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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화와 복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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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0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8 신화와 복음 사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행14:11-15)


미국에 타겟(Target)이라는 대형 할인점이 있다. 타겟에는 통계 부서가 있는데 각 매장에서 모은 데이터를 분석해서 매출을 올릴 방안을 모색한다. 이들은 소비자가 뭘 사갔는지만 살피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나이, 성별, 혼인여부, 자녀 수, 집 주소 등을 함께 분석한다. 타겟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한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타겟은 그들이 개발한 예측 모델을 통해 한 고객이 임신부라고 판단하고, 계속해서 맞춤형 쿠폰을 보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고객은 고등학생이었다. 집에서 쿠폰을 확인한 아버지가 타겟 매장을 가서 항의했다. “고등학생에게 아기 옷하고 아기 침대 쿠폰을 주는게 말이 됩니까?” 매장 담당자는 사과하고 그 일을 수습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담당자가 다시 사과차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딸과 얘기를 해보니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더군요. 딸이 출산 예정이랍니다.” 타겟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그 소녀를 매일 보는 가족도 알지 못하는 임신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요즘 알고리즘을 개발한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들을 연구해내는 것이다. 구글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알파고(AlphaGo)였다.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4대 1로 이겼다. 이 대결 후 BBC 뉴스는 ‘알고리즘이 직관을 이겼다”고 평가했다. 컴퓨터의 데이터 분석이 인간의 직관을 앞서게 된 것이다. 유발 하라리라는 유대인 역사학자는 최근 그의 책 ’호모 데우스’에서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시대가 온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믿지 않고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하는 ‘데이터교’의 탄생에 대해 예측했다. 기독교, 불교가 아니라 ‘데이터교’다.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종교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알고리즘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파악하고 정보를 제공해주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우리 자녀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감정보다 알고리즘이 제시해주는 결혼할 상대를 고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을 결정하는 신화는 실리콘 밸리에서 만들어진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듯이 우리는 이들이 말하고 열어가는 신화와 같은 미래를 거역할 수 없을 듯 하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바울 당시 당대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신화가 나온다.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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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고 1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구브로,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에 이른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이 적었던 것 같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없다. 바울은 이곳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난다. 바울은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친다. 이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 자기들의 방언으로 소리를 지른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행 14: 12-13절,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이들은 어떤 신화를 믿고 있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모시는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로마신화에는 루스드라를 배경으로 한 신화가 있다. 그 신화는 오비디우스라는 사람이 쓴 ‘변신이야기’에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제우스신과 헤르메스는 가난한 여행자 차림으로 루스드라을 방문한다. 쉴 곳을 찾아 천여 가구의 문을 두드렸지만 사람들은 그 행색을 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노부부인 빌레몬과 바우시드는 그들을 영접하고 있는 양식을 다해 접대를 한다. 후에 제우스는 이에 대한 감사로 그들의 초라한 오두막을 금지붕과 대리석 기둥이 있는 신전으로 바꿔준다. 그리고 그들을 신전의 사제와 여사제로 임명한다. 반면 그들을 냉대했던 사람들의 집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신화의 내용이다.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신화를 변용하여 로마 신화를 썼는데 그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였다. BC 43년에서 AD 18년까지 산 사람이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한 것이 AD 45년 경이니까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는 바울이 오기 한 세대 전부터 그 마을 사람들 마음 속에 새겨진 신화였던 것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들의 신화와 연결지었다. 신화는 분명 실재가 아니다. 실재처럼 전해지는 허구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신화를 믿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이다. 신화에 나오는 대상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파멸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신화를 믿는 두번째 이유는 현실에서 성취하기 소원을 이루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바나바를 제우스로, 메시지를 담당한 바울을 헤르메스로 여겼다. 그들은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려 했다.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신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가 파멸당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들을 잘 대접함으로 노부부처럼 신의 축복을 받기 원했던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사람들 안에 있는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무리를 말렸다. 그들은 신화에 젖어 있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행 14:15-18,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세상사람들은 신화에 빠져있을수록 복음을 들어도 자기식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화와 연결시켜 적용한다. 복음을 들어도 자기가 믿고 있는 신화를 강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 신화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재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신화에 따라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뻔한 사건이 벌어진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던 사람들은 유대인의 충동질로 인해 바울을 돌로 치는 폭도로 변한다. 자기 신화에 부합되지 않기에 이젠 정반대로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던 것이다.


다행히 바울은 깨어나 다음 날 더베로 간다. 루스드라 사역은 아무 열매없이 끝이 난 걸까?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이곳에서 디모데를 만난다. 바울은 후에 그에게 남긴 서신에서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을 추억한다. 딤후 3:10-11,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신화로 가득찬 루스드라에서도 복음에 반응한 제자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신화를 믿고 있는가? 어떠한 신화 속에 살고 있는가? 기독교 세계관으로 유명한 브라이언 왈쉬는 오늘날 세상이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진보에 대한 신화’라고 말한다. 이 신화는 ‘인간의 이성이 이 세계를 자유롭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도록 허락한다면 진보는 필연적’이라고 선언한다. 이 진보를 통해 번영과 안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인의 직장생활이 과학지상주의, 기술지상주의, 경제지상주의라는 세가지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과학지상주의가 무엇인가? 과학이 권위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는 믿음이다.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계시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믿음이다. 과학지상주의의 시대에 성경은 더이상 사람들을 이끄는 계시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기술지상주의는 무엇인가? 과학지식을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으로 쓸모있게 전환하여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작년 다보스 경제포럼 이후 세계는 4차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과 빅테이터를 통한 기술 발전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경제지상주의는 무엇인가? 생활수준 향상이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기에 우리는 과학, 기술, 경제적 진보가 역사적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브라이언 왈쉬는 우리가 지금 바벨론 포로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바벨론의 현실 규정, 바벨론의 삶의 방식, 바벨론의 노동관, 바벨론의 경제구조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유배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안주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바벨론의 신화가 우리에게 군림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공신화와 진보에 관한 이야기에 상상력이 사로잡혔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복음을 되풀이해서 들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진보의 신화를 따라가느냐 복음의 실재를 살아가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 진보의 신화를 따라가는 사람은 내가 먼저 돈을 벌고 성공해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경제논리로는 말도 안 되지만 믿음으로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실재인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번영과 진보의 신화는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다. 그것이 기복신앙으로, 번영신학으로 나타나 있다. 과거 우리가 너무 못살았기에, ‘잘 살아보겠다’는 성장제일주의 가치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수용된 결과였다. 끊임없이 진보해야 한다는 가치는 한국의 근대사를 이끈 힘이었다. ‘빨리 빨리’ 열심히 일한 결과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함께 불어닥친 IMF 위기는 우리 사회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스펙이 없으면, 경쟁력이 없으면 망할 수 있구나…’


열흘 전 한국에서는 ‘4차산업혁명 위원회’라는 것이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어졌다. 4차산업혁명으로 나타날 변화에 대해 국가적인 방향성을 세우기 위함이다. 4차산업혁명을 위한 진보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화로 이야기 되고 있다. 이 신화가 유독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신기술을 먼저 취하지 못하면 망하게 될까하는 두려움이다. 두번째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시대를 앞서서 이끌어간다면 많은 불편과 고통을 없애는 유토피아가 열릴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신화는 아렇게 사람들 안에 있는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한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의 삶은 또 다시 진보를 위한 무한경쟁에 내몰릴 것이 예상된다. 기술개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를 차지하며 신화가 되기에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화가 이야기 되는 사회에서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지 증언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신화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복음의 실재를 살아가라는 소명을 받았다. 우리가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살아갈 때 자기 신화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돌을 맞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돌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추수감사절, 한 해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는 절기다.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성공신화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결코 감사할 수 있는 삶을 누릴 수 없다. 그 신화 앞에서 나의 삶은 여전히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루스드라 출신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딤전 4:7-8, 10,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며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집집마다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광야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자신들의 장막에 풍성한 것으로 채워져서 감사한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도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 한 분의 존재만으로 감사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거친 세상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주인됨을 고백하는 것이 복음이다. 바라기는 세상의 신화와 복음 사이에서 돌을 맞더라도 하나님 한 분을 선택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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