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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계승하자 (딛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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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두 가지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낳은 자손을 찾는다고 합니다. 저는 고향을 떠난지 40년이 넘었습니다. 10대 소년의 몸으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꿈을 꾸면 고향에서 사는 꿈을 꿉니다. 형편만 되면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을 꼭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면 짐승도 자기 집을 찾고 사람도 자기 삶의 뿌리인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이것을 소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손을 찾는 것은 자기 연장의 본능에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인 자손을 찾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자손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기는 못 먹으면서 자식은 잘 먹이고 싶어하고, 자기는 헐벗고도 자식만은 남에게 떨어지지 않게 입혀보려고 하고, 자기는 공부를 못했어도 자식만은 좋은 학교에 보내보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이번에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학생을 둔 부모님들이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다가오는 11월 23일에 있을 대입수능시험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모두가 기대하시는 대로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정성을 기울입니까 단순히 내가 자손을 남겼다는 사실보다는 어떤 자손을 남겨서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과 의미를 후대에 계승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보다 유능한 인재,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자손을 남기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소원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자손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바울의 육신의 자손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울에게 영적 자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 정도는 육신의 부모가 그의 자녀를 기를 때 쏟는 정성의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자녀들을 통한 신앙의 계승이야말로 바울이 생애 가운데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같은 믿음을 따라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디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참아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나의 아들’, ‘참신앙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디도뿐이 아니었음을 그의 편지를 통해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1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레몬서 10절에 보아도 바울이 자기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이 오네시모를 바울은 어떤 아들이라고 불렀습니까 “갇힌 중에 낳은 오네시모를 위하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전도하고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한 사람을 이렇게 자기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가히 전세계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한편 바울은 특별히 몇 사람을 양육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특별히 신앙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믿음의 아들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사역은 그의 사후에도 영광스럽게 계승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계승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정말 저분은 내 믿음의 어머니셨습니다” “저분은 정말 내 믿음의 아버지셨습니다” 무슨 형식이나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믿음이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화를 주어서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고 그들에게 신앙적인 격려와 권면을 아끼지 말아야겠지만 그들 가운데는 나의 신앙을 전폭적으로 전수 받아 그들을 가르켜서 가히 내 믿음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고 그들이 나를 향해 믿음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고 그들이 나를 향해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두 셋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계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디도서의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 바울이 누리던 삶의 특권과 그 특권을 계승시키고자 했던 디도에 대한 바울의 기대와 부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특권을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그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하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어마어마한 신분상의 특권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때는 전세계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많아서 로마에서는 노예의 수가 로마시민의 네 배나 되었습니다. 그 만큼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종들은 누구의 종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했습니다.

가령 그 당시 가이사의 종쯤 되면 종은 종이지만 어깨에 힘을 주고 돌아다닐 만 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의 종이다!” 사실 ‘종’이란 말 자체는 그다지 유쾌한 말이 아닙니다. 종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기고 주인에 위해서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을 때는 자기비하의 의미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게 주어진 자유를 온전히 포기했습니까 내 생각, 내 계획대로 살려는 것은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분을 대신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신, 대사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엄청난 신분상의 특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장차 심판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분을 대신하는 것을 바울은 특권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특명을 받아 지방의 민심을 살피고 형편을 알아보고 임금님은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받은 암행어서는 태연합니다. 왜요 그 가슴에는 어패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대사로서의 책임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자기의 특권 그 자체보다는 어떻게 해서 이 어마어마한 특권이 자기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만이 공유하고 있는 세 가지 위대한 재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 세 가지 재산 때문에 자신이 바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세 가지 재산이 무엇입니까

1.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개인마다 다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예수님도 한 분이시요, 성령님도 한 분이십니다. 물론 같은 햇빛이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것처럼 믿는 사람에 따라서 그 표현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성격과 배경에 따라서 믿는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개별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각자가 가진 믿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어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면면이 이어내려온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의 믿음은 다른 누구에게 그대로 심어져서 계승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서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에 기초한 믿음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공유한 재산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2. 지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고 바울은 밝혔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식이 지식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식을 진리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지식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목회서신에서 ‘경건’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우리가 소유한 진리의 지식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건에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경건은 구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경건이란 말을 영어로는 ‘godliness’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을 닮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인격, 하나님을 닮은 삶이 바로 경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 그 분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속에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촉구하는 그런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경건’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4장 7절에 보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면서 경건의 열쇠는 6장 6절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경건을 강조한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바로 이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재산입니다.

 3.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재산 가운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당신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 못 얻는 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 얻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영생을 얻고 못 얻는 것은 세상을 떠나 봐야 알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 1서 5장 13절을 한번 펴서 같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5장 24절을 펴서 같이 읽어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특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 영생의 소망을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 없이는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계승할 특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말이 주는 어감에서 바울이 디도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을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승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사람에게 바로 계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보통 이 말씀을 복음을 복음의 4세대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과 편지를 받는 디모데가 첫번째와 두번째 세대가 되고 다음 세번째는 충성된 사람들이고 네번째는 또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래야만 믿음이 잘 계승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복음을 계승하려고 택한 디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디도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레데 섬에 있던 교회를 디도에게 맡겼습니다. 교회를 맡길 정도로 바울은 디도를 신뢰했습니다. 바울과 디도와의 관계는 벌써 오래 전부터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믿어 구원받은 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드디어 본격적인 전도자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갈라디아서 2장 1절에 기록되었습니다.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했습니다. 바울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까 그것은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사도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떳떳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신임을 얻기 위한 중요한 여정에 바나바와 디도를 동반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과거를 변호해 주고 그의 신뢰도를 보장해 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나바 옆에 디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만큼 디도는 바울이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나 신임해서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디도는 바울이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 중에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지극히 신임할 수 있었던 디도에게 사역을 맡겼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야겠습니다. 신뢰성은 제자가 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믿을만 해서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고 디도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 보면 디도가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을 불신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디도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중재자가 부정적인 사람이라면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오히려 일을 더 잘못되게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게 지어지도록 일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6절 이하를 보세요.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거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13절에 뭐랬어요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했습니다.

디도라는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왔다는 기록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 단어가 “위로”와 “기쁨”입니다. 그는 위로의 사신이었으며 기쁨의 사신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디도가 있으면 모든 일이 기쁨과 위로의 사역으로 아름답게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중요한 일을 맡깁니다.

끝으로, 디도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어려운 일도 자원해서 맡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대개 어려움 앞에서는 그것을 맡기를 꺼려하고, 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합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을 걷는 일을 위하여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그 일을 잘 해냈습니다. 사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가서 돈 부탁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그 일을 자원해서 한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를 존귀하게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사역을 디도에게 맡기게 된 것입니다. 디도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주님의 복음사역에 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맡은 일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귀합니다.

세상에 제일 안 좋은 것이 책임전가, 책임회피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 우리 교회에서는 내년에 청지기로 봉사하실 분의 제 1차 훈련이 있습니다. 교회는 신실한 일꾼, 믿고 맡길 만한 일꾼을 찾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일도 자원해서 맡는 용기의 사람을 기다립니다. 오늘의 디도가 어디 있습니까 19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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