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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섯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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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20-23.

 

지난번 것 복습부터.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 날 뭘로 빛을 만들었느냐? 말씀으로 만드셨다. 빛을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고, 그리고 빛을 낮이라,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첫 날 빛을 만들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로 있었고, 여기에 빛을 만드신 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로 있었던 것이 영원 전서부터가 아니라 만물을 만드신 첫 날 빛을 만들기 전에 지구를 만들었는데 이 지구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로 있었던 것이고, 여기에 빛을 창조하신 거다. 그러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는 이 속에 포함이 돼 있는 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는데 여기에 빛을 창조하신 것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에 빛을 비췬 것은 믿는 우리로 영적 신앙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함인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생산되고 성장되고 살아갈 수 있는 아무 근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인간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하면 빛이 없는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만든 것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것도 모른다면 이 사람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혼돈이요 흑암이요 공허의 삶이다.

 

첫 날 땅을 만들어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했는데, 여기에 말씀으로 빛을 만들어서 빛을 낯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창조 첫 날부터 빛에 의해서 낮과 밤이 생겨지는구나. 빛이 있어야 밝고 어두움을 구별 분별할 수 있구나. 지구 땅 위에는 마지막 그 날까지 낮과 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낮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생산이 나오고, 어두움은 일을 할 수 없고 사람이 잠을 잔다. 자연의 원리원칙으로 보면 사람은 낮에 일을 해야지 밤에 일을 하면 신체조건이 생리적으로 안 맞는 거다. 창조의 원리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낮에 일을 하는 것은 빛의 혜택을 받는 거고, 밤에 일을 하는 것은 빛의 혜택이 없는 거다. 원리가 그렇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의 원리를 모르니까 아무 때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일을 하고 싶으면 일을 한다.

 

그리고 빛이 있어야 구별 분별이 된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으면 구별 분별이 된다는 면에서 빛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이 어두우면 밝은 대낮이라도 구별 분별이 안 되기 때문에 어두움의 상태다. 그런가 하면 눈은 뜨고 있어도 해와 달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가 없으니 이 역시 어두움의 상태다. 영의 빛이던 물질의 빛이던 무슨 빛이던 하나님께서 비춰주셔야 만이 보고 만지고 생산을 하는 혜택이 있는 거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근거를 놓고 자기가 혜택을 입으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을 떠나서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6-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도 말씀으로 궁창을 만들었다. 궁창을 만들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궁창을 만들어 놓고 이 궁창을 기준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했다. 이걸 영적으로 보면 신앙의 세계에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거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천국의 말씀은 궁창 위의 물이다, 즉 하늘의 물이고, 반대로 세상을 주는 것은 궁창 아래의 물이다. 즉 땅의 물이다. 이런 걸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 자체는 나쁜 게 하나도 없다. 위의 물이던 아랫물이던 나쁜 게 없다. 그런데 이런 걸 들어서 믿는 우리로 영적으로 천국복음과 세상복음을 깨닫게 해 주는 거다. 세상은 세상대로 좋은 거지만 그러나 임시다. 반면에 하늘의 것은 영원히 좋은 거고 영원히 간다. 따라서 네가 어느 것을 선택할래?’ 하고 지식적으로 선택을 하게 될 때 땅의 것을 선택한다면 이 사람은 임시성적으로 사는 사람이요, 임시적 이해타산을 쫓는 거다. 반대로 천국 것으로 선택을 하고 사는 사람은 수준이 높기 때문에 아랫것은 훤히 다 보여서 바른 판단이 들어가고 바른 길을 가게 된다.

 

9-13: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에는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라했고, 땅의 한 곳으로 모인 물이 바다나 호수가 되었다. 뒤에도 나오지만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해서 땅이 드러나게 한 후에 여기에 각종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 등을 내게 해서 각 종류대로 구별이 들어가게 했다.

 

첫째 날에는 밤낮이 구별이 됐고, 둘째 날에는 궁창을 중심으로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구별이 됐고, 셋째 날 역시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해서 땅과 물을 구별하셨다. 그리고 땅에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생산이 된다. 이걸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하실 적마다 정리정돈이 돼 나오는구나.

 

요리할 때 쓰는 소금단지는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장독대에 있어야 하느냐, 부뚜막에 있어야 하느냐? 소금단지는 부뚜막에 있어야 음식을 만들 때 쉽게 집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을 습한 곳에 두면 녹아서 물이 돼버리기 때문에 부뚜막에 두면 불의 열기로 소금이 항상 뽀송뽀송하다.

 

먼저 빛으로 구별 분별을 시키고, 그 다음에 이 구별과 함께 땅이 정리정돈이 되게 해서 생산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이런 면에서 정리정돈이 된 땅을 흩뜨리지 않고(해를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지구를 잘 다스리는 거다. 이걸 영적인 면으로 보면 영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정리정돈을 잘 한다. 매사를 말씀에 합당하게 산다.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나무는 후손이 있다. 그러니까 씨나 열매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나게 한 거다. 오늘날 사람들이 열매 맺는 나무를 이것저것 교합을 시켜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데 이게 가능한 것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법칙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로 터득을 해서 이용한 거다.

 

14-19: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째 날도 말씀으로 창조를 했는데, 궁창에 광명체를 만들어서 주야로 나뉘게 했고, 또 이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도록 했다. 이 광명체는 해와 달과 별들이다. 그리고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는 것은 일 년 열두 달을 만들어서 어느 철에는 뭐가 잘 되고, 어느 철에는 뭐가 죽고 하는 등의 생태계에 철마다 변화가 있게 해서 이 땅에 만들어 놓은 동식물들이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한 거다.

 

일반적으로 남쪽에서 자연풍이 불어오면 얼었던 나무들에 물이 오른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다. 어느 인간이 이렇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연을 보고 구원을 이루는 지혜를 얻게 하려는 거다. 해 달 별을 영의 눈으로 보면 교회의 모든 인도자들과 성도들은 해 달 별에 속하고, 불신 세상 사람들은 땅에 속한다. 성도들은 그 위치와 신분이 하늘이고, 세상 사람들은 땅이다. 성도는 하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위치적, 성분적, 신분적, 소속적 입장이 하늘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뜬 광명체들은 모든 면에서 땅을 비춰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신분, 이런 사상, 이런 도덕성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입장과 수준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교회의 인도자들은 하늘의 차원은 가르쳐 주지도 못하고 성경을 들고 이방 불신 타락성적 소원 목적을 가르치니 교회가 온통 이방종교나 미신처럼 나가게 된다. 교회라면 그 수준이 복의 근원의 사람이 돼야 할 텐데 재앙 받을 자로 믿고 있으니 큰일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광명체를 만들었는데, 예수 믿는 자기는 신분적으로 광명체 중에 하나요, 하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마귀의 자녀는 땅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목적이 모든 인간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어야 할 자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만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늘의 사람으로 살지 않고 땅에 속해 살고 있으니 이는 평지의 라인보다 내려간 거다. 이게 타락이다.

 

기본구속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 불신사상은 평지보다 아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든 사고방식이나 인격의 수준이 평지의 수준보다 높은 해와 달과 별처럼 하늘의 수준이어야 하고, 안 믿는 사람을 향해서, 아직까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을 향해서 하늘의 빛을 비춰야 한다. 그러니까 계급적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그리고 깨달음의 수준이 올라가야 될 우리들이다. 본 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걸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징조를 이루라.’ 봄이 오는 징조, 여름이 오는 징조, 가을이 오는 징조, 겨울이 오는 징조를 아느냐? 봄이 오는 징조는 꽃으로 말하면 매화가 제일 먼저 핀다. 초봄에 아직 냉기가 있을 때 핀 매화의 꽃 색깔이 하얗다 못해 빛이 날 정도로 하얀 게 참 싱그럽게 보인다. 어딘지 모르게 신선미가 있고 색깔이 신비롭다. 늦가을에는 들녘에서 들국화가 핀다.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사사사철이나 1, 23년 등의 연한을 보면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다. 자기 인생의 나이를 놓고 현재의 자기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이지, 겨울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해를 놓고도, 하루 24시간을 놓고도 아침은 어린 시절, 정오는 한참 일할 나이, 지는 해는 죽음이 가까이 오는 나이를 생각할 수 있다.

 

육신적으로 이렇게 볼 수 있고, 또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의 흐름을 보면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요엘서나 행:어린아이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한 이것은 성도 각자의 신앙이 어린아이도 있을 수 있고, 청년도 있을 수 있고, 늙은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실제의 나이적으로 보게 되면 어린아이들은 전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전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전부 꿈을 꾼다는 말이 되는데, 어디 그러냐?

 

성경은 인간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인간들이 쓰는 용어를 빌려서 가장 가까운 용어로 쓴 것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볼 게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나? 이런 표현을 했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께서 그 용어를 통해서 하려고 하시는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한 이것도 사람의 특성을 연령대별로 들어서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알게 하려는 거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그대로 잘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교육적인 면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미래적인 말씀을 받아서 왜곡하지 않고 바로 전해야 함을 말하는 거다. 미래적인 예언이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룰구원의 말씀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이룰구원의 말씀이 없다. 전부 밖의 것을 보고, 찾고 어쩌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천국의 녹음기를 가지고 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머리에 박히면 평생 그 말씀을 잊지 않는다. 자기가 말씀을 들어도 자꾸 깜빡깜빡하고 잊어버린다면 기도하기를 하나님, 내 머릿속에 천국의 녹음기를 넣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라.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실상적으로 되어질 것을 현재로 미리 끄집어 당겨서 현재에서 미래에 되어질 그 실상을 이뤄가라는 거다. 이게 환상을 보는 거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지만 근거가 없이 말을 하는 것을 본다. 이런 사람은 허언병이다. 허언병이란 아무 근거가 없고 실상이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 자기 생각을 자꾸 정립을 해야 한다. 들은 말씀을 자꾸 새김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기까지 지난번 것 복습)

 

본 설교.

 

120-23: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째 날도 말씀으로 지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물들은 생물로 번성하라라고 하셨다. ‘물들이라고 하면 어떤 물이냐? 바다의 물도 있고, 강물도 있고, 호숫물도 있고, 냇물도 있다. 그리고 번성케 하라. 날으라. 번성하라라고 하며 전부 명령형으로 말을 했다. 그러니까 이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가 아니라 꼭 해야만 하고 해져야 한다는 거다.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했는데, 이 궁창은 둘째 날에 만들어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파랗게 보이는 하늘을 말한다. 그런데 이 궁창은 해의 여파가 비취는 곳까지만 파랗게 보이고 물질세계지만 해의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아주 먼 곳의 하늘은 까맣게 보이는 거냐? 해가 미치지 못하는 깊은 물속이 파랗게 보이느냐, 까맣게 보이느냐? 까맣게 보인다. 그런데 까만 그곳에도 고기가 살고 있다. 고기가 그런 곳에 살면 눈은 있으나 보지를 못한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런 곳에 살며, 어떻게 자손을 퍼뜨리는 건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에 사는 생선들이 눈이 아니더라도 피부나 냄새 등으로 눈 역할을 하게 해서 살 수 있게 해 놓으셨다. 이런 걸 가만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시다.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날개를 만들어 놓은 것은 하늘로 날으라는 의미인데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새도 있다. 닭은 항상 날아다니지 않고 비상수단을 쓸 때만 조금 난다. 타조는 날개가 있는데 아예 날지를 못한다. 이런 새가 만들어진지가 굉장히 오래됐으니까 이런 걸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쯤은 날지도 못하는 날개는 다 없어졌어야 할 텐데 왜 그대로 달려있는 거냐? 그러니 진화론은 안 맞는 거다.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그냥 맑은 궁창으로 있는 것보다 구름이 지나감으로서 아름답다. 그림 같다. 도시에서는 하얀 구름은 볼 수 있어도 바다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몽실몽실한 뭉게구름은 못 본다. 수평선에 하얀 뭉게구름이 둥글둥글 떠 있는데 그 아래에 갈매기가 날고 돛단배가 하나 지나간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궁창에는 새가 날고, 큰 바다에는 큰 짐승이 살고, 작은 물에서는 작은 고기가 살고,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보기에 참 아름답다.

 

그런데 인간표현으로 말을 하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짓궂은 데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가오리인가? 왜 눈을 옆에 달아놨느냐? 얼마나 답답할까? 이 가오리에게는 넙적한 몸에 입을 그 사이 모난 곳에 달아놨고, 눈은 그 위 등으로 두 개를 달아놨으니 입이 몸의 옆에 달린 셈이다.

 

지구상에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맡긴 거다. 인간들에게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것은, 즉 관리를 잘 하라는 것은 믿는 우리로 구원을 잘 이루라는 목적이 있는 거다. 만물을 통해 구원을 못 이루면 그만큼 미련한 것이기 때문에 만물을 못 다스리게 되는 거고, 이러면 인간들 때문에 자연물들이 죽는 거다. 이런 면에서 만물은 우리 인간들에게 달려있다.

 

24-3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여섯째 날도 말씀으로 되었다. 먼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지었다. 그러면 곤충은 몇째 날 만든 거냐? 다섯째 날에 궁창에는 날개 있는 새가 날고,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했는데, 이건 새와 생선만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다. 다섯째 날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섯째 날에 곤충을 만든 건가? 아니면 여섯째 날에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고 했으니까 여섯째 날 만들었을까? 그러면 박쥐는 몇째 날 만들었을까? 다섯째 날 만들었을까, 여섯째 날 만들었을까?

 

생물들을 보면 모양도, 형태도, 생태도 각기 다르다. 사는 곳도 다르고, 사는 시기도 다르다. 여름에만 사는 것도 있고 겨울에만 사는 것도 있고, 여름에만 나오는 놈도 있고 겨울에만 나와서 움직이는 놈도 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참 신비롭다. 우리 인간이 곰처럼 겨울 내내 잠을 자고 봄에 눈을 뜨면 어떨까?

 

그 다음에 여섯째 날 인간을 따로 특별히 만들었다. 왜 이렇게 인간을 맨 마지막 날 특별하게 지었을까? 첫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모든 것이 말씀으로 되었다. 말씀으로 지었고, 말씀으로 구별 분별 시켰고, 말씀으로 생산을 해서 키우게 되어있고, 또한 우리 인간은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번성하고, 말씀으로 정복하고, 말씀으로 능력자가 된다. 인간이나 만물이나 말씀을 떠나서는 없다. 우리 사는 게 그렇다. 특별히 우리 인간은 말씀의 눈으로 구별하고 분별하며 산다. 말씀의 빛으로 구별하고 분별하며 생산을 한다. 말씀으로 다각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생산적인 삶을 산다. 이렇게 산 결과는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들어있다. 이걸 떠나면 바른 삶이 아니다.

 

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는 복을 주셨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다른 곳에 보면 남자를 재우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것은 부부는 한 몸이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부부가 서로 협력해야 함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남녀가 동등임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라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걸 말한다. 즉 모형이라는 말이다. 2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으로 본질화 되는 거다. 이걸 다 포함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거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어 구원을 이루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거다.

 

우리 인간은 이목구비 수족신이 하나님을 감각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이목구비 수족신, 그리고 오각의 오감성을 총 동원해서 하나님을 알고 닮아야 한다. 이 면에 무디고 눈치 없고 멍청하면 안 된다. 이 일을 하라고 우리 인간들에게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의 가축과 기는 것, 모든 식물을 먹을거리로 주셨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물은 짐승과 가축만이 아니라 나무나 풀 등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눈으로 보고 구별하고, 말씀의 빛으로 보고 구별하고 생산이 있어야 한다. 이게 신앙의 세계다. 이를 통해 영적 생산, 영적 후손을 배출해서 다각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의 복이다. 우리는 이 복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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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만드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다. 십계명에도 안식일이 나오는데, 이 일곱 째 날의 하나님의 안식은 십계명이 있기 전의 안식이다. 그리고 이 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하는 것을 인간 편에서 보면 힘들게 일을 했으니 쉬어야지이렇게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계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쉬고 계시는 게 아니라 마지막 세상 끝날 재림 때까지 밤낮으로 계속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로 창조의 뜻을 알게 하시고, 창조의 뜻대로 살게 하신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지다가 자신이 세상을 뜨거나 이 세상이 끝이 나면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된다. 이게 참 안식이다. 안 믿는 세상에서 말하는 안식은 아무 일도 안 하고 편안히 쉬는 거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안식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게 안식이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속 잠만 자 봐라. 너무 오랜 시간을 자면 허리도 아프고 옆구리도 아프다. 우리의 참 안식은 천국에서 행복하고 기쁘게 영원히 누리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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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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