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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 06:1-9)

첨부 1


본문은 쉽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6:1-3과 6:4-9이다.
첫 번째 부분은 5장을 향하고 있고, 한편 두 번째 부분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설교의 주석을 위한 본문(text,아마 증빙 자료 proof-text 의 의미로 상용한 듯하다-역주)을 제공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을 직접적인 문학적 맥락 가운데서 살펴 보려면 예레미야서의 핵심 부분(4:44-30:20)이 시작되는 4:44부터 읽어 내려와야 한다. 저자는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해 언급한 다음 모세로 하여금 시내 산(여기서는 호렙 산으로 명명되고 있음)에서일어난 사건들을 그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게 하고 있다. 저자는십계명을 재구성하고 있으며(출애굽기 20장과 비교해 보라), 이에 대한 백성들의 주목할만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놀랍게도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나 죽지않았도다. 그러나 다시는 이런 모험을 하지 말자. 차라리 당신(모세)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나머지 말씀을 다 듣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라.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준행하리다. 5:28-3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가(可)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다.
5:32-6:3에서 모세는 자기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필히 지켜야 할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6:4-9은 맨처음 나오는 가장 중요한 명령이다. 이어서 그 구체적인 의미가 밝혀져 있다.
6:1-3의 율조(律調)는 신명기 전편에 면면히 울려퍼지고 있다.

첫째, 신명기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하신 것이다. 십계명에 관해서도 같은 요지(要旨)의 언급이 있었다(5:5).
십계명을 받을 때에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뵈었다(참조:5:5). 그러나 여기 새로운 명령을 받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그 명령은 역시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것이다.

둘째, 이 명령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소유하기위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지키야 할 명령이다. 이스라엘 백성이그 언약을 지키는 길은 오직 순종이다.

세째, 이 언약과 계명들은 사건이 지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신명기 5:3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 언약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생존해 있는 모든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이란 뜻이다. 신명기 저자는 이런 식으로이스라엘의 성스러운 역사에다 주전 7세기의 당대적(當代的)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6:2에서 후속 세대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 어떤 세대도 그건 우리 열조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순종을 회피할 수는 없다.

네째, 그 백성의 혈통함은 순종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신명기저자는 이 주제를 줄기차게 거듭 반복해 말하고 있다(예:5:33,6:18, 7:12-15, 8:1).

신명기 6:4-9은 후일 유대교의 신조(credo)가 된 쉐마(shema',들으라의 뜻)로 시작된다. 다양한 번역들이 말해 주고있듯이, 쉐마의 내용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유일신 사상, 즉 단 한 분의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는 사상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쉐마의 내용은 신(神)의 수효는 얼마나 됩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쉐마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그들이 하나님이신 여호와-언약에 의해 이스라엘과 서로 신실할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단 한 분밖에 안 계신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한 분의 문화(전쟁)와 농경(다산多産 , 비, 태양)등의 여러 기능에 따라 조각조각 나눠질 수 없는 한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것이다. 그 한 분에게 이스라엘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사랑의 응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6절). 그리고 계명들은 의지(마음)와 삶 전체를 형성하는데 있어 항존적(恒存的)인 요소가 되도록 내면화되어야 한다(7-9절). 8절은 오늘날까지도 미간과 팔(왼팔-역주)에 차는 경문(經文)의 근거가 되었다(경문이란 율법 전체의 상징인 쉐마를 넣는 조그만 합을 말한다). 9절은 문에다 부착하는 메주자(mazuzzah)라 하는 조그만 갑(匣)에 대한 근거가되었다(메주자는 meeuzah라고도 표기하며 이 말은 원래 문설주라는 뜻이다-역주). 7-9절의 요지는 영원히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주제는 8장에 상세하게 전개되어 있다. 물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명기 저자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건망증을 극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제 2주제:히브리서 7:23-28
본문 중의 일부(23-25절)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시 110:4)이시라는 주장에 대한 설명의 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일부(26-28절)는 그러한 논증을 요약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7:1-22의 논증을 검토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본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인 히브리서 7:23-25에서는 레위 계통의제사장들은 죽기 때문에 다만 일시 동안만 제사(祭司)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설명을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그 직분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23-24절은 20-22절의 다른 일면을 언급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26-28절)은 이 문제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그 다음의 내용을 지시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시다고 묘사된 것은 4:15에 비추어 볼 때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다는 사실은 앞에서 지적한 바 성육신사건이 죄인들과의 결속을 굳게 하였다는 점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참조:2:10-18). 오히려 그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암시해 준다(시편 110:1이 배경이 되어있다). 이것은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드러나 있다(8:1-2도 참조).

둘째, 27절은 여러가지 주제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다. (a)저자는 26절로부터 죄없으신 그 대제사장은 그의 희생으로 말미

암아 구원받는 자들에게 제외된다고 추론하고 있다. (b) 레위 계열의 대제사장들은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단번에(once for all) 그 일을 이루셨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9:12, 24-28, 그리고 특히 10:11-14에도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히브리서 전체가 이러한 명확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c) 마지막으로, 저자는 9-10장에서 전개될 주제 곧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신 동시에 제물이라는 주제를 예고해 주고 있다.

세째, 28절에서는 다시 7장의 주제로 되돌아가 시편 110:4의맹세는 모세의 율법 이후에(다윗 시절) 온 것인 만큼 율법을 능가한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 신학자의 율법에 대한 비평에 관해 세 가지를 말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그의 촛점은 동물의 희생 제사를 요하는 의식적(儀式的)인 율법에 맞추어져 있다. 그는 동물의 피가 인간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9:9-10). 하지만 구약의율법에서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우월한 구원이 옛 것을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율법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입장(오늘의 복음서 주제)이나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문제(롬 3:20)는 히브리서의 지평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의 관심은 한편으로는 희생 제사의 본래적인 실패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우월성에 있다.

세째, 이러한 정묘(精妙)한 논증의 전개는 독창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10:19-25).
이 저자로 하여금 신학을 저술하도록 부추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목회적인 관심이었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2:28-34(35-37)
마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에 관한 기사를 일련의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가드러남은 물론이요 유대교에 대한 그의 심판도 아울러 나타나고있다. 예루살렘 입성 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었는데,이 사건의 기사가 성전 내에서의 사건의 기사속에 끼어든 것은성전 내에서의 사건을 청결 사건이 아닌 심판의 표적으로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참조:11:1-26). 그 다음에 이어서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인해 일련의 장면들이 도입된다(11:27-12:44). 그리고 이어서 13장의 소위작은 묵시록(little apocalypse)이 뒤따른다. 11:27에서 13:36까지의 모든 것,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의 자료 전체를 결합시키는 마가의 방식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날에 일어난 것으로되어 있다. 개별적인 자료들이 마가 이전에 이미 제각기 나돌고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로서는 각각의 사건들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 도무지 분간할 길이 없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예수님의 일련의 응답은 오늘의 본문으로 끝맺어진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주도권을 잡으신다. 이러한 식으로 설화들과 교훈들을 한데 묶어놓음으로써 마가는 인상적인 클라이막스에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배열해 놓은 셈이 된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두 군데 말씀 곧 신명기 6:4-5과 레위기19:18 하반절을 나란히 인용하여 응답하고 계신다. 레위기 19:18

상반절에서는 이스라엘 동포(원래는 이웃이란 뜻이었을 것이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는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첫째 계명이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둘째이다. 한편 마태복음 22:39에 보면,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같은 것으로 나와 있고, 또한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계신다(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서를 말한다).
누가복음에는 이 기사가 전반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a) 이 설화가 전혀 다른 배경 하에서 발생한다(눅 10:25-28). (b) 무엇을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다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만 반문하고 계실 뿐 실제로 그 계명들을 인용하는 자는 율법사 자신이다. (c) 두 계명이 하나로 융화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요구에 응해 예수께서는 이중적인 계명을 제시하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불가불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계신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그 순서를 뒤바꾸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새로운 기초를 닦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자료에서도 동일한 요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서기관은 계속 감명을 받는다. 아닌 것이 아니라 그는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말씀에 동감하는 유일한 교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것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는 사실을 연역(演繹)해 내고 있다(물론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말하고있지 않다). 예루살렘 바이블(Jerusalem Bible)에서는 낫다는말을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훨씬 더 효험이 있다는 의미로 새겨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현재 예수님은 서기관의 말에 동감을 표명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째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것일까 올바른 이해는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직도 해동에 옮겨진 것은아니다.
정리삼아 몇 가지 관찰 사항들을 열거해 보기로 하자.
첫째, 서기관이나 예수님은 모두 희생 제사 제도를 부정하지않고 있다. 이 설화는 또한 외부적인 행위 대신 내적인 성향을옹호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오히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마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신 사건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 설화를 이용하여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사실(마 5:17)을 보여 주고 있다. 마가에게있어서는 예수께서 서기관들을 반대하신 이유는 그들이 율법의내용을 왜곡시켰기 때문이었다(12:38-40). 또한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11:17)이 되어 버린 제사의 장소가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13:1-2). 성전이 장차 있을 큰 재난에 견디어 남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제 1주제:신명기 6:1-9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가하는 많은 교역자들은 이 본문에 깜

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살얼음을 딛듯 조심스럽게 지나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사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할 경우 그것은 종교의 여러 가지 위험성에 관한 경고로 가득찬 설교가 되기 십상이다. 본문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에 대한이다. 율법주의(legalism)의 위험성을 주의하라! 명령과 규례에 관한 귀절들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라는 쉐마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암송해야했던 신조이다. 알맹이 없는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위험을 경계하라! 네 자녀에게 가르칠지니라. 생명없는 전통주의(traditionalism)의 위험성을 조심하라! 독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에다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위선과 자기의(自己義)의 위험성을 조심하라! 만일 이율법들을 준행하면 형통하고 수효가 번성하리라는 것이 여호와의말씀이다. 공리주의(功利主義, 벤담이 주장한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에 입각한 사상-역주)의 위험성을 경계하라!
그러나, 이러한 공격이 끝나면, 우리는 어떤 미숙련 노동자라도 건물의 터는 닦을 수 있지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숙련된 노동자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사실을 깨닫고 나면 독자는 본문에서 새로운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는 요시야 왕 재위시 범국민적인 종교개혁의기초가 되었던 책이다. 부탁과 타락의 시기에 전통의 회복은 신앙과 도덕적 진지성을 활성화하는데 있어 시의적절(時宜適切)한도움이 되었다. 종교개혁과 오늘의 본문의 중심사상은 개선된 행위에 대한 율법적인 요구가 아니었다. 율법(토라)이 어떤 행위를요구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율법은먼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토라는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선 이전의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특히 출애굽기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되새기고 있다. 명령은 그런즉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토라는 지시하지만 그러나 먼저 계시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일체의 지시에선행한다. 왜냐하면 너는 ...할지니라(thou shalts)는 나는...이니라(I am)는데 연유하기 때문이다.

신명기가 이스라엘의 전통의 도덕적, 윤리적 진지성의 회복을제시하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초대 교회를 돕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마태복음에는 유대교와 예수님의 윤리훈(倫理訓)이 아주두드러진다. 유대주의적인 특성에 주목하라. 산상설교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는 것을 배격하고 오히려 율법에 굳게 설 것을 역설하고 계신다. 어째서 그랬을까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는 주여, 주여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참조:마 7:21).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책임감보다는 예언과 귀신 축출과 이적 행사(行事)를 장려하였다(7:22-23). 구원의 경험에 대한 사적인 추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 수행에는 눈이 멀게 되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공양치 아니하더이까(25:44-46).
바로, 오늘날도 신명기나 마태복음이 다시금 요구되는 시대는아닌지

제 2주제:히브리서 7:23-28
오늘의 제 1주제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요구사항들을 부과하고 있다면, 이 서신의 본문은 그 요구사항에 응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연약함을 위해 마련된 조처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제사장

의 이미지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보수(補修)되고 갱신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우리들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를 상기시켜 주는 간격적(可見的)인 징표이다. 그 까닭은 제사장이란 우리들에 대해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겨진 경우가 아주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동시에 우리의사람이라는 사실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현존(現存)과 우리의 요구와 우리의 삶을 대표하는 자였다. 오늘의 본문은 제사장의 직분 가운데 바로 이 후자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제사장은 우리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완벽한 적절성과 종국성(終局性)을 단번에(one for all)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찬양하고 있다.

단번에! 이 표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완전한, 완성된, 적절한, 전적인, 최종적인-이러한 말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행위를 찬양하기 위해사용된 단어들이다. 그러나 단번에라는 말에는 뭔가 중압감과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회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 우리도 일회적인 행동인 세례를통해 그의 죽음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상 한번으로는 불충분하지 않은가 단번에라는 말의 의미는 세례 후에 짓는 죄와 관련해 위협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 결과 세례를 미루는(거의죽기 직전까지) 관습이 생겨나게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의 본문에 그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곁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해 주고 계신다는것이다. 그분, 곧 우리의 유혹과 두려움과 고난과 죽음을 체휼하신 분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긍휼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른 저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기술하면서말한 내용을 자기 자신의 범주 내에서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오랜 옛날의 단회적인 행위에대한 추억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에의해 끊임없이 갱신되며 보양(補養)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육신의 사건 전체는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반짝했다가 지금은 희미하게 멀어져 간 캐멀롯(Camelot,영국의 아더 왕의 궁전이 있었다는 곳-역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행인 넷이서 그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 중 한 사람은 그의 경솔함을 나무라면서 그런 고생을 해도 싸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동네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보기 흉한 그 구덩이 주위에다 관상수(觀賞樹)와꽃을 심었다. 세 번째 사람은 그 구덩이에 빠지는 자는 누구를막론하고 25불의 벌금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간판을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마침 구덩이 옆을 지나는 길에 이 위험을알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라고 하면서 억센 손을 내밀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따금 이 네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로 제시되어 왔다. 나는 과연 이 중에서 누구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있는가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이 본문에서 듣고 그럼으로써 이 본문을 통해 선포되는내용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한 한

서기관의 동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 질문 자체는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랍비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오랜 세월동안 토론해 왔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각기 상이한 관점에따라 여러 가지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인터뷰에서 이 질문이 제기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의 쟁점(爭點)은정통주의이며, 이 쟁점의 해답은 곧 이 교역자가 지도자로 일컬어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를 판가름한다. 그것은 분명코 하나의 질문이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고전 클럽에서 다과회가 있은 후 30분간의 토론 시간을 사작하는 질문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번주 모임의 주제는 성서이다. 그것도 또 하나의 질문이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이번에는 논쟁의 와중에서 이 질문이 던져졌다고 가정해 보자. 참석자들은 이미 두 패로 나뉘어져있고 양극화되어 있다. 여기서, 이 질문에 답하는 자는 이쪽 진영 아니면 저쪽 진영에 속하게 마련이다. 그것도 역시 하나의 질문이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결단하는데는 아예 신경을 쓰고 싶지 않으면서도 비종교적인 사람은 되고 싶지 않고, 더우기 지옥 가는 것은 죽어도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이 질문을 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목사님, 아주간결하게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러한 종교 문제는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까요. 이 또한 역시 하나의질문이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질문자는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방팔방에서 산적(山積)한 요구에 접하게 된다. 지도자들과 주석가들은 저마다 자기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통제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비록 우리는 경우에 따라 임기웅변으로대체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지침이 될만한 어떤 원칙은 필요하다. 그러한 원칙이 있어야만 우리의 삶은 수많은 상대적인 것들과 또한 무가치한 선택의 여지들을 인해산산히 부서지지 않을 수 있다. 오셰로비치(Oscherovitch)가 이디쉬말(Yiddish)로 쓴 중요한 것(Der Ikker)이라는 표제의 고시(古時)를 기억하고 있는지(이디쉬말이란 독일어에다 슬라브어와 히브리어를 혼합한 언어로서 유럽 및 미국의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음-역주)

설령 그대의 사물관(事物觀)이
달라진다 한들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세

설령 그대가 옛 꿈들을 비웃고 싶은들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세

비록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 언젠가는 후회하리라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다 해도
그 역시 중요한 일은 아닐세

하지만 중요한 일이 없다고
경솔하게 속단하는 건 금물이지
-이것이 곧 중요한 일이니깐.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병행구와는 달리 오늘의 복음서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질문자을 만날 수 있다. 대답은 이러하다-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먼저 내게 말하라. 네가 왜 그러한질문을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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