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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주목하는 삶(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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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목하는 삶(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7, 시편 139:1-6                                                                   

2018. 1. 21 오전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시편 139:1-6, 새번역)


다음은 공동번역입니다.

1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2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3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4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

5 앞뒤를 막으시고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

6 그 아심이 놀라와 내 힘 미치지 않고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납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다 하였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젊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세상에서 자기처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부인은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비춰 보며 감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자기는 누가 봐도 아름답게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얼굴을 다듬으며 좀 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가장 아름답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해지기가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교만할 것도 없는데 교만해지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셨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데 이것이 자기 스스로 된 것인 양 우쭐댑니다.


이 여인이 하도 예쁜 체 하니까 사람들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도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용모를 과시하며 감탄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주위 사람들은 참 민망해집니다. 정작 그 여인은 그렇게까지 잘 생긴 얼굴이 아니었는데 자아도취에 빠져 그렇게 잘 생긴 줄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만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남에게 아량을 베풀고 신앙생활도 제일 잘하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참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내놓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난 것으로 생각하며 자기가 사는 방식이 옳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인은 사람의 인생을 평생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 하는데 오직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자기 인생의 전부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아십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되 특별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십니다. 오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다 진실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상상의 날개를 펴고 그 어떤 생각이라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생각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물론 좋은 생각도 하지만 말하기도 부끄러운 생각을 품기도 합니다. 끔찍한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몸서리치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생각을 할까 하고 소스라쳐 놀라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쑥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현실은 아니니까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생각 속에는 우리의 목적과 계획과 욕망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 속에 내 인생의 목적이, 인생의 계획이, 내 마음의 욕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좋은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요 나쁜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러운 사람입니다. 깨끗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상대방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광부가 광산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다 분별하시고 계십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생각까지 안다는 것은 내 전부를 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 머리로 상상할 수 없는 분입니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2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아신다는 말은 그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내 생각을 감추려고 해도 소용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두꺼운 교만에 속마음이 덮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거짓과 편견으로 엉켜진 마음도 주님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 보십니다. 무의식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다 아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그것이 탄로날까봐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낸 그 음흉한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속마음을 다 아시고 그 간교함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약속하고도 탐욕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물질을 숨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베드로를 통하여 드러내시며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무엇을 숨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그 어떤 것이라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생각하고 거룩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2. 하나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말을 선한 곳에만 사용하지 않고 악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말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언어생활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주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우리가 쓸데없는 말을 하건 선한 말을 하건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말로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의 의미를 아시고 어떤 생각에서 나온 말인지 다 아십니다. 아니 내 혀도 미처 말하지 못한 내 입 속에 있는 말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입으로 얼마나 죄를 짓는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왕족으로서 대신이었으면서 선지자였지만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고 고백했습니다. 이것도 용기있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입이 부정하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되는 일입니다. 선지자로 소명을 받는 자리에서 첫 고백이 입술의 문제였다는 것도 우리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왕에게 영향력 있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우리의 혀는 아무리 교육을 받고 수양을 하고 조심을 해도 조절이 잘되지 않으니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혀로 남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으며 가슴아프게 했습니까? 이 혀로 자식의 길을 막고 있는 사람, 이 입 때문에 가정이 파탄한 사람, 이웃 관계가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혀를 자갈먹이라"(약 1:26)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갈을 물고 다닐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가 입으로 실수 한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많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전병금 원로목사님이 대학에 다닐 때 학생 데모를 주도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을 향해 한일회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그만 체포되어 남대문 경찰서에서 서울지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데 깜짝 놀랄 일을 당했습니다. 전병금 학생이 학생총회에서 데모를 하자는 구체적인 안을 제안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것이 녹음이 되어 있어서 수사관들이 들려주었습니다. 주동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그 녹음을 듣고는 그만 꼼짝 못하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한신대 6.3 사태 데모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경찰들이 학생총회를 하는 강당에 녹음장치를 했을까 의아해 하면서 자기 말이 한마디도 가감없이 밝혀지고 말아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요즘은 더 합니다. 이렇게 때로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말을 숨길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내가 말한 것이 녹음이 된다든지 기록으로 남아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평생동안 말한 것을 어김없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입술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달라졌습니다. 부정한 입술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술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의 불로 우리의 입술을 태워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 입으로 남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이제 남을 죽이는 입술이 아니라 살리는 입술이 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언어생활이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나의 행동을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본심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와 편견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남을 오해하여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다 아십니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동기까지라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어떤 악행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시 139:2)라고 했는데 앉는 것은 쉬는 것을 말하고 일어서는 것은 일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쉬는 이유도 일하는 이유도 아십니다. "나의 길과 눕는 것"도 아십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 지식이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리이다"(6절)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심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어떻게 꼼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두려워서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더러운 것을 다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안다는 사실은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일이지만 주의 뜻대로 사는 성도에게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잠깐 동안도 눈을 떼지 않고 나를 지켜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의 말씀대로 따라 살지 않으면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눈길이지만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에게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눈길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다해서 감사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로 주님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무엇이나 된 것처럼 교만하면 어떻게 합니까?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심을 보시고 다 아십니다.


마가복음 12:41-44에는 주님이 주목하여 보신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 없는 한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주목하시는 순간 그 여인은 특별한 여인이 되어 오늘날 우리까지도 알게 된 유명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시는 인생이 되면 인생이 달라지고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에게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한다고 선언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약속하십니다. 성도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형편을 다 아십니다. 우리를 우리 보다 더 잘 아십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억울합니까? 무엇이 그렇게 속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주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이 주목하는 삶을 사십시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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