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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의 완성 (마 0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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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몇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율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뜻은 또 무엇이며,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무엇입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이런 몇가지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본문에 대한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까지의 우리의 상식을 헷갈리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본문에 대한 말씀을 피상적으로 대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믿음의 지식을 교정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 완성의 의미입니다(17-19절)
“내가 율법이나 선자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다음에 나오는 말씀의 머릿말입니다. 이제부터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결론을 미리 제시하신 것입니다. 논문 작성요법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훌륭한 논문 작성자이십니다.
그러면 율법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들은 흔히 모세의 율법만을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율법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주신 말씀을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만이 아닙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나”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예언서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한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법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도덕의 법입니다. 완전한 의식(儀式)의 법입니다. 인간이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위의 법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걷게 하는 완전한 길잡이가 되는 이정표(里程標)와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결코 폐하여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성경적인 율법관이 아닙니다. 둘은 무율법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대부분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법이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이루시고 폐하셨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구속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당한 율법관이 아닙니다. 셋은 자신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굳게 믿으면서 동시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그 결과로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을 폐하는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이미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말씀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소소한 부분들은 이미 무시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긍(自矜)한 것은 인류 최고의 유산인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바울도 말한 바 있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관심은 특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율법을 지키고 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렸다니 될 법한 말입니까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문자는 영어의 아이(i)에 해당하는 요트(혹은 요드)입니다. 요트는 하나의 점입니다. 이 점은 마치 펜으로 꼭 찍은 것과 같지만 다른 점들과 분별이 되는 글자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요트가 빠지면 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점 하나라도 꼭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율법은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율법은 폐하여 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코 폐하여 질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은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義)입니다(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지구상의 어떤 인종도 따라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도 바리새인들보다 더 열심을 내고 극성을 부리라는 말씀일까요.
도대체 이들의 의는 어떠한 것일까요. 우리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때 위선자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위선자들입니다. 물론 의도적인 위선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주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라고 매도하신 것을 보면 위선자들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의는 위선적인 행위에서 나온 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비시킨 것은 그들의 의와 같지 아니 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첫째로 사람을 의식하므로써 가지려는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였습니다. 내면적인 의가 아닌 외면적 의가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주님께는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이기심에 근거한 의였습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이용하기 까지 했습니다. 고르반 사상이 그런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의입니다. 셋째는 자기 자랑을 위한 의였습니다. 시장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이나 성전에서 세리를 조소하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의 이야기에서 이런 요소를 다분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스도인들 더러 이런 바리새인들의 의와 경합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인정되어진 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그 의로 덧입혀진 칭의(稱義)의 의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행위를 보이려고 애쓰는 의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덧입혀진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변경하였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폐한 것보다 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행에서 오는 의를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변경한 율법을 바로 고쳐 주시고 올바른 의를 행하도록 율법을 완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음의 단원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셋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21-25절)
우리는 설교를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들 중에 믿는 자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십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리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주님은 성경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경황 중에도 성경을 인용하실 때에는 “기록 하였으되” 꼭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을 본 받아 제자들도 항상 “기록된 성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들었으나” 하십니다. 이것은 기록된 토라(율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 박사라고 자칭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변경 했습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합니다. 제 육계명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그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들은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법칙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첨가한 것입니다.
서기관은, 처음에는 문자를 아는 학자가 왕궁의 서기로서 율법을 복사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예언이 그친 이후부터는 학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큰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시대에 와서 그들은 한 계급을 이루어 큰 세력을 가졌습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세칙을 만들어 종교및 일상 생활에 적용하도록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서 백성들을 지배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많은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란, 히브리 말로 “파라슈”에서 유래된 말인데 “갈린 자”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 안에 크게 세 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다른 둘은 사두개 파와 엣세네 파입니다.
사두개는 자유주의이고 엣세네는 숙명론자들인데 비해 바리새는 그 중도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일반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이 강했고 사두개의 특수한 제도가 성전인 것에 비해 그들은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회당 중심으로 열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공중석상에서 읽혀지는 율법만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석하는 서기관들은 율법 자체와 마찬가지의 권위를 가졌습니다. 이런 편의를 이용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의견으로 성경을 바꾸어서 율법에 사람의 법을 첨가했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정확하게 꼬집으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간다 감옥에 가면 고생하고 창피를 당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은 내동댕이 치고, 말하자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겁주기를 한 것입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이 폐해버린 율법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꼭 살인하지 않았어도 형제에게 노하면 심판에 처할 죄목이 된다.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힌다. “라가”는 히브리 사람들이 경멸한다는 뜻으로 자주 쓰는 일종의 욕입니다.“머리가 빈 사람” 혹은 “함부로 말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팔푼이” “또라이” 이런 뜻입니다.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정말 지옥 불에 던져질 자다.
이 말씀을 연결하여 보면 처음에는 아무 말없이 노(怒)합니다. 더 나아가면 노하여 거치른 말을 마구 합니다. 그랬다가 심한 욕을 퍼붓습니다. 이것은 살인의 동기이며 모두 실제적인 살인과 연결되는 고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 노기가 생기면 이미 살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예배할 긴박한 경우라도 혹 형제를 노하게 한 일이 있었으면 먼저 가서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송사를 하게 되고 감옥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육적인 재판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옥행도 같은 수순(手順)으로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매우 조심해야 할 법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이 율법보다 더 실행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서기관 같은 사람들에게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고 한 것을 주님은 그 살인에 이르는 과정까지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도 즉흥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노기가 발전하여 살인에 이른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새로 제정해 주신 것이 아니며, 옛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도 아니며, 율법보다 더 깊은 마음의 법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이 폐해 버린 율법의 근본 뜻을 다시 살려 주신 것입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일은 예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율법으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살아 있는한 우리는 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어떤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강단에 선 강사께서 집회 출석을 강조한 나머지 세상 일로 이 집회에 나오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득불 어떤 교회에 예배해야 할 사정이 생겨서 참석했습니다. 설교자가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 오는 교인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에 늦었는데 이제 왔소 라는 듯이 앞자리로 나오는 교인은 얌체 교인이고, 끝날 때 슬금 슬금 들어오는 교인은 3장 찬송 교인이라고 별명을 붙여 가면서 면박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에도 헤헤거리거나 옳다고 고개를 끄떡거리는 교인은 잘 길들어진 쓸개 빠진 사람입니다. 마치 서기관들과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있는 교인이라면 그 사람에게 이미 살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예배하는 일보다 형제가 화목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예배보다 화목하는 것이 주의 율법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인을 극복하는 길은 자기의 분노를 죄로 인정하고 화목의 길을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살인하는 것보다 더 실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말입니까 어떠한 살인의 경우도 마음의 분노로부터 형제와 화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질러진 결과인 것입니다.

넷째, 율법 순종의 동기입니다(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천주교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연옥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보편주의자들이 마지막에는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것도 이 구절 때문입니다.
왜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그 때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옥에 갇힙니다. 빚진 사람은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합니다. 끝내 못 갚을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배상할 기회를 모두 잃기 때문에 영원히 옥에서 나올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람의 힘으로 마지막까지 빚을 다 갚을 수 없게 되면 친구나 친척이 도와 주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또는 빚을 갚을 기회가 있는데도 갚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형리의 보복으로 더 혹심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천주교는 부모나 자식이 죽은 자를 대신하여 돈을 바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옥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영혼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부러 갚을 기회가 있는데도 갚지 않고 완강하게 회개할 기회를 거부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께 빚진 것은 스스로 갚을 수 없으므로 믿음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빚을 사람들에게 너무 심하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완전한 용서를 주시든지 아니면 완전한 벌을 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빚은 어떤 사람도 대신 갚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 “호리”가 우리 말로는 저울이나 자의 눈금 하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을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통용 되었는데 구리나 혹은 청동 동전의 4분의 1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하면 5원쯤 된다고 할까요. 이 작은 빚이라도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행위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결과로 나타내 보이는 그 행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그 행위를 유발해 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연히 외식적이고 이기적이며 의식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은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못하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의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한 것이 없지만 주님은 용서할 근거를 마련 하시겠다는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순종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율법을 진심으로 따르려는 동기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다음으로는 적극적인 동기에서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 뿐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주님 명하신 법을 지켜서 사람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칭의를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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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15-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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