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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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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강해 3 할례의 의미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5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5:8-9)

 

실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과정보다는 어떠한 결과물을 내었는가가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그 사람이 어떠한 성과물을 내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 길갈이란 곳에 진을 친다. 여호수아서 5장 1절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가나안 족속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분위기가 이쯤 되면 이스라엘 군대가 바로 여리고로 밀고 들어가도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상식밖의 명령을 내리신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다. 할례를 한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일주일 정도는 움직이는 게 힘들다. 정복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할례는 왜 필요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최근 고고학의 추세에 의하면 길갈이 여리고 바로 옆이 아니라 여리고 북쪽 30km 지점에 있는 Argaman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신명기서에서는 길갈의 위치를 엘론 모레 맞은편이라고 묘사한다. 신 11:30, “이 두 산(그리심산 에발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이 말씀에 의해서도 길갈의 위치가 여리고보다 훨씬 북쪽임을 알 수 있다.


더 신빙성있는 것은 이 곳에 화강암으로 된 산이 있다는 것이다. 수 5: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기서 정으로 돌을 쪼아 부싯돌칼을 만든 흔적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구약학자인 카일에 의하면 약 70만명 정도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곳에서 할례를 받은 것이다.


할례를 왜 받았을까? 수 5:4-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노예로 있는 430년 동안에도 할례를 행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지 않았는데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 유월절을 지키기 전에 반드시 할례를 받을 것을 유월절 규례로 정하셨다. 출 12: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도대체 할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할례를 요구하셨던 것일까?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다. 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99세에 할례를 한다. 그리고 할례를 행한 이후 언약의 자녀인 이삭을 얻게 된다. 86세 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언약과 상관없는 인간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 땅  정복에 앞서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몸에 새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는 것보다, 여리고를 함락시키는 것보다 더 우선시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70만 가량의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하고 길갈 진영에 드러누워 있었다. 수 5:8-9,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이란 단어에는 ‘굴려보내다라’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언약백성임을 기억하고 순종하여 할례를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의 수치를 굴려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때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전에 죄의 노예였을 때의 수치를 주님이 용서해주시고 그 수치와 기억을 씻어주시는 것이다.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게 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여리고 펑지에서 유월절을 지킨다.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고, 그것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 전투의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할례를 통해 다시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몸과 마음에 새겼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할례는 오늘날도 유효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지표일까?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할례는 곧 그들의 특권의식으로 잘못 사용되었다. 그들은 외적인 할례만 있으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할례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다. 렘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 말에 의하면 할례가 단지 육체의 가죽을 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죽을 베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호소한다. 롬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마음에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표지가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갈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대 관심은 드디어 하나님의 언약대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급하지 않으셨다. 그것을 주시기에 앞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은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대로 너희에게 주는 것을 너희는 명심하겠는가?’ 이것을 할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흔들리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땅의 풍성한 소산물을 먹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죄가 가득해지면 누구든지 그 땅에서 토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나안 땅의 원칙이었다.


레 18:24-28,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할례는 가나안 땅의 지배문화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겠다는 선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램이 있다. 이왕이면 풍성하게 사는 것이다. 전쟁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지지 않고 승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풍성한 삶보다도, 전쟁의 승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순종이다. 내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였다. 골 2:11-15,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찟기심으로 우리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것이다. 범죄와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모든 사단의 참소를 십자가를 통해 굴러가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언약백성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편법과 세상의 상식으로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여러분 마음에 새겨져 있는가? 바라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가슴에 새겨진 백성, 그 언약때문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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