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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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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1-19.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 안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내용이 다 포함이 되었다. 이 천지창조 속에는 시간, 물질, 존재, 환경, 인류의 사회적 문화의 진보발전이 다 들어있다. 그러나 생물들의 진화는 안 들어있다.

 

진화라고 하는 것이 짐승을 인간처럼 생각을 한다면 어떤 짐승이 생각할 때 내가 땅에서 살면 안 되겠구나. 공중을 날아야겠다라고 생각을 해서 내가 공중을 날으려면 날개가 필요하겠구나라고 하면서 계속 나는 날개가 필요하다. 나는 날개가 필요하다라고 하면 날개가 생기는 것처럼 진화론을 펼치고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반적 이치에도 안 맞는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씨는 씨대로 들어가는 거고, 종류는 종류대로 되는 건데 진화론은 이게 다 부정이 되니 이 진화론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정신병자 소리다. 이치에 하나도 안 맞는다. 세상에서 이런 연구를 한 사람을 박사니, 뭐니하고 있으니 뭐가 되겠느냐?

 

2-5: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3절에서 빛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성도들이 이것을 보면서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신 것은 잘 알면서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한 이것도 첫째 날의 창조에 포함이 된 것임을 생각을 잘 못한다.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여기에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와 빛을 첫째 날에 창조하신 거다.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이는 구별 분별되고 생산이 되는 걸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에서 구별 분별을 못한다면 이 사람이 빛을 안다고 할지라도 말도 안 되는 거고, 이 사람은 빛이 없는 거고 어두운 거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구별 분별이 없이 사는 것을 바른 삶으로 쳐주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도 보면 시골사람들 중에는 배우는 게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사는 밥그릇 숫자밖에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머리로 개발되고, 만들고, 발전되고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게 없이 그저 산다. 이렇게 사는 걸 하나님이 쳐주겠느냐? 안 쳐준다. 그 생애를 값진 것으로 쳐주지를 않는다. 민족적으로도 이렇게 살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 정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종노릇을 하게 된다.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인간세상이 이런 거다.

 

우리나라도 보면 전통을 중시하며 이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조그마한 땅에서 전통만 따라 살다보면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건데 누가 이걸 알아주느냐? 그러니 얼마나 무시를 당하겠느냐?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의 힘은 육신의 힘이 아니라 깨우침이다. 머리 깨우침이 없으면 이 사람은 지배를 받게 된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무기나 육신의 힘에 있는 게 아니라 머리를 쓰는 데 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파키스단 이쪽에는 불교인들이 많아서 성지라고 하는 목적지까지 길을 가면서 엎어져서 절을 하고, 다시 몇 걸음을 걷고 또 다시 엎드려서 절을 하면서 간다. 그런가 하면 온 가족이 리어카에 먹을 것을 잔뜩 싣고 가기도 한다. 이게 사람이 할 생각이냐? 사람이 가질 정신이냐? 인간으로서 참 한심하다. 그렇게 해서 뭐가 남느냐? 그렇게 하면 보나마나 무릎이고 팔에 병밖에 더 있겠느냐? 정말 답답하다. 구원을 놓고 생각하면 불쌍하고 처절하다. 이런 게 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밝음이 나오는 거다.

 

요즘 교회에서 세계 각지로 나가서 선교활동을 많이 하고 있고, 교인들은 이걸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외국에 가서 전도한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해서 좋게 보고 있는데, 아무리 자기 목숨을 내놓고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한다고 해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본질의 신앙이 아니라면 이것은 성령에 감화 감동도 안 되고 선교도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먼저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해 준 후에 아무에게도 가지 말고 제사장에게 곧장 가서 나은 것을 보이라고 했는데, 고침 받은 사람이 가면서 사람들을 붙들고 다 얘기를 하니까 주님이 숨어버렸다. 왜 숨은 거냐? 주님은 구원의 일을 하는 게 목적인데 육신의 병을 고치는 분으로 소개를 해 버렸으니 주님의 일을 방해했구나. 복음의 일을 방해했구나. 오늘날 주님을 믿는 기독교 세계가 어떠냐? 이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교회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쪽으로 자꾸 나간다. 이건 복음이 방해가 된다. 계시가 안 나타난다 그 말이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걸 영적으로 보면 성령님은 진리생명의 말씀 위에서 역사를 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주권 섭리 면으로 보면 주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야 하는 거지만 교훈적으로 보면 말씀을 전하는 자가 진리생명의 말씀이 아니라면 성령님이 빛으로 역사하시지 않는 거다.

 

진리생명의 빛을 받지 못한 성도는 어둡고 아무 것도 모르는 건데, 발설하는 자가, 전하는 자가 성도에게 진리생명의 말씀을 주면 이것을 받는 성도에게 빛이 비취는 거고, 빛이 비췬다는 것은 밝아지는 거고, 밝아진다는 것은 구별 분별이 된다는 거다. 이 역사가 들어가는 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상태가 되는 거다.

 

이런 예를 보면 그동안 어느 교회에 가던 다 비슷비슷한 말씀으로 들렸는데 어느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으니 , 여기는 말씀이 다르구나. 이게 생명의 말씀이로구나하고 깨달았다면 이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상태인데, 이럴 때 문제는 뭐가 다른 건가?’ 하고 근원을 캐고 들어가야 한다. 이게 믿음이 들어갈 수 있는 성도의 마음이다. ‘이 교회의 말씀이 뭔가 다르긴 한데 어쨌든 어느 교회의 하나님이던 다 똑같은 분이지하고 말아버린다면 이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왜 다르냐?’ 하고 근원을 살펴서 이래서 다르구나. 저래서 다르구나하고 깨닫는다면 생활 속에서 지혜도 나오고, 모든 사물을 볼 때도 지혜가 나오는 거다. 안 그러면 지혜가 나오는 머리가 안 된다. 이러면 사는 것도 생고생이 돼버린다.

 

이에 대한 예를 든다면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큰 집을 맡기면 , 좋다하겠지만 문제는 그 집을 건사할 수 있는 지식이나 세금 등을 낼 돈이 있느냐? 결국 그 집을 팔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자기의 능력 것, 자기의 분수 것이라는 게 있는 거다. 실력의 분수, 경제의 분수가 있는 거다. 실력도 없는 사람에게 큰 것을 맡기면 이 사람은 이 큰 것을 이끌어 나가려니 벅차서 숨을 못 쉬게 된다. 그리고 자꾸 그 쪽으로 신경을 쓰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임에도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신앙양심은 세상 쪽으로 무게가 내려가 버린다.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보이고 나라적으로 보여도 이게 다 사람을 말해주는 거다. 사람이 없는 영토가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성경에서 어느 나라를 말할 때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걸 봐야 한다. 한 나라의 한 사람이던 수십만 명이던 어떤 정신 사상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그러니까 진리이치를 가지고 그 나라 사람들의 중심이 되는 사상을 보면 이 집이 서겠구나. 이 나라가 앞으로 망하겠구나이게 나오는 거다.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게 있는 거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마음이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사람 속에는 다 욕심이 들어있다. 그래서 혹 자기는 욕심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는 게 어려워지면 자기의 이해타산을 챙기기 마련이다. 이게 욕심이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물질적으로 돌아가 있으면 여기에는 물질 이해타산이 나오고, 자기가 사는 게 어려워지면 그 탓을 남에게 돌려서 원수도 되고, 싸움도 나오고, 죽이는 일도 나오고 한다. 특히 교회 인도자의 신앙사상이 물질초월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 교회 교인들은 다 도적맞는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의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진리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가지고 본다면 큰 실수는 안 할 거다.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은 자기의 비진리적인 지식으로 인해 속는 거다. 이게 참 불쌍하고 처절한 거다. 믿는 우리가 매사에 영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신이 진리생명의 말씀과 함께 이 사람에게 역사를 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생명이 있는 곳에 성령님이 동행 동반하신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입으로만 나불대면 안 된다.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미 말했지만 이 빛은 해와 달과 별빛이 아니라 말씀으로 된 빛이다. 사람에게 효력이 없는 빛이라면 빛이 있는 의미가 없는 거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하신 것은 영적인 의미를 담아서 나의 구원을 위해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 거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보는 거지 비신앙인이 보는 게 아니다. 따라서 3절의 말씀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니 먼저 교회의 인도자들의 세계에서 빛이 역사하실 수 있는, 즉 진리생명과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말씀으로 무장을 하고, 그 다음에 진리생명과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말씀을 성도들에게 줘야 한다. 진리생명과 성령님의 역사는 항상 동시성이다.

 

빛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냐? 물질적인 빛도 그렇지만 아는 빛, 구별하는 빛, 존재적 구별, 보이는 면의 구별, 이게 얼마나 좋으냐? 영적인 면의 구별, 정신 면의 구별, 마음의 구별, 눈에 안 보이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성령님의 눈을 가진 거다.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빛의 반대는 어두움인데, 사실 어두움이란 빛이 없는 곳을 말하는 것이라서 빛과 어두움을 나눈다고 하는 게 모순이 있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인간과 세상의 상태를 말해주려는 거다.

 

인간세상을 보면 빛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람은 어두움의 상태다. 그리고 죄악세상은 어둡고, 안 믿는 사람은 어둡다. 어두움이 있는 곳은 죽은 거고, 건설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구별 분별이 없다. 지금 불신세상이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눈으로 볼 때 믿는 사람이란 빛을 가진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 항상 빛 가운데 있으면 구별 분별이 들어가고, 길을 바로 찾을 수 있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별로 실수가 없다. 이런 면을 두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구약성경에 보면 출애굽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빛이고, 애굽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두움이다. 그러면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이 된 것이 텐트를 치듯이 빛을 가려서 그렇게 된 거냐? 그건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애굽의 소원 목적에서는, 세상소원 목적에서는 구별 분별이 없는데, 이게 어두움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거다. 또한 구약의 요셉의 경우에도 그곳에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빛의 역할을 하는 이 요셉의 혜택으로 그곳이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이지 만일 그 때에 요셉이 그 애굽을 떠난다고 하면 그곳은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움이 되는 거다.

 

여러분들 마음에 부족하나마 믿음으로 바로 하려고 하는 생각마저 없다면 이건 어두움에 접어든 거다. 빛을 가진 사람은 구별 분별이 있는 행동 활동을 하게 되고, 정신이나 말에서도 신적 도덕성이 나온다. 믿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구별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빛 된 모범성이 들어가겠느냐?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낮에 속한 사람을 말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어두움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세상은 낮과 밤의 역사(빛과 어두움의 역사)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은 궁창을 가지고 위의 물과 아랫물을 나눴다는 거다. 아랫물은 아랫물대로 쓰는 거고, 위의 물은 위의 물대로 쓰는 거다. 이걸 영적인 차원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면에서도 위의 물과 아랫물이 있다.

 

믿는 사람에게 영적인 면에서 땅에 있는 물을 원할래, 하늘에 있는 물을, 즉 신령한 말씀을 원할래?’ 하고 선택적으로 물을 때 나는 땅의 물이 좋사오니라고 대답을 한다면 이 사람은 아랫물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 말이 물질적인 땅의 물은 나쁘다는 뜻이냐? 그건 아니다. 영적인 면으로 선택적으로 들어갈 때 하늘의 물은 나쁘고 땅의 물이 더 좋다이렇게 된다면 이 사람이 가진 지식의 수준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거지 하늘에 있는 물과 땅에 있는 물 중에 땅에 있는 물이 더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창조에 있어서는 그렇게 보는 게 아니다.

 

악하다. 선하다하는 것은 세상의 지식과 하늘의 지식 중에 어느 지식을 너의 원 기준적 지식으로 삼고 사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 지식을 가지게 되면 악하다고 하는 거다. 그냥 물질은 악하다. 선하다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물질은 선도 악도 아닌 우리 인간이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의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물질적 글자적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하신 신령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시대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땅의 지식, 즉 세상을 목적으로 살면 이건 육에 속한 사람으로, 이런 사람은 영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거다.

 

먹자주의, 안 먹자 주의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믿는 우리는 자기 몸에 유익이 되면 먹고, 자기 몸의 건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먹어야 한다. 어느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해서 이것 하나만 먹는다고 해서 기운이 오르느냐? 그렇지 않다. 사람이 몸이 건강해지려면 첫째는 밥통이 건강해야 한다. 밥통이 건강해서 어떤 음식이던 영양가 있는 것을 많이 먹으면 몸의 각 부분에 영양전달이 잘 되기 때문에 몸 전체가 건강해진다.

 

요즘 몸에 좋다고 하는 약들이 많이 나오는데, 몸에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만든 자연음식이다. 이런 것으로 자기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 속이 헐거나 소화시키는데 어려운 사람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가면서 점차 회복을 시켜야 하는데 한꺼번에 폭식을 하면 몸이 배겨나지를 못한다. 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난 후에 졸음이 오는 것은 위에 부담이 왔다는 신호다. 이러면 소화가 잘 되겠느냐? 위가 부담을 느껴서 죽을 지경인데 잠이 온다고 해서 드러누우면 소화가 되겠느냐? 자기 속을 누가 다스리느냐? 자기가 다스려야 한다. 자기 몸을 다스리는 건 마음이다.

 

하나님은 나누고 구별시키는 일을 하시는데, 구별 분별을 한다는 게 눈에 보이는 무슨 줄이 있다거나 저울이 있는 게 아니라 영에 속하는 눈에 안 보이는 말씀의 잣대, 말씀의 저울, 말씀의 사상을 가지고 공간을 보기도 하고, 위의 것과 아래 것을 보기는 거다.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하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어느 것이라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무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쓸데없는 말이 없다. 우리에게도 하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쓸 말, 몹쓸 말을 함부로 해버린다. 안 될 일이다. 사람의 위엄성이 어디서 나오느냐? 말에서 나온다. 말이 옳으면 이 사람은 위엄이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매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된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인간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나에게 그대로 되어지느냐?’ 이게 있는 거다.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궁창을 두고 위의 물과 아랫물로 나눴는데,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에도 차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령한 말씀과, 신령하지 못한 말씀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만드셨으며 왜 이런 표현을 하시느냐 하면 믿는 우리들에게 성경말씀을 물질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영적인 차원으로 깨달으라는 거다.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으로 모인다. 그런데 영적인 면을 볼 때는 반대로 되어있다. 신령한 물은 그 차원이 위에서 모인다. 이는 마치 더운 공기나 더운 바람이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공기나 바람들끼리 싸우게 되면 찬 바람이 이기느냐, 더운 바람이 이기느냐? 더운 바람이 이긴다. 더운 바람은 그 성질이 위로 올라간다. 더운 바람이 위로 올라가게 되면 위에 있던 찬 바람이 아래로 밀려 내려와서 더운 바람이 있던 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 속도가 엄청 빠르다. 그래서 땅에 태풍이 불고 하는 거다.

 

영적인 차원으로 보면 신령한 것은 그 차원이 항상 상위권이다. 위다. ‘마귀가 공중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수준의 단수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마귀의 차원은 하늘이 아닌 공중일 뿐이다. 우리 성도의 차원은 이 마귀의 차원보다 더 올라간 하늘에 있어야 한다.

: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지만 예수님은 이 마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다. 예수님의 차원은 마귀처럼 공중이 아니라 하늘이다. 하늘의 차원이라는 것은 하늘에 근거가 있다는 거다. 그러나 마귀는 하늘의 차원의 근거가 없다. 그러면서도 공중에 있기 때문에 땅의 차원으로 사는 인간들보다 올라가 있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올라가되 올라가는 근거가 있는 거다. 신령한 것을 붙잡고 올라가고, 신령한 것으로 근거가 되어있다. 그러나 마귀는 이게 없다. 마귀는 하늘, 신령한 것이 아닌 물질적 사고방식과 이해타산을 가지고 올라가 있다. 이게 세상에서 말하는 세상의 존귀영광이다. 이건 신령한 근거는 없는 거다.

 

우리가 남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죽으려면 높은 하늘의 지식과 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특히 교회의 인도자들의 수준은 위에 있어야 한다. 이게 인도자들의 수준이다. 교회의 인도자들의 수준은 신령계를 근거를 하고 모든 이해타산을 따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다 땅에 떨어져 있다. 믿는 내가 분명한 이치를 가지지 못할 때는 세상의 비판을 받게 된다.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만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스라엘에 전쟁이 나기 전에 이스라엘 속에 있었다면 마치 물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모른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을 한 쪽으로 모으니까 각 사람의 사상이 불신성은 불신성대로 드러나고, 특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신앙대로 그대로 드러난 거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렇다. 우리들에게도 날마다의 생활 속에, 사건 환경 속에 이런 역사가 다 있는 거다. 그런데 땅의 차원으로 살면 이런 것을 볼 눈이 없어서 못 알아보는 거다. 그러니 넘어지는 거고, 결국은 일반차원이 돼버리는 거다.

 

믿는 우리는 영의 눈을 가지고 물질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건데, 이게 아닌 그냥 물질로 볼 때 물질 자체가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성도의 이룰구원에 이용물이다. 그래서 뭍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해서 바다를 만들거나 호수를 만들어서 11절 이후로 보면 바다에 고기를 기르고 땅에 각종 풀과 채소와 과일 등이 생산되게 했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가 생산이 되게 한 것은 성도의 입장에서 영적인 면에서 구원에 유익이 되고 생산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함을 말해주는 거다.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이걸 글자 그대로 보면 땅이 알아서 각종 풀이나 채소나 과목을 척척 내는 것 같다. 그러나 내라하는 여기에는 그것을 왜 내게 하는 것인지?’ 하는 하나님의 의사와 뜻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은 빼버린 채 하나님께서 내라고 하니까 땅이 척척 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의 예로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일이 있는데, 이 저주를 하신 것이 단순히 당신께서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먹으려고 했는데 열매가 없으니까 저주를 했다고 보면 안 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를 하셨으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씨 맺는 나무는 과일을 내야 아름답지 이게 없으면 이 나무는 저주가 돼버린다. 씨가 없으면 이 나무는 후손이 없다. 이걸 신앙 면으로 보면 성도가 씨인 생명을 퍼뜨려야 함을 말해주는 거다.

 

레위기에 보면 정하고 부정한 짐승들을 말해주는데, 새김질을 하는 짐승과 새김질을 안 하는 짐승을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다. 즉 믿는 우리는 말씀 새김질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말씀 새김질을 하려면 새김질을 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부자로 잘 살라고 하는 물질적인 가르침은 새김질이 없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도 읽고서 새김질을 안 하면 그 뜻을 전혀 모른다. 새김질을 해야 영적인 뜻이 나오고 발굴이 되는 거다. 일반음식도 입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씹지 않고 그냥 넘기면 그 맛을 모르는 음식도 있다. 씹음으로 맛을 느낄 수 있고, 씹을수록 맛이 달라지는 음식도 있다. 쌀밥 같은 것은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뱃속이 불편할 때는 음식을 오래 씹어서 넘겨야 뱃속이 편안하다. 그리고 속이 안 좋은데 잡곡이 흰밥보다 몸에 좋다고 해서 잡곡을 자꾸 먹으면 속에서 안 받는 사람이 있다. 속이 더 불편하다. 음식이 억셀수록 오래 씹어야 하고, 오래 씹을수록 소화가 잘 된다.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에 채소와 씨 맺는 풀, 각종 과목들을 내서 이것들이 씨나 뿌리로 퍼져나가고 생산이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앙적인 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광명이것도 일종의 빛이다.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 일 년 열두 달을 만드셨다.

 

15-16: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첫째 날에 빛을 만들고 빛을 낮이라 하셨고 어두움은 밤이라고 했는데, 여기 넷째 날에도 낮과 밤이 나온다. 그러면 넷째 날의 낮과 밤이 첫째 날의 낮과 밤과 뭐가 다를까? 첫째 날의 빛은 영적인 빛을 말하는 거니까 첫째 날의 낮과 밤은 영적 신앙상태적으로 보는 낮과 밤을 말하는 거고, 넷째 날에 해 달 별빛을 만들어 놓고 해와 달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한 것은 물질성적인 낮과 밤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첫째 날의 영적인 면의 낮과 밤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이해를 사키기 위해서 넷째 날에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물질성적인 낮과 밤을 만든 거다. 그래서 우리가 첫째 날의 빛에 대해 그 뜻을 제대로 모를지라도 넷째 날에 와서 해가 낮을 주관하게 하고 달이 밤을 주관하게 하신 것을 볼 때 첫째 날의 영적인 면에서의 밝고 어두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이것은 모른 채 그냥 첫 날에 빛을 만들고,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만들었다고만 말해버리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숨어있는 뜻을 못 찾는다.

 

해 달 별빛으로 주야를 나뉘게 하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믿는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면 일반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걸 미리 알 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거다. 성경에 군대가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는데, 이 산이 어느 산이냐? 자연이치를 들고 일반 계시적으로 진리가 세상으로 떨어지면 도의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라고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거다.

 

신앙적으로 올라가라고 할 때 이 말의 뜻을 질적으로 바로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이 올라가는 것인지 금방 알아듣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올라가는 신앙의 질은 빠진 채 눈에 보이는 언행심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금식도 자주 하고, 기도를 해도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러야 신앙이 올라간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백 날 해도 영적 정신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깨달아야 하는 건데, 이건 없이 자꾸 언행심사로 뭘 어떻게 하려고 해서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거다. 행동 활동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로 못 들어간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 면에 문제가 되어있다.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창세기 처음부터 훑어왔는데, 여기서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다른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본 천지창조의 말씀들을 어떻게 배웠느냐?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론을 말하는 것으로만 알지 않았느냐? 모든 성경은 바로 나 자신의 구원에 깨닫고 이용 활용 사용하는 현실의 말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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