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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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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아가서 5:2                                                                                          

2018. 3. 11 


날로 재밋어지는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크게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장 1절부터 3장 5절까지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결혼 전 연인 관계로, 열렬한 밀회, 혹은 보고픔, 그리움, 사랑을 기록하고 있고, 2부에는 3장 6절부터 5장 1절까지 장엄하고도 화려한 혼인 예식의 광경이 기록되어, 예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맞게 된 두 사람의 기쁨과 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3부에는 5장 2절부터 8장 14절까지 갓 결혼한 신혼 초의 약간의 갈등문제, 그러나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가 된다는 내용, 두 사람의 사랑이 두 사람의 사랑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주변으로까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을 해놓고 있습니다.


“내가 잘지 라도 마음은 깨었는데"(5:2)


술람미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깨어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었지만 마음은 깨어 있었기에, 사랑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사랑하는 자가 가까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문을 좀 열어 달라,’지금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얼마나 애타게 부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나의 누이야 나의 누이야, 문을 좀 열어다오’,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사랑아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비둘기야 문을 좀 열어 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 부르면서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가 치밀어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벌써 떴겠지만 솔로몬왕은 인내로 문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하구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날을 세우며 문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측은할 정도입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밤이슬에 젖도록 밖에서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왕입니다. 얼마든지 자기의 힘을 과시해서 닫쳐진 문을 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향해서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종속물처럼 여겼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아니하고, 남자의 부속물 정도로 보았던 그런 고대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열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그런 때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거기에 편승하고, 그런 문화, 그런 전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아내에 대해서 극진한 사랑을 베풀며,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듦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존중하며 상호 인정하면서 사랑과 존경으로 살도록 부부질서를 세웠습니다. 솔로몬은 고대사회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살았지만, 사회적 문화를 따르지 아니하고 사랑의 법을 따랐습니다.


여자가 계속해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이렇게 깊은 잠이 들었을까? 지금은 늦은 시간이니 깨워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솔로몬 왕의 모습입니다.


솔로몬 왕은 상대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화난 목소리를 내지 아니하고 아주 부드럽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아내를 깨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큰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떨까? 아마 “문 열어! 문 안 열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다음 “벌써 자빠져 자는 거야! 하늘같은 남편이 왔는데 일어나지 않고 뭐하는 거야” 하고 더 격하게 화를 버럭 내겠지요. 그래도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발로 문을 막 걷어차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감정풀이를 하지 아니하고 나긋나긋하게 계속해서 아내를 부르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매너와,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깊은 사랑을 배워야겠습니다.


솔로몬 왕은 남편으로서의 권위 보다는 아내를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 아내란 남편에게 ‘돕는 배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돕는 배필’이란 하나의 동업자 혹은 협력자,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는 사람, 연약한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억압하고 비하시키고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솔로몬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돕는 배필’,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돕는 배필’이 되려면, 남편보다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돕는 배필’ 노릇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 하면 그 영어를 알아야 가르칠 수 있고, 수학을 가르친다면 수학을 알아야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돕는 배필’이 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편에게 아내를 ‘돕는 배필’로 주신 것은 단순히 주종 관계가 아니며 밥이나 해주는 식모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꼭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아가서 5장 2절을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이 잔다고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신랑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늘 좋고, 날마다 좋고, 항상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혼 초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했던 것이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그것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좋을 때는 다툴 일도 아닌데, 기분 나쁘면 크게 다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함께 10년 20년 살다보면 권태를 느끼며 서로 갈등관계가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사랑의 야릇한 감정이 살다보면 무디어가고 잊혀져갑니다.


우리는 솔로몬 왕처럼 변함없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신부에게 계속 사랑의 주파를 보내는 솔로몬 왕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한없이 넓은 가슴, 깊은 이해심을 봅니다. 간혹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옹졸한 사람이 있고,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일도 소화하지 못하고 다툼의 불씨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 말씀에 대하여 영적인 의미를 찾아봅시다.


‘내가 잘지라도’ 성도들 중에는 그렇게 뜨겁고, 믿음이 좋고, 신앙 경력이 십 수 년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항상 독수리처럼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느 때는 신앙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나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을 받은 사람도 때때로 신앙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했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잡니다. 치욕스러운 잠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일 가 친척 아비 집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내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속여 애급 왕의 침실에 들도록 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인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왕입니다. 전무후무한 왕으로 찬사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다윗도 한 때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계획적으로 죽게 만들어 결국은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을 봅니다. 엘리야는 불의 사자입니다. 능력의 사자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집니다. 까마귀가 먹을 것도 날라다 줍니다. 기도하기만하면 응답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예수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거자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 앞에서 그는 겸손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 3:11)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망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감옥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됩니다. “오실 자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흔들리고 있는 허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 제자들을 보면 아주 중요한 순간, 중요한 자리에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졸음 때문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펄펄 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때는 곤두박질 할 때가 있고,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냉기가 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이요, 신앙의 잠을 누구든 잘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리 잔다 할지라도 마음은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깨었는데’ 라고 했습니다. 잠을 자는 것은 육신이 피곤하기 때문에 잘 수가 있고,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침체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어떤 시험 때문에 실족할 수 있고, 어떤 문제 때문에 시험 들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깨어있어야 됩니다. 비록 육신의 잠은 들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감탄 하듯이 “사랑하는 주님의 소리가 들리는구나!”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믿음 있는 성도는 실족하여 넘어졌다 하더라도, 혹 시험에 들었다 하더라도 아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넘어졌다 할지라도 넘어진 자리에서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들도 죄 가운데 빠졌던 것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도 죄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어 있는 성도는 비록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빨리 돌아서야 될 텐데’, ‘내가 이 진흙탕 속에서 빨리 벗어나야 될 텐데’, 이런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벗어나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침륜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매를 맞고 깨닫는 경우, 혹은 어떤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자리에서 벗어나 옛날의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깨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주 타락하지 않습니다. 완전 타락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약해서 타락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오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나의 사랑하는 주님은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나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참 사랑입니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데, 주님은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시어 나를 지켜 주십니다.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내가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 속에 있을 때, 내가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주님은 찾아 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상호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합니다. 목사야, 다시 부릅니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사랑하는 자야,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구원받은 자야,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아들아, 계속 이름을 바꿔가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토록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지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리가 밤이슬로 다 젖도록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음을 봅니다.


이 은혜의 사랑,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 달라, 문 좀 열어 다오’ 하고 애원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마음 문을 열어야 되는데, 굳게 걸어 잠그고 문을 열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마음을 오픈하면 좋겠는데, 한 번 닫혀 지면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고집을 세웁니다. 문을 열지 아니하니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이미 잠겨진 문 때문에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합니다.


이제는 문을 열고 주님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 가운데 빠졌을 때에, 마음을 다 열어놓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그 죄를 기억도 안 하십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그 죄를 다 치운다고 주께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물욕과 정욕, 사욕으로 닫혀진 문을 열기를 바랍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문을 열면 주님께서 들어오시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애타는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그걸 절절히 느끼지 않습니까? 밤이슬을 다 맞아가면서 내 사랑하는 자야, 나의 누이야, 내 비둘기야, 나의 완전한 자야, 이렇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러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한두 번 부르다가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면 오해를 잔뜩 하고 그냥 가 버릴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주님은 항상 내 곁에 와 계십니다. 이 큰 은혜의 깊은 사랑 늘 간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당회나 제직회나 신도회에서 내가 주장하던 안이 결정되지 않고 다른 안이 결정 되었다 해도 일단 결정된 것에 대하여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협조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며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계속 불만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위해, 교회 화평을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엽시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십시다. 주님께서 밤이슬을 맞고 새벽이슬을 맞고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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