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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마 1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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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인간을 지배하는 특성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있는 방면에 자신의 인생을 보는 시각은 철저히 주관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정의로와야 한다는 입장에서 판단하며 자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와 이해라는 사랑의 도덕성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이유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려는 관용적인 태도가 인간들에게 인색한 것이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결코 종교적이며 감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현실성에 참여하는 동일한 정서로 예수님의 고난의 사건을 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성경을 보는 방법에 자세적인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의 고난과 실패의 환경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경의 인물의 죄를 접근할 때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접근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을 내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그렇게 경험하고도 하나님앞에서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인생을 감상합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능력을 그렇게 경험해 봤다면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나에게 하나님은 그러한 경험을 주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의 경험보다 적다고 여러분은 믿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안에 계신 성령님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난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서 진정한 삶이 어떤것인지를 깨닫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이 어떤 종류의 고난이었는지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말 앞에 항상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항상 도덕적이며 종교적 의미에서 고난의 성격을 생각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특성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성격을 우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구체적인 시작은 가룟유다의 배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없는 가룟유다의 절망과 물질에 대한 갈증은 자신을 가르치고 사랑한 예수님을 은 30에 제사장들에게 넘겨 줍니다.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예수님의 고통을 우리가 과소평가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고 더 나가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년을 함께 하며 모든 것을 전해준 제자들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모두 떠남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때는 예수님의 기적을 함께 경험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던 모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주님의 고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배신과 버림의 결과가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고난을 역사속에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그것은 배신과 버림받은 한 인간의 절망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관계를 포기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이기성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서로를 영원히 책임지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이 십자가의 고난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위대하게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가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시는 증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 용서의 삶에 동참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고민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 자신에 대한 고백(마16:21)
우리는 오늘 본문에 고백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6장13절에서 20절을 보면 그 위대한 신앙의 고백인 가이사랴 빌립보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년동안 교육을 시키시고 이제 마지막 테스트를 치룹니다. 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루는 문제로 자신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답을 내어 놓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이 대답에 크게 만족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약속을 축복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제자들과 3년을 함께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신앙의 고백을 들으시고 비로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하시는 예수님의 결단속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영웅적인 기분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이 고난의 순간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민을 추적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는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이 그렇게 동화적이며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와의 대화를 보게 되면 좀 더 분명하게 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베드로의 사랑(마16:22)
예수님의 고난의 예언을 들은 베드로는 크게 당황하며 애뜻한 마음을 갖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난다는 말앞에 베드로는 무너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베드로의 사랑이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 한마디는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벅차기만 했던 예수님에게 베드로의 이 달콤한 사랑의 고백은 하나님앞에 순종하려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무력화 시켰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이 예수님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기에 베드로의 간절한 사랑의 고백앞에 자신의 결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예수님의 가르침(마16:23-25)
베드로의 이 간절한 호소앞에 예수님은 너무도 냉정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간청이 자신을 넘어지게 할 정도로 마음을 약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속에는 인간적인 사랑을 거부해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은 너무도 잔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신과 버림을 당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인간적인 사랑마저도 거부해야 하는 고독을 갖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감히 그 누가 예수님의 고난속에 우리의 죄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흩드러진 감정을 정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교훈을 주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오늘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재미있는 관광여행이나 취미생활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댓가지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엄연한 생활이며 새로운 가치관인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주며 새로운 소망과 도덕성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변화를 허용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관에 눈을 뜨게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체적인 변화를 결단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평소에 하지 않던 금식기도를 한다거나 철야를 하면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이라면 그것은 누구나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종교적인 행위로 자신의 신앙을 위안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는 내용없는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어느때보다 고난 주간을 경건하게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시간들을 예수님을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드리는 것은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속에서 우리의 교만을 발견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피흘림속에 우리의 죄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시며 기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피흘리시며 구원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이 시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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