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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지 않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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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9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4  흔들리지 않는 비결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1-4)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한다. AD 30년경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된다. AD 31년경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통해 남자만 오천명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 이들은 주로 솔로몬 행각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가정공동체로 모여 함께 기도하고 떡을 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눴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온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날마다 늘어났다. 이런 추세라면 예루살렘이 100% 복음화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교회를 흔드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세상이 흔들 때 흔들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비결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교회는 왜 흔들릴까? 흔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때 가장 위기감을 느끼며 교회를 흔들고 싶었던 그룹의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두개파 사람들이다. 사두개파는 대제사장과 성전을 중심으로 온갖 종교적 특권을 누리던 사제 귀족들이었다. 성전은 한마디로 사두개파들의 밥줄이었다. 그들은 성전세와 환전으로 폭리를 취하며 이권을 챙겼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환전상을 뒤엎어 버렸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사두개파는 사람들을 매수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동하게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루살렘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 병든자가 치유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병든 사람을 침대채로 거리로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게 되길 바랬다. 그런데 실제로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다 나음을 얻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위기감을 느꼈다. 사도행전 5장 17절은 그들의 정서를 말해준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여기서 시기는 분개와 질시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던 나사렛파 운동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그것이 들불처럼 번지게 되자 그들은 당황하게 된다. 사도들이 부활을 외치고 다니는 것 또한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세도, 죽은 자의 부활도 믿지 않았던 지극히 현세지향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다가 자신들이 구축한 권력체계가 무너져내릴까 불안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흔들리기 전에 교회를 흔들기 원했다.


교회를 흔들려면 누구를 흔들면 될까? 초대교회의 대표격인 사도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둔다. 사도들은 거기서 공권력의 힘을 맛보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불심검문에 걸려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다. 민족문학의 밤 포스터를 붙이러 신촌에 갔는데 그 포스터에 광주민주화운동 때 죽은 아빠의 영정을 들고 있는 한 아이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분께서는 장시간 협박하다가 나올게 별로 없었는지 그날 밤 훈방조치 후 풀어주었다. 공권력 맛도 못보고 나왔지만 제대로 맛보면 인생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었다. 사도들은 그날 밤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 준다. 그리고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이른다. 그들은 천사의 명대로 새벽에 성전에 가서 백성들을 가르친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 소식을 곧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세력을 더욱 확보하기 원했다. 그래서 이번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이스라엘 원로들을 다 모았다. 그리고 다시 사도들을 잡아들였다. 대제사장이 그들을 심문했다. 행 5: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가 답변한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공권력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과 태도가 가능할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승천도 그들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신 성령을 직접 경험했다. 그들은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권력이 아무리 위협해도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 성령의 체험, 그것은 사도들이 공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교회를 흔드는 세력은 일차적으로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내부적으로도 흔들림을 경험한다. AD 33년경의 일이다.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가 흔들릴 수 있는 내부적 원인은 서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이스라엘 본토에 살면서 유대의 문화와 종교적인 관습을 유지해온 사람들이다. 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자라나 헬라어를 하고 헬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게 된 것은 팩트였다.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분명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원망’이라는 것은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원망은 파급효과가 있다. 관계를 삐걱거리게 한다. 초대교회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처음 강력했던 성령충만이 사라져 갔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성향, 다른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3년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도들의 진단을 살펴보자. 행 6:2-4,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는다. 접대하는 일 때문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본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열쇠다. 인간적인 원망이 나온다는 것은 성령을 따르기보다 인간적인 나의 성향과 판단이 앞서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 안에 물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공동체의 관계까지 흔들리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원망이 생길 때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다시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접대하는 일을 위해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택하게 한다. 스데반, 빌립 등 일곱명의 사람이 선출된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 헬라식 이름이다. 더이상 불평이 없도록 헬라파 사람들을 중용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본문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흔들리는 결정적 사건이 나온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이 순교한 사건이다. 이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된다.


사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를 감히 흔들 수 없었다. 교회가 온 유대인들의 칭찬과 호의 속에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히브리파 제자들도 모두 본토 유대인으로 성전 기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가 당국자들을 자극했다.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7:48) 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는 성전모독죄에 해당한다. 성전모독죄는 산헤드린의 결의에 의해 사형집행이 가능한 죄였다.


스데반은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대히 종교당국자들을 직면했다. 행 7: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말에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인다. 그리고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둔다. 사울, 즉 바울은 스데반의 처형 담당자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의 처형을 계기로 유대당국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합법적으로 핍받할 명분을 얻게 된다. 스데반이 예루살렘 교회에 새로 임명된 7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된다.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하루아침에 풍지박산이 난다. 모두 흩어지고 만다. 더이상 말씀을 들을 수도,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할 수도 없었다. 교회는 끝난 것일까?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교회가 새롭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흩어진 사람들이 교회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던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성경은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고 복음전파의 결과를 전한다. 빌립은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사(가자) 근처에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다.


사도행전 8:1절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박해라는 상황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할 믿음의 사람을 키우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복음을 예루살렘 만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열방에 전하게 하신 것이다.


급격하게 외부의 상황이 변할 때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주목할 한 사람을 찾으신다. 상황이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반석이신 하나님, 그 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 위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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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우 강제수용소


필립 얀시가 전하는 독일 다하우 수용소에서 있었던 한 실화를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다하우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곳이다. 4년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예배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가보니 직원이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우리 가족 모두가 수용소 담장을 넘어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 수용소에 크리스천 리거라는 사람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절망 가운데 투옥된 한 달만에 부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안부와 함께 사도행전 4:26-29절 말씀으로 끝을 맺은 편지였다.


행 4:26-29,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그런데 그날 저녁 그는 심문을 받기 위해 불려가게 된다. 심문실 대기실에서 그는 먼저 심문을 받고 나온 한 목사와 마주치게 된다. 그 목사는 뭔가를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지나간다. 긴장되었던 심문이 끝나고 리거는 막사로 돌아와 그 물건을 꺼내 본다. 성냥갑이었다. 열어보니 성냥을 없고 접혀진 종이 쪽지가 있었다. 종이 위에 뭐가 씌여져 있었을까? 사도행전 4:26-29절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본 리거는 심장이 뛰었다. 그에게 그것은 우연일 수 없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수용소 생활은 4년 더 계속되었지만 그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다른 수감자들과 지나칠 때마다 힘있게 악수를 했다. 그 힘있는 악수가 기도였고 찬송이었다. 이 짧은 악수의 순간이 예배였던 것이다. 이 악수를 통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주고 받았고, 서로를 격려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다하우 수용소는 가장 많은 생존자를 남겼다고 한다. 리거는 살아남아 전쟁 후에 다하우 수용소의 안내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악인의 위협함을 굽어보시는 분이시다. 그는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굽어보심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자신의 일을 찾았던 것이다.


상황이 나를 죄여올 때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굽어보신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나의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래서 상황이 자신을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로 흩어졌지만 흩어진 곳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힘든 환경을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장소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흩어진 교회로 성령이 일하시는 도구로 살아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와 같은 외적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은 다른 시대에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흔들고 있다. 합리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세상의 가치로 교회를 흔든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세속화로 개인들을 흔든다. 이 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과거 외적인 핍박은 교회를 더욱 강하게 했다. 순교의 피가 오히려 교회의 씨앗이 되어왔다. 그래서 아무래도 사탄이 전략을 바꾼듯하다. 오늘날 사탄의 역사는 박해와 핍박보다 더 교묘하고 영향력이 있다. 나를 흔드는 대상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때문에 흔들리고 있는가? 아니 무엇에 물들어 있는가? 초대교회의 박해와 그로 인해 흩어져야만 했던 환경들은 결국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일으키려는 초대장이었다. 여러분의 삶도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포기하고 절망하라는 싸인이 아니다. 여러분 역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초대장이다. 여러분이 갑자기 직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흩어진 곳에서도 여전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주님의 뜻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여러분이 주변사람과 관계가 어려워지고 여러분의 삶과 상황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안주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내 안에 성령의 인도함보다는 인간적인 불평과 원망이 자라고 있지는 않았은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변화된 상황 속에서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겸손히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흔들림없이 사명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세상 많은 사람들이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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