(18절). 야고보는 이렇게 믿음과 행위가 따로 노는 것은 헛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만일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믿음을 가진 자가 행하는 바 행위에서 나타나야 하는 법이다. 믿음은 우리의 입술로 고백되어야 하나 동시에 우리의 생활 속에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 2주제:야고보서 2:14-18 야고보는 과연 정열적인 설교가다. 그의 예시(例示)는 소름끼 칠 정도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그와 비슷한 일일 일어나는 것을 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좀 체로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서 야고보의 논증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어떤 논쟁에서든 서로의 입장이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으 며, 격론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야고보가 그의 서신을 기록할 때 의 배경도 그러했던 것 같다. 즉, "나는 믿음이 있노라."와 "나 는 행함이 있노라."의 대립이 곧 그것이다(18절). 이론상으로는 그러한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해 보이며, 믿음을 중시하는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을 아주 필수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 문에 야고보와 바울은 마치 "양극"(兩極)인양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러한 양극화의 현상은 우스꽝스 러울 뿐더러 비생산적이다("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4절).

"나는 믿음이 있노라."는 측(側)에서는 헐벗은 이웃이 "나는 행 함이 있노라."는 측이 훨씬 더 많은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각성해야 한다(참조:18절). 마찬가지로 "나는 행함 이 있노라."는 측은 헐벗은 이웃이 고작 또 하나의 선행을 걸 못 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깊이 각성해야 한다(참조:18절). 양극 성은 궁핍한 이웃에게도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14, 16절).

 "행위로 말미암는 의"(works righteousness)의 길을 잘 알고 있었을 야고보는 또한 미묘하면서도 비참한 결과를 낳는 믿음의 남용, 곧 "신앙지상주의"(fideism)에 대해 특히 민감했던 것 같 다. 야고보는 지적하기를, 귀신들도 외견상으로는 "믿으며" 또한 적어도 부들부들 떠는 정도의 예의는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9절). "오직 믿음" 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건져내신 바로 그 수렁으로 도로 빠져들어 갈 위험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들 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을 칭의를 위한 행위로 전락시켜버 린다. 그렇게 되기 쉽상이다. 행위로 말미암는 의의 횡포로부터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믿음"(faith alone)이란 말은 무자격(無資格)한 자에게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 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오직 믿음"이 "믿기만 하시오!" 라는 설유조(說喩調)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 때에는 믿음은 칭의 를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 ("염려하지 말라....", 마 6:25이하)은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전 가하는 되어버리며 ("하나님, 당신께서 하시죠!"), 믿음에의 권 면은 빈궁한 이웃에 대한 선심공작이 되고 만다("하나님께서 친 히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저 믿기만 하십시 오"). 그래봐야 그 불쌍한 헐벗은 이웃은 여전히 도움을 받지 못 한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그 이웃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웃 안에서 믿음과 행위는 다 같이-서로 보정(補正)하면서-현실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빈궁하 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지하고 강렬하고 믿음 충만하다 하더라 도 수만 마디의 말이나 잘 되라는 인사로서는 그의 상태로 호전 시킬 수가 없다.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웃이 다. 그는 우리가 잘 되기 위해 이용해 먹어도 좋은 기회는 아니 다(즉, 자기의 죄책감을 무마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할 한 인간인 것이다. 여기 에 믿음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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