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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후에 오는 영광을 아느냐 (눅 24: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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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체를 보는 것은 흰자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검은자를 통해서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눈의 검은 부분을 통해서 물체를 바라보며 식별하도록 만드셨을까요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의 인생이 어두울지라도 너의 현실이 눈동자같이 캄캄하다고 할지라도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느니라! 우리들에게 참으로 인생의 깊은 지혜를 제공해주는 답변인줄 압니다. 인생의아름다움은 밋밋한 평안함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은괴로움의 사건 속에서 아픔의 상처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의 멜로디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울부짖는 사람을 보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왜 나에게 이런 환난을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기쁨의 여신)은 많은 말을 조잘거리고 떠나 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기는것은 없습니다. 반면에 (환난의 여신)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떠나가게 되면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인격과 연단된 신앙을 얻게 되지만 그 많은 시련 중에 주님 때문에받는 시련은 더욱 값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 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옳바른 삶의방법을 가르쳐 주신 질문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1.십자가는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예수에게 갑자기 덮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되풀이하여 말씀하셨고 필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갔을 때에 제자들에게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시몬이 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직면할 수 있는 자세가 제자들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을 내렸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을 올라가 장로들과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더라(마16:21) 그후 삽자가가 다가와 예수님이 체포 당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낙심하고당황하였습니다. 이들은 위대하신 분이 자신을 죽음에 방치한다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시몬은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몬의 당황하고 절망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말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는 지금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마2653-54).

 주님은 마치 내가 피하려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룰 수 없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나다름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독한 투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실 수 없는 것일까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7). 그러나 예수님의두 번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용납의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원하나이다(마26:42) 이것은 마치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예수님은 십자가를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듯 미리 내다본 그 비극적인 죽음은 언제나 불가피한 것입니다.

 2.십자가는 필요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십자가가 필요한 것으로 여기셨듯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뒤돌아 보면서도 십자가를 필요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이 두 제자를 만나 함께 이야기하셨을 때에는 이미 십자가 처형의엄한 시련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이미 혹독한 고통은 하나의 기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겪고 부활을 경험하신후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쓸데없는 일로 여기지 않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를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셨기 때문에 이 혹독한 경험속에서 단순한 비극이 아닌 승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는 정도는 비극이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냐 필요없는 것이냐에좌우됩니다.

(예화) 다섯살 박이 아들과 함께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갔던 어떤 아버지의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특별한 정을 쏟고 있었습니다. 이 날 우연히 아버지는 술 친구들을 만나 평소 보다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더 없이 유쾌하였습니다. 그리하여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속도를 줄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그는 자제력을 잃어버린 그의 차는 뚝 아래로 곤두박질을 하고말았습니다. 그 자신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그의 어린 아들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아들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으로 인하여 아들을 잃었다고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 슬픔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여기에 너무나 비통해 하는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삼하18:33).

다윗은 젊고 총명한 아들이 반역자의 무리 속에 끼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듣고 몹시 傷心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 올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만일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찾아 나섰더라면 아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고 압살롬은 죽음으로 그 생애를 마쳤다는 悲報를 듣게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는다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은 倍가되어 다가 왔습니다. 비극이 가치가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할 때 그 뼈저림이 더해집니다. 반면 필요한 비극이라고 여기게 될 때 그 뼈저림은 다소 완화됩니다.

(예화)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밭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어린 두 아들은 그 가까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일을 하던아버지가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다가 큰 개 한마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다가오는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곧 미친 개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옆에 있는 창고로 숨으라고 소리치면서 다가오는 짐승을 향해 달려 나가 덮쳤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무사했으나 아버지는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개의 물어 뜯기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미친 개의 독을 완전히 입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너무 중태였습니다. 臨終이 가까워 잠시 정신을회복한 아버지는 그의 아내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너무 상심하지 마시오.아이들이 무사하지 않소. 이 길 밖에는 다른도리가 없지 않았소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없었던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3.십자가가 그토록 필요한 일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1)인류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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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유일한 구원의 희망입니다. 성도들이 이 문제를 헤아려 보는 데에는 거의 영구한 세월이 걸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의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십자가의 신비에 대하여 완전히만족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 대하여 오히려 나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했다고 믿습니다. 십자가가 성경말씀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필요하게 만든 것이 성경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이 씌어지게 만든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고난받는 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져온 것은 이사야 53장이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본문이 불멸의 희망의 말씀이 된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2)주님은 약해서 죽으신 것도,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죽으심도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 지배자들과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이 예수님보다 막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약하게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약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그의 손에서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우리 주님은 인간의 범죄로 화가 나신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죽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비방이요, 하나님을계시하려 오셨던 아들에 대한 비방이기도 합니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4) 이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음이라(고후5:19)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보다 더 이 두분이 완전하게 하나가 되신 적은 없었습니다.

 4. 그렇다면 십자가는 왜 필요했습니까 1)인간적인 면에서 먼저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주님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사람들과 심한 믓모가 다가옴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담담하게 죽거나 타협을 받아들일 두 가지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야겠다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는 양심을 위하여 죽은 다

른 영웅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고난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죽음에는 남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바울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골1:24)수 있게 하는 점도 있습니다.

 2)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과 인간의 인간됨을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점 죄없으시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죄악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사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고난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신 위대한 말씀 곧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으리라(요12:24)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진리인 만큼 그를 위한 진리이기도 하였습니다.

 3)인간을 자신과 화해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십자가가에서 우리는 우리를 꼼짝못하게 하는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자 할 만큼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는 이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경험입니다.

 5.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각오한다면 1)우리를 영접하여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의 삶을 바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영접하여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비극적인 갈등은 끝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가지게 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 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롬5:1) 될 것입니다.

 2)하나님께 복종하여 화평을 이루게 되면 내적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면 우리 자신과도 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이48:22)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 내면에 평화가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산, 곧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하신 유신을 물려 받을 수 있습니다.

 3)사람들 간의 틈을 메워 줍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신 이가 주님께 우리를 내어 주게 되면 우리는하나님과 화평하고 내면적 평화를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우리들 서로 간에도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까지 사랑하셨던 형제라고 생각하는 때 우리는 남에게 무관심하거나 남을 조소하거나 멸시하는 눈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람과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모든 갈라진 틈을 메워 나갔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자신들이 화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화해의 역군이 되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화) 인디안의 용사들은 싸움에 나아갈 때 한 사람의 발자욱만 남겨 놓습니다. 선두에는 강한 추장이 큰 도끼와 활을 가지고 화려한 그림 물감을 몸과얼굴에 칠하고 머리에는 독수리 깃털을 달고 맨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길을만듭니다. 그리고 용사들은 일렬로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하게 추장의 발자취를밟고 따라갑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한 병사의 발자취와 같습니다. 이 발자취는 용사의 이동을 모르게 합니다. 이 용사들은 반드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갈바리아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는반드시 승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에 들어 가신 발자취를 따라 다가아와 힘들게 하고 있는 고난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승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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