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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3> 신문지에 성경 싸들고 광나루 건너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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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 7월 3일 서울 서대문구 합동 28번지 14호에 있던 처가를 떠나 전남 여수로 향했다. 맹관호 장로와 그의 아들 맹의순 전도사, 그리고 라창석 권사의 환송을 받았다. 농부와 같은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 무명바지에 고무신을 신었다. 성경책을 신문지에 뭉쳐 싸들고 수건 하나를 허리춤에 찼다. 서울 거리를 뒤로한 채 광나루를 건넜다.

나는 대전까지 걸어서 갔다. 가는 길에 비무장 국군 패잔병을 만나 한 무리가 되어 걸었다. 길을 물어물어 남쪽을 향했다. 경기도 신갈 부근에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인민군들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피난민을 보내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 아낙네들을 살피며, 가라고 손짓했다.

그때 갑자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인민군 소년병이 애를 업은 여자의 머리 위 짐 보따리를 들어주려 하다가 그만 허리의 따발총 탄창을 건드렸고 방아쇠가 당겨지고 만 것이었다.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내 새끼 죽네….” 여인의 등에 업혔던 어린애의 고개가 옆으로 늘어지며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총 하나 건사 못하는 게 생사람 잡았구나!”

이 틈에 우리 일행은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뒤 인민군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린 병사들은 착하기만 했다. 자신의 따발총 오발로 무고한 어린 것이 죽는 충격적 장면에서 그는 목메어 울고 있었다. 누가 이 소년의 손에 총을 들려주었는가.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했다. 여수는 평온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강 건너 불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여수의 고요도 몇 날 가지 못했다. 미군 장군들이 죽고 포로가 되면서 전쟁은 남한 방방곡곡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무기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 7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은 날마다 밤마다 기도 열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전주에 들어섰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다. 장로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권사님도 하나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엔 담임목사님마저 어디를 다녀온다며 가셨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엔 아내와 흰머리 할머니인 임태화 권사님 외엔 없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나는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만 불렀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당시 여수엔 군산에서 철수한 부대가 와 있었다. 군부대뿐 아니라 장교 가족들도 있었다. 예배당에서 끝까지 기도하시던 임 권사님 아들이 육군 대위였는데 그가 마침 이동명령차 여수에 온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나희필이었다. 아내는 짐을 꾸려 헌병대로 가자고 했다. 부대가 군함을 타고 철수한다며 임 권사님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헌병대로 가니 임 권사님은 우리에게 군인 가족으로 군함에 타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 아내와 나 대위는 성이 같았고 아내의 호적 이름인 나신필과 항렬까지 같았다. 그렇게 배를 탄 게 50년 7월 28일이었다. 나희필 대위는 나중에 육군대학 총장, 조폐공사 이사장,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냈다. 우리 내외를 친누이, 친매부처럼 대해줬다. 그는 술과 담배를 철저히 멀리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술 권유를 물리친 몇 안 되는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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