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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하신 왕 (슥 0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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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메시야 예언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450회 이상의 많은 메시야 예언이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박의 모든 구절이 모두 메시야 예언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예언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메시야가 어떤 분으로 오실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왕되신 메시야
1).공의로우신 예수님

“그는 공의로우며”(슥9:9중)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소요리 문답 제1조를 보면 ‘문’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니라” 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복을 줄거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취할 일을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영원토록 즐거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이 선물을 사다 주니까 남편을 즐거워해야 하는 모습이 보기 좋겠지만 남편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면 그 남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메시야를 즐거워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보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조건으로는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조건이 자꾸 어려워지고 일이 막히며 환경이 나빠지는데 무슨 수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는 기뻐할 일을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매를 맞고 굶으며 감옥에 갇혔습니다.
또 배를 타고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하나님께서 순탄한 길을 주시지 않고 배를 파선시키십니다.
오해를 받고 노예 취급을 받으며 수많은 환난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즐거워한 까닭입니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슥9:9) 네 왕, 나의 왕이 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임하시는데 그는 공의로우십니다.
여기서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제사장적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왕적인 의를 말합니다.
왕이 얼마나 공의로우신가 하면 그 왕은 하나님 앞에서 보상 받지 못할 선이 없고 징벌 받지 못할 악이 없는 통치적인 의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를 행했는데 네가 언제 그런 일을 행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시며 보상을 희피하는 분이 아니시고 잘못을 했는데도 징벌을 안하ㅏ고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무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며 자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행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주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 주님만은 아십니다” 하고 고백을 한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죄를 지었는데 지금 바로 심판하시지 않고 지금 바로 책망하지 않으신다고 안심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그 앞에 공평치 않거나 공정하지 못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심은대로 거두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2).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

“구원을 베풀며”(9:9중)

구원은 예수님이 주셔야지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 뿐입니다.
불신자가 죽은다음에 가족들이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이 구원을 얻었을까요 할 때가 목회의 제일 어려운 때입니다.
자식이 믿거나 혹은 가족 중의 한 분이 믿어서 불신자의 장례식을 힐 때에는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장례식인데 이럴 때에는 전도나 설교밖에 따로이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우리에게 주실 분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회사를 가는 일도 급하고 시집 장가 가는 일도 급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일도 급하지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입니다.
흑자는 구원의 확신을 교만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아이구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어떻게 알아, 그것은 예수님만 아시는 일이지” 이런 사란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믿으면 구원하시겠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믿느냐 안믿느냐 입니다.
“네가 믿으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믿으면 내가 구원받고 내 가족이 구원받고 교회의 모든 성도가 구원에 이르므로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우리의 전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봉사하고 남편은 안내를 사랑하고 이웃을 돕고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섬기는 모든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매일 혼자서만 보따리 들고 교회만 다닐 때에 그 남편이 저런여자 때문에 예수님을 안믿겠다고 한다면 그 여자분은 차라리 교회를 며칠 안나와도 남편의 마음을 돌려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임하신다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매일 와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3).겸손하신 예수님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나귀란 천대받는 사람들이 타는 값싼 동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표시로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여기 겸손이라고 번역된 ‘야니’라고 하는 단어는 온유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나귀란 가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난하시고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임하셔야 평화가 옵니다.
그 분이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걸려 있다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고 믿어야 됩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죄문제, 죽음문제, 세상의 모든 얽매인 것들을 주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분은 비록 그 기도의 방향이 잘못 나간다 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이 큰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기도할 능력도 없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으로라도 하나님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므로 우리는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정하고 버티고 계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앞에 나갈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겸손하시고 가장 낮고 낮은 자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실패할 때나 승리할 때나 언제든지 주님 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주님을 부르는 그 심령 속에는 이미 ㅈ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교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교만한 아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낮은 자세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들을 벌레 취급하듯 하셨다면 아무도 그 앞에 안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겸손하시고 낮게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 은혜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도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2.메시야 왕국의 성격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9:10)

메시야가 오시면 화평이 온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보편적 평화, 보편적 경건을 말합니다.
또한 메시야 왕국은 우주 전체에 미칠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메시야 왕국은 성격상으로는 평화스럽고 범위상으로는 우주적입니다.
김일성이 아무리 떠들어도 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년도를 말할때도 서기 몇년이라고 하지 모슬렘 몇년 석가모니 몇년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가 온 우주에 편만해져야 공의와 사랑과 평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셔야 우리의 개인도 가정도 민족사회에도 평안이 옵니다.
평화의 왕, 오신 메시야, 우리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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