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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 (마 13: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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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100만원짜리 수표로 장난감을 삽니다. 신부의 6천만원치 의 혼수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두들겨 팹니다. 이런 이야기에 만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놀래지도 않습니다.

돈의 액수가 커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가치관념이 어디에 있는지 아찔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하려 고 사는지 모를 일입니다.

설악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여 집니다. 릉번쯤 가보고 싶습니다. 그 유명하다는 설악산 단풍구경을 못해 보았습니다.

저는 한해동안에도 전국토를 누비다 싶이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도 유명하다는 관광지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여유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관광을 위한 목적으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장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고 신문이 떠들고 있을 때였습니 다. 단풍 구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번쯤 가보고 싶 었습니다.

저는 그때 전북 순창군 일대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복흥면에 있는 10개 부락에서 전도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곳은 내장산 자락이었습니 다. 내장사까지는 불과 2Km 라고 합니다.

내장산 단풍구경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단풍구경이 죄는 아닙니다. 단풍구경도 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제 마음 속에 스며 들어오자 그만 화들짝 놀라 고 말았습니다. 단풍구경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들뜨고 있으니 덩달아 들뜨는 제 마음에 놀란 것입니다.

 일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길에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행위에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어서는 안됩니다. 그 런데 이 세상은 마치 난장판 같습니다. 생각 없이, 뜻도 없이 남이 하 니 그저 덩달아 날뜁니다.

이런 삶의 지표없이 살아가는 부평초 인생들 가운데서 성도들은 선 택 받은 천국 시민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 하면서, 그 뜻을 깨달아, 의미있게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회의 지표요 방향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 신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그것 입니다. 혼란의 세대일수록 더욱 신자 다운 삶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린 물을 더욱 더럽히는 것이 신자들인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지, 그저 부지런히 교회만 쫓아 다니는 사 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간에는 1992년 주님 재림설로 야단들인가 봅니다. 차라리 주님이 속히 오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문제 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지 옥입니다. 지옥은 현존하는 실재의 장소입니다.

 네로를 아십니까.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하는 노래속의 네로가 아 닙니다. 역사 속에 실재한 로마 황제의 이야기입니다.

네로는 폭군이요 기독교의 박해자로 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 다. 그러나 얼마만큼 악독한 인물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네로는 의동생 브리타니가스를 모략하여 처단 했습니다. 충성스런 신하의 아내 뽀리비야와 간통 했습니다. 정비인 옥타비아 왕비를 누명 씌워 증기찜으로 죽였습니다.

친어머니를 난도질하여 죽였습니다. 뽀리비야와 결혼한 후 발로 차 서 죽였습니다. 그 뽀리비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친자식을 바닷물 속에 꺼꾸로 처박아 죽였습니다. 심복인 장군 바라스가 반란을 일으킬까봐 의심하여 독살해 버렸습니다.

네로는 로마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14개구 중에서 무려 10개구가 전 소하는 대화재였습니다. 항의가 빗발치자 그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굶주린 사자의 밥으로 삼 았습니다. 산사람 머리에 불을 질러 촛불로 사용 했습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갖은 악독을 다했습니다.

네로는 바이소 암살 음모 사건이 발각되자 200여명의 군과 민을 죽 였습니다. 스승이요 역사상 유명한 철학자였던 세네카도 죽였습니다.

네로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피에 굶주린 사람 같았습니다, 스페인 총독이었던 깔바가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휴온 으로 도망친 네로는 자살을 기도 했으나 제대로 죽지도 못했습니다.

칼이 목을 비켜갔습니다.

그의 곁에서 지켜보던 신하 에바브로지다스가 칼을 쥔 네로의 손을 쥐어 목에 쿡 박으니 비로소 네로의 최후가 끝났습니다.

이것이 네로의 행적입니다. 이 네로가 죽었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요.

 역사는 흘러서 독일의 힛틀러 시대가 왔습니다. 힛틀러는 유대인을 6백만명이나 학살 했습니다. 가스 목욕탕에 끌어 넣어 대량 살상을 하 였습니다.

죽운 시체의 이빨에서 금니를 뽑아 군자금으로 썼습니다. 사람 기름 을 짜서 비누를 만들었습니다. 송장을 썩혀서 밭에 묻고 밀을 파종 했 습니다, 사람 비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밀이 어찌나 잘 여물었던지 2차대전 말기 전 독일군의 식량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힛틀러도 죽었습니다. 2차 대전에 패배하자 참호 속에서 애인의 목 을 껴앉고 자살 했습니다. 힛틀러가 죽은 후 어디로 갔을까요.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알폰신 이야기입니다.

그는 알게 모르게 2천명을 죽였습니다.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무 차별 학살한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배에 태워서 깊은 바다에 처넣었습니다. 비행기에 태워 공중에서 떨어 뜨렸습니다.

대통령 궁에서는 일주일에 두차례씩 파티를 열었는데 인육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현대의 이야 기입니다. 사람 가죽을 쓰고서는 차마 못할 짓들입니다.

그런 독재정권도 무너졌습니다. 재판을 받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 졌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물어 볼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옥으로 갑니다. 지옥이 없 다면 말도 안됩니다. 지옥이 있습니다. 지옥은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뒤가 구린 사람들 일까요. 아니면 박애주의자 들일까요.

날이 갈수록 강력범죄가 극성스러워 집니다. 가정 파괴범, 유괴범, 조카를 유괴하여 살해해 버리는 몰염치, 철심장들, 이런 사람들을 붙 잡아서 가두어 두는 곳이 교도소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일시에 석방에 버린다면 누가 가장 반대할까요. 지옥 이 없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공중전화 박스에서 살해를 당하고, 사소한 언쟁으로 죽음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지옥에나 가라고 합니다. 지옥이 있기를 은연중에 바라는 때문입니다.

하찮은 죄과라도 출소자를 전과자라고 부릅니다. 그 별것도 아닌 전 과자가 곁에 있으면 섬찡해 집니다. 감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입니다.

출소자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섬찡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감옥입니다. 하나님의 감옥에 죄인을 가둡니다. 하나님의 감옥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옥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성경의 지옥 이야 기는 비유가 아닙니다. 현존하는 실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대하여 계속 논의해 보십시다.

첫째, 성경이 지옥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둘째, 지옥이라 고 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의미는 무엇인지, 셋째, 지옥에 대한 일 반적인 상식 개념에 대하여 살펴 보시겠습니다.

 첫째,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기 때문 에 믿습니까. 아니면 지옥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 합니까.

주님은 마태복음 25장 41절과 46절에서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 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불붙는 지옥이 있음이 분명합 니다.

시편 9편 17절은 악인이 음부로 돌아 간다고 합니다. 음부는 지옥입 니다. 마태복음 22장 13절은 바깥 어두움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님은 이런 표현의 말씀을 수차례 하셨습 니다.

운다는 것은 슬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를 갊이 있다는 것은 지 옥의 지독한 고통과 아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은 달란트 이익을 남기지 못한 종이 지옥으로 갑 니다. 달란트는 부름 받은 종들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제 사 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 가는 것이 온 몸으로 지 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낳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3장 17절과 마태복음 3장 12절은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말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죽은 부자의 영혼이 지옥 불꽃 가운데서 고생하는 모습을 역력하게 묘사합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20절은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붙는 지옥으로 던져 질 대상들이 열거됩니다. 마가복은 12장 40절은 신자의 외식은 지옥감 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쉴새없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1절, 42 절, 49절, 50절은 풀무 불에 던져 넣어진다고 합니다. 풀무 불은 지옥 입니다. 불법을 행하는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갑니다.

 둘째, 지옥이라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그럴듯하게 쓰고 있는 이 말 은 성경 용어가 아닙니다. 불교적 용어입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에 적 당한 우리 말이 없어서 차입해 온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을 히브리어는 스올, 희랍어로는 하데스라고 합니다. 우 리 번역에는 공히 음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말도 성경이 말하 는 지옥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게헨나라는 말을 즐겨 쓰셨습니다. 게헨나가 무엇입니까. 예 루살렘 의 서남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사람을 산채로 잡아서 우상제물로 바처 제사 지내던 곳입니다. 유대 인들은 더러운 곳이라 하여 쓰레기를 버리고 불태웠던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더러운 쓰레기들이 버려집니다. 구더기들이 들끓습니 다. 그것을 태우기 위하여 항상 불이 붙고 있습니다. 게헨나를 주님은 지옥이라는 표현으로 쓰셨습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인간 쓰레기를 버리는 곳입니다. 인간 쓰레기를 영원히 불태우는 곳입니다.

 셋째. 본문의 말씀을 정리해 보십니다. 주님은 밭에다 좋은 씨를 뿌 립니다. 밭은 사람의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추수 때는 주님 재림 하시 는 종말입니다.

씨를 뿌려 놓고 얼마 후에 밭에 나아가 보니 뿌리지 아니한 가라지 가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 버리자고 합니다. 주님은 허락지 않으십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합 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입니까. 그러나 그 시간 하나님 은 빙그레 웃으십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신음 소리 로 부르짖는 의로움을 보상할 날은 분명히 다가옵니다.

추수를 합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입니다. 알곡은 구원 받은 성 도들입니다. 의로운 고통으로 인하여 주님 재림 하실 때 보상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밭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주님이 뿌리지 아니한 다른 씨로 열매 맺은 자들의 영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대로 하지 아니한 것입니 다. 인본주위자들입니다. 사람의 의견과 재주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아 우성 치던 자들입니다.

가라지는 거두어서 불에 사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옥 상태인 것입 니다. 지옥은 인간 쓰레기를 소각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미래를 보십니다. 악한 인생의 종말을 아십니다. 지 옥 길로 달려 가는 인생이 너무도 불쌍 합니다. 영벌을 면하고 영생의 길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질고 겪으셨습니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은 만민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주께 나와서 그 보혈을 의지하는 자만이 속죄함을 받습니다.

주님의 피로 씻김을 받고 하늘 시민이 되었다고 영생의 상급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신자 중에서도 지옥에 갈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가감없이 두려움으로 섬긴 성도들만이 영생에 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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